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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우리의 공동체마을
거창 두레누리 마을 입주자 설명회를 다녀와서...
2014년 03월 19일 (수) 11:04:14 류기석 yoogiseo@yonsei.ac.kr

우리들은 서둘러 자연과 인간이 공존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제 지속가능한 사회를 고민해야 한다. 도시문화는 근본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므로 식량도 에너지도 지금과 같이 계속 공급될 수 없다.

   

이에 대안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 어제 18일 늦은 오후 7시30분 서울 청파감리교회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예수살기 1차 마을 실현지인 거창 두레누리 마을에 대한 입주자 모집 설명회를 위한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거창 두레누리 마을은 전문가와 함께 친환경적인 건축과 식량, 에너지를 자급하고 교육 자치를 실현하는 문화예술영성공동체로 발전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올해 13가구 입주를 목표로 기반공사 조성에 이어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다.

입주자 설명회의 모두 말언에 나선 양재성 목사(거창 두레누리마을 추진위원장)는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 심화다"라고 하면서 대안적 삶으로 "생태농업과 에너지 자립 그리고 영성, 나와 우리의 공동체 마을을 조성하자"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두레누리마을 추진사업을 함께 돕고 있는 사회적기업 민들레코하우징(주)의 이종혁 대표는 영동 백화마을 사례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서 "추억이 있는집, 아름다운 집, 에너지 효율이 좋고 따스한 집, 지역순환의 가치가 있는 집은 물론 환경, 교육, 문화, 일자리가 자급되는 집과 세상"을 이야기했다.

그 중 가장 귀에 솔깃했던 말은 친환경이니 공동체마을이니 협동조합이니 마을사업이니 좋지만 실제로는 많이 힘들다며 싸우고 갈라서기 보다는 우선 "마을 사람들의 다름의 문화다"면서 "풍물동아리, 체험활동, 운동(족구) 등으로 서로의 다름을 찾고 공동체간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이번 소중한 뜻과 열정이 담긴 거창 두레누리 마을 1차 사업이 잘 추진되기를 바라며, 아래는 거창 두레누리마을 추진위원장 양재성 목사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지속가능한 사회와 마을에 대한 글을 소개한다.

------------------------------------- 거창 두레누리마을 추진위원장 양재성 목사의 글 --------------------------------

두 세계의 갈등

오늘날 양극화는 지구온난화 문제 다음으로 심각한 시대적 과제이다. 세계는 지속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주위 어디서든지 두 세계를 본다. 제 1세계와 제 3세계이다. 한 세계는 더러운 거리,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비참한 세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세계다. 또 다른 하나는 권력과 부, 쏟아지는 돈, 부유한 세계, 냉혹함과 안일 속에서 문 닫고 사는 이들의 세계다. 기근과 가뭄으로 굶주리는 세계와 풍요와 사치의 세계, 장애인의 세계와 비장애인의 세계가 그렇다. 또한 이슬람교와 유대교 혹은 동양종교와 기독교의 세계도 넘을 수 없는 큰 벽으로 나뉜 두 세계다. 북과 남도 동과 서도 두 세계이다. 두 세계는 복잡한 양상으로 서로 대치하고 갈등하며 싸운다. 또한 그 간극은 더 멀어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우리를 갈라놓고 갈등과 파멸로 몰아가는 양극화를 극복하지 않고는 양쪽 모두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란 없다. 아니 행복은 고사하고 모두 멸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두 세계를 넘어서는 예수운동

예수는 항상 두 세계 사이에 서 계셨다. 그리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민중들의 편에 서셨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두 세계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자가 있었다. 부자는 날마다 연회를 열어 호의호식하며 즐겁게 살았다. 하지만 그의 대문 앞엔 구걸하는 거지 나사로가 있었다. 헐은 곳을 개가 핥아도 어떻게 해보지 못하는 가난과 고통 속에 사는 자다. 부자에게 구걸하였지만 부자는 그에게 무관심했고 오히려 나사로를 내 쳤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고 거지는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 이야기는 엄연한 현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세계 어디든지 두 세계가 존재한다. 두 세계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어느 쪽도 행복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두 세계를 극복하는 길에서 인류의 희망은 보인다. 예수는 두 세계 사이에서 두 세계를 구원하신 분이다. 두 세계의 갈등을 넘어서는 길을 예수의 길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

김지하는 “밥이 하늘이다.”라고 말함으로 밥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으며 독점해서도 안 됨을 명확히 했다. 선조들이 농사를 천하에 근본으로 여긴 것도 밥의 소중함을 일깨운 진리이다. 예수께서는 아예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러므로 모든 밥상을 거룩하게 하셨다. 밥 가지고 장난치거나 밥의 불평등한 배분은 죄악이다. 예수가 평생을 붙들고 사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의 실현은 하나님 나라 건설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보아야 한다. 출애굽은 해방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원형임을 보여주고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원시 교회 공동체 운동을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해 증언한 책이다. 하나님 나라는 억압적이고 수탈적인 사회체제나 정치권력에 대한 대립개념이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세우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생명과 평화의 나라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생명회복운동이며 평화구현운동이었다. 예수의 관심은 생명의 사각지대에 있는 굶주린 민중이었으며 당신 스스로도 민중의 한 사람으로 살았고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그들과 밥을 나누어 먹었다. 일명 밥상공동체다.

밥상 공동체

히브리 민중의 희망은 땅이었고 예수 당시 민중의 희망은 밥상이었다. 예수는 민중들과 밥상을 나누었다. 오병이어(빈들에서 굶주린 민중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이야기)는 나눔의 신비를 통하여 모두가 배부를 수 있다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예수의 밥상운동은 부자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 예수는 당신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라고 말함으로 모든 밥상을 거룩하게 하였다. 실제 밥상은 생명이 지어낸 거룩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밥상의 의미는 더욱 심화되었다. 성찬식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 성찬식은 밥상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밥이 되었다. 밥은 먹혀 먹는 자의 살이 되고 피가 된다. 부활하신 예수와 걸으면서도 예수인 줄 몰라보았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눈이 열려 예수이신 것을 알아보았다.
밥상공동체운동은 인간의 이기적 자기중심성에서 해방하여 참된 화해공동체를 이루는 운동이며 민중의 사회적, 역사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며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체제를 근원적으로 혁신하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 운동이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여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2/42-47절)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사도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공동체 운동이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이 말씀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현하신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가르치고 공유하는 교육공동체요, 한 가족으로 깊은 사귐이 있는 교제공동체이며 하나님을 향한 뜨겁게 기도하는 신앙공동체였다. 또한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재산을 헌납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경제공동체요, 가정에서 모여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이어가는 생활공동체이며 그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선교공동체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무너졌다. 하지만 오늘날 이 전형은 창조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수도 공동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교권은 강화된다. 교권의 확대는 교회의 부패를 불러왔고 교권의 남용으로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수도원운동은 교권의 타락을 보고 복음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하였다. 예수 믿기에서 예수 살기를 열망하는 자들이 예수가 걸어가신 청빈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사막의 영성 공동체는 기도와 명상을 통해 하나님께 이를 길을 제시했고 생태적 삶으로 생의 자유를 주었다. 검소하고 단순한 삶으로 일괄한 은수자들은 하나님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소통하며 사는지를 알았다. 베네딕트 수도 공동체는 생명을 대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성스러운 일이며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라고 명명했다. 특히 영국의 켈트 지방의 수도공동체는 지나치리만큼 생태적이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결국 생명의 외경을 얻고 모든 만물이 생명의 신비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프란치스코 수도 공동체는 우주를 한 가족으로 보았다. 해와 달, 하늘과 땅은 형제요 자매이다. 동물과 식물들도 형제와 자매로 보았다. 결국 이웃을 해치는 것은 자기 형제를 해치는 것이니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생태영성 공동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몸이다. 말씀은 원리이며 질서요, 몸은 유기적 존재이다. 우주는 창조질서에 의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생태적 공동체이다. 이 사상으로 보면 화엄사상과 기독교 생태사상이 다르지 않다. 피조세계는 서로 의지처가 되며 존재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우주가 한 가족, 한생명이다. 처음부터 우주는 하나의 공동체였다. 그러기에 공동체성이 존재할 때만 생존이 가능하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죽는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의 말이 내 안에 거하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루어진다. 구하는 것마다 다 응답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피조물은 둘이 아니며 하나다. 또한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이다. 그러기에 피조세계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이다. 지구 생태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로 인한 환경재앙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제 환경문제는 지구 생태계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결국 환경보전운동은 생태계를 살릴 뿐만 아니라 생태공동체를 회복하는 신앙행위이다.

지속가능한 사회 만들기

수만 년, 수천 년을 이어온 지속가능한 자연부락이 무너지고 있다. 일제에 의하여 한바탕 부서진 마을이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이농현상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농촌은 인구의 급감은 물론 소득의 감소로 인해 점점 살기 어렵다. 농촌의 해체는 지속가능했던 마을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마을 공동체 구성은 희망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전반은 어떤가?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대로 가면 언젠가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낙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미래에 드리워진 어두움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태적 위기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의 최대 과제다. 의식주의 자급, 지속가능 에너지의 자급이 없이는 지속가능한 마을을 만들 수 없다. 지속가능한 에너지의 개발과 생명의 먹을거리, 친자연적인 주거시설, 천연소재를 쓴 의류 등 지속가능한 삶은 나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생각의 싹을 잘 틔워 살아갈 때 희망의 세계가 열린다. 의식의 전환을 통해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고 사회변혁을 이루는 길에서 희망이 보인다.

사랑이 되기

공동체는 대안이 아니라 근본이다. 인류는 물론 우주는 처음부터 공동체였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며 생존한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저것을 의지하여 이것이 살고 이것을 의지하여 저것이 산다. 처음부터 있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소중하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보전하는 것이 생명평화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과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행하는 것이란 진리는 일맥상통한다.

경험나누기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을 의지처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결국 대자연이 건강해야 내가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역사회가 건강해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건강하게 한다. 나의 지역운동은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마을을 만들고 그 곳에서 살고 싶은 삶을 살자는 것이다.

가재울마을사람들이다

도심 속 마을을 구성하자는 것이다. 가재울마을학교가 운영되고 있고 북카페가 운영된다. 마을 음악회 장터, 기행, 낭독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두레누리마을 조성이다.

1. 생태영성을 기반으로 한 지역순환 마을
- 개발을 최소화하고 자신이 살집은 직접 전문가와 함께 생태적으로 건축
2. 생태순환농업을 기반으로 자급자족하는 마을
- 작은 단위의 지속가능한 마을과 도시생활자들의 연대로 교육과 문화, 삶의 방식의 공유
- 먹거리와 에너지를 자급하고 장기적으로는 의식주전체를 자급자족
3. 두레정신을 지향하는 공동체 마을
- 기도교적인 가치인 하나님 사랑, 자연사랑, 인간사랑을 중심으로 영성과 교육,
농사와 문화가 녹아든 마을
- 마을의 산업과 문화는 협동과 조화를 지향
4. 신뢰를 기반으로 교육하는 마을
- 마을 전체구성원을 배려하되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마을
- 지속적 교육을 실시할 마을학교를 운영하고 추후 전문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
5.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마을
- 같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단체를 찾아 연대하여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을 교류함.
- 종교, 지역, 이념을 넘어선 연대

나가기

마을 만들기는 새로운 관심이 되었다. 도심 속에서도 의미 있는 마을 만들기 운동들이 펼쳐지고 있다. 마을이 살아야 광역이 살고 개인이 산다. 그간에 잘 못 살아온 인류가 걸가야 할 본래적 길이다. 영적인 귀향을 하지 않으면 인류는 생존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 길이 생명평화의 길에서 만난다. 예수는 철저히 그 생명평화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사랑의 삶을 추구하셨다.

마을이 조성되면 그 이웃자연마을과 연대하여 해당 면을 새롭게 하고 도 주변 면들이 모여 군을 지역순환사회로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면 국가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마을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란 간디 선생의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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