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 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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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 진다는 것
  • 김홍한
  • 승인 2015.02.05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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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성서에는 이단에 대한 정죄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단으로 지목된 자들 중에는 사도 바울도 포함된다. 율법을 거부하고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였다는 것이 그가 이단으로 지목된 주된 원인이다. 도대체 사도도 아닌 사람이 자칭 사도라고 하면서 사도들을 무시하고 율법도 부인하니 단순한 이단이 아니라 이단의 괴수로 여겼을 것이다.

   
바울선생도 지지 않는다.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향해서 아예 성기를 잘라 버리라.(갈5:12)는 지극히 심한 말로 일갈한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세속의 유치한 원리들을 버렸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처럼 ‘이것은 집지 말고, 저것은 맛보지 말고, 그것은 건드리지 말라’는 따위의 규정에 묶여 있습니까?”(골2:21)라고 한다. 음식을 가려 먹는 사람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규정한다.(롬14:1) 이렇게 서로를 이단이라고 공격하는 양측의 입장이 확고하여 조금의 양보와 타협도 없다.

이단논쟁은 언제나 있었지만 그 내용은 시대마다 다르다. 성서시대에는 위와 같은 논쟁이었다면 콘스탄티누스 이후에는 교리논쟁이었고 그 후에는 교리보다는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이단정죄의 주요 원인이었다.

오늘날의 이단을 정의한다면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현대인들은 많이 성숙했다. 이제는 성서시대처럼 우상에게 바쳤던 재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를 가지고 이단 시비를 하지는 않는다. 교리가 좀 다르고 신앙고백이 좀 달라도 그러려니 한다. 사실 복잡한 교리논쟁으로 들어가면 평신도는 물론 성직자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면이 많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누가 이단일까? 내 생각으로는 “욕망”이 그판단 기준이다. 성서적용과 해석도 자신의 욕망대로, 교리적용과 해석도 자신의 욕망대로 하는 이들이 이단이다. 그가 아무리 정통교단에 소속되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그 이력이 화려하더라도 아무리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진리가 아닌 자신의 욕망에 따른 종교행위라면 그것이 이단이다.

“욕망”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욕망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다. 그래서 아무도 욕망을 온전히 없앤 이는 없다. 그러면 욕망이 나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욕망은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사람들도 억제하고 절제하는 성적욕망을 절제하지 못하여 간음을 일삼고, 보통 사람들도 억제하고 절제하는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여 횡령을 하고, 명예욕에 붙잡혀 있고, 권력을 탐하는 성직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도대체 성직자라는 놈들이 무엇을 처먹었길래 진리의 길을 가기는커녕 욕망의 덩어리인고?”

어리석은 이들은 욕망과 희망을 구별하지 못한다. 사악한 놈들은 욕망을 희망이라고 포장한다. 기독교를 보면서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매우 욕망의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적극적 사고방식”,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들은 모두 욕망을 채우라는 웅변들이다.

욕망이 채워지면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는 욕망의 종교는 불신앙의 종교이다. 그런데 기독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가 욕망이 종교가 되어 있다. 오늘날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러했다. 눈에 보이는 종교는 늘 그렇게 욕망의 종교다.

사람들은 “꿈과 소망을 가지라”고 한다. 그렇지만 정작 무슨 꿈을 가져야 하고 무슨 소망을 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꿈과 소망이라는 것이 사실은 욕망이다. 걸러지지 않는 꿈, 정화되지 않는 소망은 욕망이다. 그것은 없는 것만 못하다. 꿈과 소망은 거듭거듭 걸러지고 정화되고 또 정화되어야 한다. 헛된 꿈과 욕망을 다 제거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진짜 소망만 남아 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희망이고 무엇이 욕망인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욕망이다.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 희망이다.

욕망은 지상에서의 목표인 유한하고 일시적인 것이다. 일시적인희망, 이루어 질수 있는 희망은 진정한 것이 될 수 없다. 북극성이 뱃사람들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은 가도 가도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인 것처럼 진정한 희망은 이루어 질 수 없다. 바울선생도 말씀하시기를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뿐이라고 했다.(롬8:24-25)

욕망은 이루어질 수 있기에 이루어지면 더 큰 욕망을 품게 된다. 반면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영원하다. 모든 이에게 궁극적이 기에 또한 영원하다.

희망의 우리말이 “꿈”이다. 나의 엉터리 한글풀이로 “꿈”은 “꾸어옴”의 준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꾸어온 꿈이 진짜 꿈이다. 하나님이 꾸어주신 꿈이 진정한 꿈이다. 자다가 꾸는 꿈도 꿈은 꿈이되 그 꿈은 “꾸물꾸물”의 준말이다. 꾸물꾸물하다가 제 할 일 다 하지못하고 남겨놓은 일을 꿈속에서 해결하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꿈이다. 그래서 참 사람은 (자면서 꾸는)꿈을 꾸지 않는다. <장자>에 이르기를 “옛날의 眞人은 잠을 잘 때는 꿈도 꾸지 않는다.(古之眞人, 其寢不夢.)”는 말이 이 말인가 싶다.

참 사람은 욕망을 하나하나 줄여서 無慾에 이르는 사람이다. 욕망을 줄여 가는 것이 修身이다.

어느 늦은 밤, 딸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빠, 교회 꼭 가야되?”
“나는 네가 교회 잘 다녔으면 좋겠다.”
“왜? 나는 교회 가야할 이유를 잘 모르겠어, 예배시간에 졸기만 하는데....”
“교회는 그냥 다니는 거야. 마땅히 다녀야 하는 거지 이유가 없어”
“마땅히? 이유도 없이? 그런게 어딨어?”
“진짜 중요한 것은 이유가 없어. 그냥 하는 거지.”
“천국가려는 것, 출세하려는 것, 부자 되려는 것, 건강하게 오래 살
려는 것, 행복한 삶을 살려는 것, 이런 것 어느 것도 종교의 목적
일 수 없다.”

목사인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목사가 되었는가? 내가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가? 이유가 없다. 목적도 없다. 내가 기독교인이 되고 목사가 된 것은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길들여 진다는 것

문득 “어린 왕자가 왜 자기 별을 떠났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어린 왕자>를 다시 읽었다. <어린 왕자>는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깊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고전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니 탐독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불청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아주 예쁜 꽃이 찾아왔다. 어린 왕자는 그 꽃을 사랑했고 꽃도 어린왕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왜 어린 왕자는 꽃을 떠나야 했고 꽃은 어린왕자를 잡지 않았을까?

아주 오래 전, 내가 꿈 많은 청년의 때에 나의 마음을 끄는 여인이 있었다. 그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몇 번 바라만 보다가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내 인생이 크게 뒤틀릴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또 한 여인이 있었다. 그는 나를 몹시 좋아했다. 나를 위해서는 죽음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뜨거운 사랑의 열정은 언젠가는 식기 마련, 실망할 것이다. 후회할 것이다. 나를 원망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왕자가 꽃을 떠난 이유가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왕자는 지리학자로부터 꽃이 얼마 되지 않아서 사라질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듣고 어린 왕자는 그 꽃을 혼자 두고 떠나온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돌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새로운 별 지구를 찾아 떠났다. 자신이 남기고 온 꽃을 그리워하면서….

지구에 온 어린왕자는 어느 정원에서 5천 송이나 되는 장미꽃을 발견했다. 자기별에 있는 그 꽃과 똑같은 꽃이었다. 어린왕자는 크게 실망해서 소리 내어 울었다. 자기별에 있는 그 꽃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주 귀중한 꽃 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주 흔한 장미 한 송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어린 왕자는 여우를 만났다. 외로운 어린왕자는 여우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여우로부터 “길들여진다는 것”에 대해서 배웠다. 수많은 어린아이 중에 하나인 어린왕자, 역시 수많은 여우 중에서 하나인 여우. 그런데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면 서로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길들여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어린왕자는 결국 - 독사의 도움으로 -그 꽃에게 돌아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스로가 속박 당하는 것으로 매우 부담되는 일이다. 부담되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부담도 크다. 그 부담을 감당할 자신이 없을 때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랑이 현실이되면 도무지 끊을 수 없는 소중한 관계가 된다.

나는 수십억 인구 중에 한사람이다. 게다가 특별히 잘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모든 생명이 다 그러하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하다.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고 목사가 되었을까?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도 아니다. 기독교가 나를 길들였고 예수가 나를 길들였기 때문이다.

욕망을 채우고자 함은 사랑일수 없고 종교일수 없다.

나를 길들이고 내가 길들인 사랑하는 존재와의 관계는 아낌없는 헌신의 관계이지 서로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관계일 수 없다.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관계는 필경은 깨지고 만다. 파탄이다. 불행이다. 지속될수록 고통만 가중된다.

종교는 욕망을 극복하고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결코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일 수 없다. 그래서 참 종교인은 욕망을 멀리해야 한다. 누군가가 높여주려고 하면 달아나야 한다. 누군가가 존경한다고 하면 두려워서 만류해야 한다. 필요 이상의 재물은 거부해야 한다.

종교에 소망이 있다.

욕망을 어떻게 극복할까?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욕망의 문제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번창하는 이유는 욕망의 문제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하나?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대중의 끝없는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란 불가능하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이 심해지는 것이 욕망이다. 그것을 채우려고 하다가는 인간세상 자체가 망하고 말 것이다. 자본주의는 끝없는 식욕으로 주변을 모두 갉아먹고 끝내는 자기 자신까지 갉아먹는 에리식톤이다. 자본주의는 어떤 형태로든지 파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대중의 욕망을 채우려 하기 보다는 부질없는 욕망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무엇이 할까? 철학이 한다. 문학이 하고 예술이 한다. 그 무엇보다도 종교가 한다.

자신의 욕망을 아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잘 모른다. 그래서 입으로는 원칙을 말하고 입으로는 옳은 것을 말하지만 몸은 욕망을 따라간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겉과 속이 다르다. 그런데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 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지 겉과 속은 다르다. 그 때 누군가가 그것을 정확히 지적하면 어떤 이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부인하고 어떤 이는 심히 부끄러워하면서 그것을 시인하고 자신을 바로잡는다.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그의 욕망을 알면 된다. 그도 모르는 그의 욕망, 그것에 부응하면 그는 단박에 반응한다. 이렇게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정치기술이다. 그 정치기술을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파악해야 한다.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알 수 있다. 알면 통제할 수 있다. 그것이 내 밖에 있다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겠지만 내 안에 있기에 통제할 수 있다.

기도로 욕망을 제어 할 수 있다

헛된 욕망을 억제하고 희망을 키울 수 있는 것이 祈禱(기도)다. 우리들이 하는 대부분의 기도는 안타깝게도 욕망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이지만 깊고 진실한 기도는 욕망을 제거한다. 祈禱의 한자말은 제단(示)위에 도끼(斤)올려 놓는 것이 祈(기)다. 제단위에 목숨(壽) 올려놓는 것이 禱(도)다. 그러니 목숨 걸고 하는 것이 기도다. 이런 기도는 매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 한두 번, 많아야 몇 번 할 수 있는 기도다. 야곱이 얍복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한 것이 바로 이 기도다.

기도의 우리말이 ‘비나리’다. “간절히 바란다”는 뜻과 “비운다”는 뜻이다. 진실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가 간절히 바랐던 것이 헛된 것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비우게 된다. 예수께서 하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비나리다. 그래서 진실한 기도는 말없는 기도, 바람이 없는 기도, 감사함조차도 없는 기도가 된다. 이러한 기도는 늘~ 할 수 있는 기도다. 그저 정성된 삶이 기도다. “근심과 걱정도 기도”라고 하지만 근심과 걱정도 욕망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도 사라진다.

- 논어 읽기 -
陽貨 12장 子曰자왈: 「色색 厲려 而이 內내 荏임 , 譬비 諸제 小人소인 , 其기 猶유 穿천 窬유 之지 盜도 也야 與여? 」(공자 왈 “표정은 위엄 있으되 안으로는 유약한 이를 소인에 비유하니 마치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둑과 같은이다.”)

* 厲(려/ 위엄있는 모습), 荏(임/ 柔弱한 모습), 穿(천/ 뚫다), 窬(유/넘다)

단순한 소인이 아니다. 위엄 있는 군자인척 하는 소인으로서 덕을 해치는 鄕原이다.

13장 子曰자왈: 「鄕향 原원 , 德덕 之지 賊적 也야 . 」 (공자 왈 “향원은 덕을 해치는 도적이다.”)

* 鄕原(향원/ 대중적 존경을 받는 지역 유지), 동리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사이지만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군자인척 하는 이들이다. 맹자는 이들을 사이비군자라 하였다.

맹자도 말하기를 “鄕原(향원)은 덕을 해치는 도둑이다. 비난하려 해도 특별히 비난할 것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구실이 없으나 단지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 집 안에서는 충심과 신의가 있는 척하고, 밖에 나가 행동할 땐 청렴결백한 척한다. 그래서 스스로도 옳다고 생각하고 사람들도 다 좋아하지만
그들과 함께 올바른 도에 들어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이비(似而非)한 것을 미워한다. 말 잘하는 것을 미워함은 그가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 고 했다.

향원은 대체로 학문을 했으나 道에는 관심이 없고 학문을 수단으로 현세적 명예와 이익의 추구에 급급한 소인이다. 그러나 결코 단순한 소인이 아니다. 율곡 이이는 그의 저서 『聖學輯要』에서 향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탐관오리나 아첨꾼은 소인의 전형으로서 누구나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겠으나 유독 사이비(似而非)한 인물만은 그 실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낮 빛은 근엄하고 입은 옳은 소리만 하는지라, 자태와 언행이 참된 군자의 그것과 닮아 있고(似), 근후(謹厚)하여 꼬집어 비난할 데가 없는지라, 온전하고 허물이 없
는 군자의 행실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현은 그러한 인물을 더욱 깊이 경계했던 것인 바, 음험하게 세상에 아부하면서도 항상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自以爲是), 속된 무리와 한 패가 되어 무사안일과 저열한 적당주의에 안주함으로써 결국은 이상적 개혁을 실현하려는 선비의 앞길을 저지․방해 하고 나아가 참된 학문의 진로를 두절시켜, 이단의 혹세무민보다 (국가사회에) 더욱 심대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 다름 아닌 향원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사이비군자가 아닌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소위 군자입네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이비군자이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사이비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렇게 비난하는 순간 자신도 그 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이비라고 비판하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들이 아마도 기독교인일 것이다. 필자는 기독교인으로서 그것이 부끄럽다. 자기성찰을 진지하게 한다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말이 “사이비”다.

14장 子曰자왈: 「道도 聽청 而이 塗도 說설 , 德덕 之지 棄기 也야 . 」 (공자 왈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해버리는 자는 덕을 버리는 것이다.)

* 塗(도/ 길) 길에서 무슨 말을 듣는가? 귀한 가르침을 들을 수도 있고 떠도는 낭설을 들을 수도 있으며 민초들의 정서를 들을 수도 있다. 아마도 길거리에서 듣는 말이라면 귀한 가르침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더라도 민심을 들었다면 함부로 흘려버릴 수 없다. 역시 떠도는 낭설이라 하더라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해버린다는 것은 민심을 전혀 고려치 않는 것이다. 혹 그 말이 떠도는 낭설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신중치 못함이다. 군자는 어떤 말이던지 듣고 말하는데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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