돈 없이 사는 방법, 고민 중...
상태바
돈 없이 사는 방법, 고민 중...
  • 김홍한
  • 승인 2015.02.22 20: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홍한목사의이야기 신학

벗, 스승, 제자

더불어 뜻이 통하고 더불어 진리를 논할 수 있어야 벗이다. 나이는 관계가 없다. 본받을 만 한 이가 스승이다. 솟아오르게 하는 이가 스승이다. 지식을 가르쳐 주는 이는 스승이라기보다는 교사다. 스승을 능가하는 이가 제자다. 지금은 비록 스승만 못하지만 장차 그러해야 한다. 스승을 뛰어 넘어야 제자다. 스승만 못한 제자는 스승의 수치다. 스승을 딛고 올라서야 제자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아졌을 때, 이제 제자는 스승이 되고 스승은 제자가 된다.

예수살기 순회모임을 하는 도중 전남 순천에서 본받을 만 한 분을 만났다. 평소 그분의 삶이 깨끗하다는 것과 언행이 일치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만날 기회가 적고 만난다 하더라도 워낙 말수가 적어 아쉬움이 있었는데 한번 툭 뱉은 그의 한마디 말이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분은 “돈 없이 사는 방법” 을 고민 한다고 했다.

내 딴에는 돈에 대해서, 자본주의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고 나름대로 할 말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처 “돈 없이 사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바가 없었다. 어떻게 그분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 분의 삶이 순수하고 깨끗해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학문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경험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순수하고 깨끗해야 할 수 있다.

돈 없이 사는 방법

“돈 없이 사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겠다. 문득 우리선조들의 辟穀術(벽곡술)이 생각났다.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등을 먹으며 사는 방법이 벽곡술이다. 벽곡술은 본래 신선들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지만 조선 말, 극도로 가난한 조선의 민중들 중에는 절대빈곤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벽곡술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더러 있었다. 힘없고 순박한 민중들이었기에 감히 투쟁이니 혁명이니 하는 것을 꿈꾸지 못하고 지극히 소극적인 방법으로 먹지않고 사는 법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것을 깨친다면 정말 삶의 고
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는 쌀통,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는 술통, 무엇이든 끊임없이 쏟아내는 맷돌, 아무리 베어 먹어도 금방 새살이 돋아나는 視肉(시육), 이러한 것은 가난하고 배고픈 민중들이 만들어낸 설화들이다.

고대부터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이 연금술을 연구한 것이 화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면 무한동력을 꿈꾸던 이들은 물리학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무한동력이 없을까? 정말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시육은 없을까? 저 태양은 지구에 무한한 햇빛을 쏟아 붓고 있는데 어찌하여 무한동력이 없다하는가? 역시 저 망망한 바다는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는다. 그 안에 있는 온갖 물고기는 아무리 잡아먹어도 줄지 않고 저 푸르른 대지는 온갖 먹을 것은 내 놓는데 어찌하여 시육이 없다 하는가? 어찌하여 조선말 가난한 민중들은 벽곡술을 찾아 헤매고 현대의 가난한 민중은 돈 없이 사는 방법을 고민할까? 이런 근원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답도 역시 근원으로 돌아가서 찾아야 한다.

문명의 시작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열매를 다 따먹을 수 있으되 동산 한 가운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먹지 못하게 했는데 뱀이 유혹한다.

“따먹어라. 죽지 않고 눈이 밝아져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결과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노동이라는 고통, 해산의 고통, 게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자연적 존재에서 문화적 존재가 된 것이다.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부끄러운 것을 알고 옷을 지어 입었다. 문명의 시작이다. 계급이 만들어 지고 법이 만들어 진다. 禮도 발달한다. 기술도 발달하여 도구를 만들고 사용한다. 불을 사용한다. 화석연료를 사용한다. 물을 통제한다. 군대를 조직하고 전쟁을 한다.

인간을 자연과 구별하는 몇 가지가 있다. 성경 창세기에서는 부끄러운 곳을 가리는 옷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프로메데우스가 가져다 준 불이다. 성경의 바벨탑 설화에서는 언어다. 중국설화에서는 治水(물다스림)다. 문명은 사람을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역시 사람을 짐승보다도 못한 처지로 내몰기도 한다. 인간이 만드는 문명, 그 문명으로 말미암아 인간사회의 억압과 착취는 짐승들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치밀하고 교묘하게 발전했다. 억압과 착취가 정당화됨은 물론이고 전쟁도 정당화 하고 온갖 인간차별도 정당화 하였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문명, 특히 물질문명은 얼마나 많이 소비할수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계급을 나눈다. 그 도구가 돈이다.

여러 날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것 같다. 적게 먹고 살 수는 있어도 안 먹고는 못사는 것 아닌가?

먹는다는 것이 생명을 먹는 것이다. 내가 먹는 밥알 한 알이 그대로 생명이고 김치 한 조각이 그대로 생명이며 콩 한 조각, 멸치한 마리, 고기 한 점이 그대로 생명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의 생명을 먹어야 하니 그것이 서글프다.

돈 없이 살수는 없을까? 태양은 무한에너지를 공급해 주고 대지와 바다는 무한 식량을 공급해 주니 철저히 자연으로 돌아가서 살면 돈 없이도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오늘날의 소위 문명생활은 돈 없이는 불가능하다.

돈 없이 살려면 철저히 자급자족의 경제체제여야 한다. 혹 잉여생산물이 있다면 물물교환으로 간단한 도구나 가구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화생활은 어림도 없다. 문화주택에서 살고 자동차를 타고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인터넷을 접속하는 것과 같은 일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단순한 삶

일전에 이야기 신학을 통해서 말하기를 “행복한 삶을 살려면 삶이 단순해야 한다. 삶이 단순할수록 행복지수는 높아진다.”고 했다. 삶이 복잡하면 생각도 복잡하다. 생각이 복잡하다는 것은 번민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멀리 달아난다.

삶이 단순하려면 우선 생활도구가 단순해야 한다. 온갖 문명의 이기들은 편리함도 주지만 더 많은 일들을 만들어 낸다. 교통의 발달은 사람의 이동을 매우 빈번하게 만들었다. 옛날에는 평생 한 두번 했을 서울 나들이를 오늘날에는 일 년 에도 여러 번 한다. 교통이 편리해진 만큼 이동도 많아졌다. 일이 많아져서 서울나들이를 자주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이 발달해서 서울 나들이가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옛사람들 보다 훨씬 바쁜 삶을 살아간다.

나는 평소 “나 죽을 때는 남기는 것이 없어야지”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살림살이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줄였다. 언제부터인가 책도 줄이기 시작해서 이제는 책장 하나 남겼다. 이렇게 줄여 나가는 중 노자를 만났다. 노자 말하기를

“덜어내고 또 덜어내라(損之又損)”

“學하는 것은 날로 더하는 것이고 道를 따르는 것은 날로 덜어 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는 것, 이에 이르러야 無爲하는 것이다.” 고 했다. -노자 48장-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노자가 버리라는 것은 학문이 아니다. 잊고 버려야 할 것은 학문과 지식, 존재가 아니라 욕망이다. 욕망이 이끄는 학문을 버리라는 것이고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지식을 버리고 욕망을 추구하는 자기 존재를 버리라는 것이다. 돈에 팔리는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명예를 높여주는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소유물도 버려야 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몸이 무거워서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몸도 줄여야 한다. 새는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 뼛속까지 비운다. 생각도 줄여야 한다. 생각만큼 무거운 것이 없다. 무거운 생각이 집착이고 욕망이다. 군더더기 생각들을 과감히 제거하다보면 어느덧 생각은 가벼워지고 삶은 단순해진다.

생각의 군더더기들을 줄이고 삶도 단순히 하고 살림살이도 단순히 하면 거주공간도 줄일 수 있다. 자동차도 없앨 수 있다. 이렇게 저렇게 삶을 단순화 시키다보면 그만큼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돈, 돈, 돈

사마천은 말했다.

“대체로 일반 백성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며, 천
배 많으면 그의 일을 해 주고, 만 배 많으면 그 하인이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사기> 화식열전
돈의 위력이 대단하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 물질만 얻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얻을 수 있다. 전문지식인을 고용함으로 지식도 살 수 있다. 아름다움도 살 수 있고 건강도 살 수 있고 수명도 연장할 수 있다. 권력도 살 수 있다. 명예도 살 수 있다. 사랑도 살 수 있다. 중세 서양에서는 구원도 살 수 있었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돈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하니 돈을 섬기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살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엄연한 현실이다.

돈이 악할까? 많은 사람들이 돈의 악마성을 강조하고 돈을 멀리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말이고 맘에 없는 말이다. 이런 이율배반이 없다. 돈을 악하다고 규정하면서 돈을 좋아하고 심지어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한심한 존재가 사람이다.

돈의 속성

돈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가치중립적이다. 돈은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니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돈의 속성대로 이해할 일이지 돈을 악하다 선하다 하면 어리석은 일이다.

노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물과 어머니 사상이다. 그 중 물에 대하여 말하기를 上善若水(지극히 선한 것은 물과 같다) 라고 했다. 그런데 물과 돈이 닮은 점이 많이 있다.

물은 항상 아래로 흐른다. 그래서 큰 물 바다로 모인다. 돈도 항상 어디론가 흐른다. 그것이 위인지 아래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흐르고 흘러 한곳으로 모이고자 한다. 그래서 거대자본을 이룬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 것처럼 흐르지 않는 돈도 썩는다.

물이 닿는 곳에는 생명이 움튼다. 돈이 닿는 곳에는 생산이 일어난다. 그러나 홍수가 나서 거대한 물이 휩쓸고 지나가면 남는 것이 없듯이 거대자본이 횡포를 부리면 서민들의 삶은 비참해 진다. 물은 그릇을 마다하지 않는다.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게 담기듯 돈도 그러하다. 돈은 주인을 마다하지 않는다. 성인의 손에도 쥐어지고 사기꾼의 손에도 쥐어지며 고리대금업자의 손에도 거지의 손에도 쥐어진다. 물에는 깨끗한 물이 있고 더러운 물이 있다. 물 자체가 더러운 것은 아니다. 불순물이 섞이면 더러운 물이다. 홍수가 나서 온 세상이 흙탕물로 뒤덮였을 때는 깨끗한 물이 귀하여 먹을 물조차 구하기가 힘들다.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을 때 그 세상의 돈은 비교적 깨끗하여 세상을 윤택하게 한다. 절망에 빠진이의 얼굴을 밝게 만들기도 하고 기업도 살리고 나라도 살린다. 그러나 세상이 불의하고 혼란할 때의 돈은 더러워서 부정부패와 착취의 도구다. 그래서 불의한 시대에 부요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사랑을 베풀고,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돈만큼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이 없다. 노자는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남는 데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데에 보태지만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 모자라는 데서 덜어내어 남는 데에 바친다. - 노자 77장 -

고 했다. 그러니 훌륭한 지도자는 하늘의 뜻을 따라 “남는 데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데에 보태”는 이다. 그러한 지도자라면 백성들은 목숨 바쳐 충성할 것이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돈은 많고도 많다. 그리고 돈은 주인을 찾아 헤맨다. 드문 경우이지만 돈을 많이 가진자들은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유용하게 돈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될 때는 아낌없이, 대가없이 돈을 투자하기도 한다.

부자는 돈을 알고 돈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다. 단지 돈을 모으고 소유만 하는 이는 守錢奴(수전노/ 돈을 지키는 노예)일 뿐이지 결코 부자라 할 수 없다.

인도의 성자 비노바 바베는 땅이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지주들에게 토지 헌납을 호소했다.

“만약 당신이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면 땅 없는 가난한 이들을 여섯 째 아들로 생각하고 그를 위해 소유한 땅의 6분의 1을 바치십시오!"

비노바 바베의 호소에 감동한 지주들은 아낌없이 토지를 헌납했다. 이렇게 토지를 헌납한 이들은 수전노가 아닌 부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1951년부터 13년 동안 그는 인도 전역을 걸어 다니면서 헌납 받은 토지가 500만 에이커(남한면적의 1/5)나 되었다.

세상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돈을 모을 명분이 없는 것이다. 정당한 명분이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모일 수 있다.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서 육생은 말한다. “신이 듣건대 ...‘왕노릇 하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 원리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 수없이 인용되는 말이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도 이 말은 여러 번 나오는 말이다. 일반 백성들에게 호구지책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정치보다, 종교보다, 사상보다 중요한 것이 호구지책이다. 백성들은 누가 자신들을 통치하든 관심이 없다. 혹 그가 이민족이라도 그러하다. 자신들을 배불리하는 이에게 마음을 주고 복종을 한다.

돈은 목적이 될 수 없다.

재물을 모으고자 하면 모을 수 있는 것일까? 아마 근검 절약하고 성실하게 노동하면 작은 재물을 모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특별한 변고가 없어야 가능한 일이다. 작은 재물을 얻는데도 이러한데 큰 재물을 얻는 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子夏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요 부와 귀는 하늘에 달렸다(死生有命 富貴在天)”고 했다. -<논어> 안연 5장 -

부자들이 매우 좋아하는 말이다. 자신들의 부가 하늘이 허락했다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가? 만민 평등이라는 불교도 “부귀한 자는 전생에 쌓은 덕업으로 현생에서 부귀하게 되었다”는 논리로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작은 부는 성실하고 근검절약함으로 얻을 수 있겠지만 큰 부와 권세는 개인의 그러한 미덕으로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작은 부 조차도 진리를 추구하는 이가 얻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한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에게 돈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요 수단도 되지않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패공(유방)은 선비들이 찾아오면 언제나 그 관을 빼앗아 그 안에 오줌을 누곤 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목청 높여 선비를 욕했다. -<사기> 역생·육가열전-

어느 날, 패공(유방)은 주창을 쫓아가 그 목을 누르고 앉아 “나는 어떤 임금이냐?”고 묻는다. 밑에 깔린 주창이 말하기를 “폐하는 걸, 주와 다름없는 폭군입니다.”고 했다.

패공의 하는 짓이 마치 코미디 같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덕망이 있고 재능이 있다고 다 출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없다고 출세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유방은 출신이 천하고 학문이 짧아 그 행하는 짓이 천박했지만 천하의 지존이 되었다. 굳이 고전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그러한 예를 볼 수 있다. 나의 중·고등학교 동창생들의 면면을 살펴보더라도 그렇다. 훌륭하다 할 수는 없어도 사람 됨됨이가 원만하고 성실하고 총명하되 그저 평범한 삶을 살거나 궁핍한 삶을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생각이 간사하고 성품이 비루하나 출세를 거듭하고 높은 자리를 유지하며 거들먹거리는 이들도 있다.

목회를 하면서도 여러 번 느끼는 바가 있다. 시류를 따르는 목회 소신과 얄팍한 처세술을 가지고 대형교회를 이루던지 대형교회에 청빙 받아 목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매우 훌륭한 인격과 학문을 갖추었건만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이도 있다. 세상사가 그러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이 그러한지 알지 못하겠다.

재능 있는 이가 등용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비천한 자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백안시 할 것도 아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출세한다는 것이 좋은 것일까? 일단은 좋은 것이되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제명대로 살다 죽었을 것을 소위 출세했기에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역사 속에는 무수하다.

돈에 목숨 거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지만 돈을 멀리할 것도 아니다. 잠언서 기자가 말씀하신다. 돈에 대한 깊고 깊은 성찰을 거친 가르침이다.

“저에게는 당신께 간청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을 제 생전에 이루어 주십시오.
허황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고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잠언 30장)


=======================================================
대전광역시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한국기독교장로회)새교회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