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역사와 문화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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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역사와 문화를 찾다
  • 류기석
  • 승인 2009.10.0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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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 운서산 장육사와 화수루, 까치구멍 집까지

서울에서 꼬박 한절은 족히 넘게 걸리는 오지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식사로 맛 좋은 동해의 바닷 바람을 맞은 영해사과로 나누었다. 이른 아침 맑고 청정한 하늘과 땅의 기운이 맞닿은 골 바람이 정지된 듯한 산골마을의 풍경을 담아 눈앞에 펼쳐진다.

영덕군 영해면 인량리에서 69번 지방도로를 따라 창수면 소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곧장 오촌리방향으로 길을 잡아들다가 이정표하나 변변치 않은 갈천리 장육사입구에서 또다시 좌회전하여 새로난 아치형 다리를 건너 계곡에 들어서니 당당하게 그 위용을 과시하는 화수루를 만날 수 있었다.

▲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옥천마을에 있는 화수루 전경

이 건물의 본래 문중의 일을 논의하거나 문중의 자제들이 학업을 위해 머무는 곳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공간의 위치도 번잡한 곳을 피하고 자연환경이 잘 꾸며진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당연한 이치로 판단된다.

화수루는 조선숙종 19년(1693년) 오봉공의 후손 권응당 5형제가 창건했으며, 단종의 외숙부인 권자신이 세조에게 화를 당하고 그 아들 권책(오봉)이 유배되어 여생을 보낸 곳이다.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자 대봉서원이 지어졌는데,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본 화수루와 청간정만 남았다. 화수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의 누마루 집으로 양쪽 1칸씩은 방으로 꾸몄고 가운데 3칸만이 누마루로 되어있다.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소박한 꾸밈새로 고건축물의 중후함이 엿보인다.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영덕군 창수면 갈천동 속칭 옥천마을로 현재 주위는 민가와 경작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뒤쪽의 낮은 언덕에 오래된 무덤 1기가 있는데 이 누각에 딸린 것으로 보이며 지방유형문화재 제82호로 보호받고 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위풍당당함이 그대로 베어있는 화수루에 압도당해 곧장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가 있고 좌측으로 2층 누각으로 오르는 통짜의 나무계단이 심상치 않게 버티고 서있다.

화수루 2층 누각에 오르니 옥같이 맑은 물이 기암괴석에 부딪치며 비운에 간 어린 단종의 영혼을 달래듯 흐르고 있는 계곡의 모습또한 장관이다. 사통팔달로 연결지어진 문틈으로 또다른 세상을 향해 손짓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예전엔 누각위로 검은 박쥐들도 여럿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질 않는다. 정면의 마루바닥 좌우로 작은 방들이 까치구멍을 내고 오랜 세월을 이기고 자리한 모습을 지켜보니 감회가 깊다.

이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형적인 ‘ㅁ'자 건물로 보통의 다른 누각 건축물과는 달리 이층 전체를 널빤지로 막아 열손실을 최소화시킨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눈이 많이 오고 추위가 심한 북쪽지방에서 나타나는 건물의 특징이 고스란히 베어있다. 전체적인 건축물의 관리가 안돼 각종 문들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부딪치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옥천마을에 있는 까치구멍 집 전경

 

통나무계단을 내려와 손바닥만한 봉당에서 사랑채, 부엌과 마구간이 붙어있는 화수루 내부를 자세하게 살피고는 처음부터 눈길이 닿았던 까치구멍 집으로 향했다. 화수루 옆에 어찌도 그리 작은 집이 있을까 싶게 초가 한채가 당랑 서있는데, 이는 고지기의 살림집인 까치구멍 집이다. 이집은 화수루에서 행하는 재사를 보살피기 위한 고지기의 살림집으로 화수루와는 떼어낼 내야 떼어낼 수 없는 사이다.

이름부터가 까치구멍 집으로 볼품없이 막 지어진듯하지만 자연과 함께하는 건축으로 본다면 효용성이 뛰어난 생태적 건축물임에는 틀림없다. 이곳 까치구멍 집은 안방과 부엌 그리고 짐승을 키우는 외양간, 천연의 까치구멍 조명시설까지 한 공간 안에 존재하여 열손실을 최소한 했던 최첨단 에너지절약형 원 스톱 리빙 다이닝 키친시스템이다.

전통적인 생활문화를 모르는 현대 사람들은 그 더럽고 냄새나는 공간에서 살았던 민초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재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고 있는 아파트문명이 바로 이러한 공간개념을 도입한 사례이지 않은가. 한 공간 안에 안방과 부엌은 물론 화장실까지 붙어있으니 말이다.

까치구멍 집은 용마루 양쪽 끝에 구멍을 내어 외부의 빛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천연조명이자, 내부에 있는 부엌시설에서 발생하는 연기 등을 밖으로 빼내는 굴뚝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벽은 흙으로 기둥과 보는 나무로 지붕은 짚으로 엮어져 있어 시간이 지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원리에 따르는 생태주택이다.

이러한 건축물은 가난한 민초들이 겨울을 나기위한 삶의 지혜로 여겨지며, 함경도나 평안도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강원도 경상도 등 동쪽 추운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 사람이 살지 않아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음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건강하고 조화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여행학교일행은 그길로 곧장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산사로 가기위해 잘 닦여진 갈면과 절골마을 앞을 지나 구름이 머무는 운서산 밑 아담하게 자리한 장육사를 찾았다. 산길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산사에는 분주한 여인들의 김장하는 손길만이 있을 뿐 조용함 그 자체였다.

▲ 운서산 기슭에 자리한 장육사는 흥원문이 제일 먼저 만겨준다.

장육사는 무학대사의 스승이자 이 고장에서 태어난 나옹 선사가 고려말 공민왕(1351~1374) 때 1355년 창건한 고찰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선 세종 때 산불로 소실된 후 재건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폐찰 되었다가 이후 중건하여 광무4년(1900년) 중수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장육사인근 어디에도 나옹의 탄생지였다는 사실은 알 길이 없지만 나옹 선사의 전설이 깃든 반송쉼터는 장육사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고 전한다.

그이야기를 전하면 나옹이 출가할 때 지팡이를 바위위에 거꾸로 꽂으며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지팡이가 자라 반송으로 700여 년 동안자라 거목이 되었는데 1965년쯤 고사했다고 한다.

또한 장육사에는 임진왜란 전 중창불사에 참여한 목수의 슬픈 전설로도 유명하다. 어머니의 쾌유를 빌며 시주금을 내고 싶었지만 형편이 좋지 않았던 목수는 자신의 기술로 중창불사에 힘을 보태고자 했다. 그런데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고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여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다른 목수가 공사를 마무리하였으나 기술 부족으로 대웅전은 뱃머리 집이 되었다고 한다.

▲ 고색 찬란한 장육사 대웅전을 대하고 곧장 숲길로 향했다.

현재는 이 둘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자취들이 없어 아쉽지만 대웅전 앞 종탑을 감싸고 있는 종각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종각은 새로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우뚝세워져 있는데 전보다는 보기가 흉해 하루빨리 옛 종각의 운치와 멋스러움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장육사 경내에 들어서려면 흥원문의 독특함과 오밀조밀한 짜임새를 만나고 드나들어야 한다. 경내 앞에는 대웅전이 서있고 우측으로 산령각과 화운각, 삼신당, 종각이 줄지어 배치되어 있다. 좌측에는 요사채가 오가는 이들을 맞고 있으며, 이밖에도 대웅전 동편 계곡으로는 홍련암과 서편에는 기와를 굽던 와요지가 있었다고 한다.

대웅전안에는 보물 1933호인 조선 초기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속을 빼낸 다음 종이를 덧대어 만든 불상인 건칠보살좌상이 있어 유명하다. 대웅전을 나와 잠시 고려 공민왕때 왕사까지 지냈다는 나옹선사의 자취를 찾아 경내를 오르다 앞산의 위용에 반했다. 종각위로 우람하게 서있는 산, 그 산에 반 했던 것이다. 필자가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운서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장육사도 그 나름의 이유가 되겠으나 실상은 동쪽으로 칠보산과 등운산, 서쪽으로 독경산, 남쪽으로 형제봉 등 높고 장중한 산세들의 기세가 마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 운서산, 독경산, 칠보산, 형제봉 등 천헤의숲으로 둘러쌓인 요새가 장육사다.

겨울 산사의 진미 고요함과 고즈넉함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바로 그 비밀을 이곳에서 풀었다. 대웅전을 돌아 조금만 올라가면 장대한 대나무가 줄지어 숲으로 하늘을 덮은 광경은 장관이다. 적정한 공간 안에 장육사 건물들을 배치한 것을 보면 옛 조상들의 생태성에 감복하고 보이지 않는 영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장육사를 돌아나오려는데 따스한 차 한 잔이 그리워 요사채에 문을 두드리니 조계종 운서산 장육사 주지 효상(曉象)님이 급하게 사랑채로 안내한다. 준수한 용모에 밝은 미소를 머금은 그이와 좋은 기운을 나누며 차를 마셨다.

이곳 장육사는 오래된 좋은 터에서 느낄 수 있었던 원형기운을 대웅전과 또 다른 한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고 일행 중 박완서님이 밝히셨다. 이러한 기운은 이곳에서 멀지않은 국사당산에서도 느꼈던 원형기운이었다고 했다.

▲ 최근 수리를 마친 종각안의 종탑은 육중한 형제봉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는 “이러한 원형기운은 대게 오래된 유적에서 느낄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고려중기 이전의 터에서 느낄 수 있다.”라면서 "고인돌로부터 종묘나 첨성단, 석굴암, 황룡사지 넓게는 서안의 진시왕릉, 옛 궁전 터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원형기운보다 형기설(形氣說)를 중시하여 풍수지리를 바라보는 안목 또한 달라졌다고 했다. 현재 형기설 터에는 조선 왕릉이 있는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한나라의 과거기운과 현재기운이 다름을 논하고, 좋은 원형기운의 자리는 눈으로 바라볼 때 하늘에서 안개 같은 기운이 내린다는 경험담도 들려주면서 오래된 미래로의 역사여행에 깊이를 더했다. 장육사를 나서는 길에 오래된 기와를 하나 얻어 오랜 된 역사에서 미래를 찾아보기 위한 소망을 담았다. 전 세계적으로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평화가 옛 원형기운처럼 다시금 이 땅위에 내리기를 바라며 일행은 다음 목적지인 인천리 한밭골과 봉화 여우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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