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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흔들어 바로보기 !
  • 이병화
  • 승인 2014.01.1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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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인식, 무엇이 문제인가 ?

한국사의 시원

   
한국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방대한 량의 사료가 없어진 것을 비롯, 민족의 주체성을 갖춘 역사학자가 없다는 사정을 감안할 때 한국사의 올바른 인식이 정립되기에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사의 복원을 위해 노력하는 민간차원의 움직임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의 인식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관련 사료를 어떻게 보는 가이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한국사의 시작을 고조선으로 보느냐, 아니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느냐, 아니면, 고조선 조차도 부정하면서 고조선 이후에서 찾으려 하느냐의 시각이다. 고조선보다 앞선 시기에서 우리역사가 비롯되었다는 인식은 우리민족의 고사서인 '부도지'와 '환단고기'를 객관성 있는 사료로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사서를 인정하지 않을 뿐아니라 '삼국사기'마저도 인정하기 어렵다는 사람들은 민족사의 기원을 신라,고구려,백제에서 찾는다. 지구에 인류가 출현하면서 생활을 영위했지만 인류의 역사는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면서 그 사정을 전할 수 있었기에 그 시기는 만년 전후가 될 것이다. 우리민족의 경우에는 9,200 여년 전에 무리를 이루어 살면서 국가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던 것으로 전한다. 따라서 기원 전 7,199년에 이루어진 '환'이라는 나라에서 역사의 시원을 확인하는 것이 옳다.

1) 마고, 나반과 아만

우리민족은 민족의 시조, 즉 조상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지니고 있얶는가 ? 신라사람들은 민족의 시조를 '마고'라고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마고는 지구상에 살고있는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와 발해사람들은 우리민족의 조상을 '나반과 아만'이라고 전했다. 나반은 최초의 남성이고 아만은 최초의 여성이다. 나반과 아만도 인류 최초의 남성과 여성이다. 마고가 낳은 '궁희'와 '소희'가 인류 최초의 남성과 여성을 낳았다고 한다면 궁희와 소희가 아반과 아만을 낳은 것이 된다. 마고가 살던 곳이 마고성이고 나반과 아만이 만난 곳이 아이사타라고 전한다. 인류가 출현한 지역이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또는 나미비아라는 주장이 있고, 아시아의 파밀고원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민족은 민족의 조상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조상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면서 대대로 전해왔던 것이다.

2) 환국과 배달국

환국은 기원 전 7,199년부터 기원 전 3,898년까지 3,301년 이어진 것으로 전한다. 이 시기는 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데 유적이나 유물로 판단하더라도 이 시기에 부족국가가 성립되엇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 다만 그 위치가 어디였느냐 하는 것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환단고기의 기록으로는 환국은 그 중심이 적석산에 있었다고 한다. 적석산은 지금의 중국 청해성 대통현 부근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환국을 이은 나라가 배달국인데 기원 전 3,898년부터 2,333년까지 1,595년간 지속되었던 나라였다. 배달국의 도읍지는 태백산에 있었다고 한다. 태백산은 청해성의 순화현으로 비정할 수 있다. 고조선이 실재했던 나라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여러 사서를 통해 전해지고 있을 뿐아니라 유적이나 유물로도 그 실체를 유추할 수 있다. 특히 갑골문을 해독해 보면 고조선의 건국년대가 기원 전 2,333년임을 확인할 수있다. 고조선이 실재했다면 그 강역은 어디였을까 ? 고조선의 중심강역은 대륙이다. 오늘날의 감숙성을 중심으로 사천성, 녕하자치구, 섬서성 등지에 걸친 광대한 지역이었다. 도읍지는 감숙성과 녕하자치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의 강역이 만주와 한반도였다는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우리역사가 조작되고 왜곡되었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주장이 먹혀들고 있을 뿐이다. 더 기막힌 억지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한반도의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지였고 한나라가 설치했던 낙랑군이라는 것이다. 고조선은 세개의 나라가 연합한 연방국이었고. 각각의 세나라는 또다른 세개의 작은 나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고조선은 아홉개의 작은 나라들의 연합체였다. 고조선시기에 병존했던 화하족의 국가는 당,우,하,은,주 등으로 이어졌는데, 그 국가의 국력은 고조선의 서쪽국가였던 번한(번조선)의 수준과 규모를 능가하지 못했던 나라였다. 그들은 항상 번조선과 다투었던 것이다. 고조선은 기원 전 2,333년부터 기원 전 232년까지 2,101년 지속된 나라였다. 고조선을 이어 북쪽에서 북부여가, 남쪽에서 마한(삼한)이 건국되어 이어졌고 북부여에서 고구려가 건국했고 마한에서 신라,백제, 가락 등의 국가가 전승되었던 것이다.

3) 고조선의 정체성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이 실존인물인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단군과 고조선의 찬연한 역사는 고려가 건국할 당시는 물론 조선이 건국할 때까지만해도 단군과 고조선의 실체는 민족의 뇌리에 명확히 새겨져 있었다. 그러하던 상황에서 오늘날 단군과 고조선의 실체를 의심하기에 이르른 원인은 첫째, 주변국의 침략에 의한 영토의 축소 둘째, 전통사상 박해로 인한 국혼의 상실 세째, 사대주의로 인한 자주권의 훼손이다. 고려 중기부터 시작된 유교중심의 통치이념 확립을 위한 선도사상에 대한 박해로 민족 고유의 위대한 사상과 정신이 훼손되었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민족사의 올바른 승계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고려 말과 근세조선 초에 영토를 명나라 에 잠식당하면서 반도로 이전한 후 명과 청에 철저히 사대함으로써 그들보다 앞섰고 찬란했던 고조선의 역사를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하면서 말살하거나 왜곡했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역사는 근세조선 초에 치명적으로 손상되었다. 세종 대에 기획된 반도사관은 세조를 거쳐 성종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그 후 수백년의 양생기간을 거치면서 단단하게 굳어버렸던 것이다. 세조 때부터 성종때까지 선도사상 관련 책자와 고조선과 그 이전의 역사책을 거두어들여 없앴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고구려,신라,백제의 세나라만 일컬어 삼국이라고 하지만 그 세나라가 영위되었던 시기에 가락이라는 비중있는 나라도 공존했었다. 따라서 삼국시대라는 용어는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또 신라가 백제의 대부분의 강역을 흡수하고 일부 고구려의 강역도 차지했지만 고구려의 거의 모든 강역은 발해의 영토였기 때문에 이른바 통일신라라는 용어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우리역사는 억지가 통용되는 부자연스러운 개념으로 서술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신라,백제의 건국시기는 기원 전 1세기인데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고 있다. 고려정부가 편찬한 정사서도 믿지 못한다고 한다. 이토록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다. 어째서일까 ? 그들은 우리민족의 고유전통사상인 선도사상에 관심이 없다. 고려와 근세조선이 대륙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설에 대해 눈길조차도 보낸 적이 없고 명,청의 조선사 인식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며 민족의 자주성과 국권 회복에 목숨바친 애국지사들의 외침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 역사연구가 이병화 선생님의 강연모습

한국사의 잘못된 시각

고조선의 서쪽 경계는 번한(번조선)과 당,우,하,은,주,연,진,한과의 경계를 말한다.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곳이 고조선의 번한(번조선)의 강역이었고 그 서쪽에 위치했던 화하족 국가들과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1) 한사군의 위치

기원전 331년 번조선의 중심강역에 연나라가 침입해 점령하고 다섯개 군을 설치했었고, 기원 44년 - 49년 후한이 고구려의 강역이었던 요동지역에 낙랑군과 현도군을 설치했었다. 이곳이 어디였을까가 관심을 끄는 것은 화하족의 국가가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영토를 점령했었다는 사실이며, 또 이곳이 한반도였던가의 문제인 것이다. 한사군이 동시에 설치된 적이 없고 낙랑,현도,진번,임둔 등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반도였던 것으로 조작되었다. 근세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 했던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민족이 고대에 화하족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주장하면서 한사군의 한반도 위치설을 조작해 유포했던 것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했던 나라다. 한반도에 한사군이 있었다는 날조된 주장은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역사서나 사료로서 충분히 그 허구성을 입증할 수 있다. 한나라가 설치했던 낙랑군은 고구려의 도읍지가 아니라 고조선의 두번째 도읍지였던 금미달이며 이곳은 요나라의 동경이었고 금나라와ㅜ원나라의 요양이었다. 고구려의 도읍지 장안성은 당나라의 안동도호부. 신라의 평양, 고려의 서경(평양), 원나라의 동녕부와 같은 곳이지만 후한의 낙랑군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우리는 섬서성 서안시가 당나라의 장안성이었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섬서성 서안시가 바로 고구려의 장안성이다. 근세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청나라와 일본의 역사 왜곡과 날조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2) 임나일본부 문제

일본이 의도적으로 우리역사를 조작한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임나일본부 한반도 남부 존재설이다. 기원 3세기 중반에서 5세기 중반까지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그 일대를 통치했었다는 허위사실을 조작하고 유포했다. 경상남도 고성군에 임나일본부가 위치했었다는 가설은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사료나 관련 유적이나 유물이 전혀 없다. 일본사에서 일본이라는 국호가 나타나는 시기는 7세기 후반이다. 그런데 임나라는 국호는 4세기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임나일본부의 일본은 국호가 아니라 지명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임나일본부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임나라는 지역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임나라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지역에 설치한 행정치소인 것이다.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유린한 후 임나일본부의 한반도 실재론을 증명하기 위해 경상남도 지역을 샅샅이 조사하면서 수많은 곳을 파헤쳤지만 무위로 그쳤다. 임나일본부는 광서자치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왜는 호남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나라였고 임나는 북베트남에 그 도읍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옳다. 임나일본부는 임나가 광서자치구로 진출하면서 일본이라는 지역에 행정치소를 두었던 것이다. 그지역은 가락국과 가라, 임나와 왜, 백제와 신라 등이 각축하던 곳이었다., 왜도 대륙에 있던 나라다. 대륙에 있던 왜는 신라에 의해 대륙에서 쫓겨나 필리핀을 거쳐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이다.

대륙사관과 반도사관

오늘날 우리는 우리역사가 한반도와 만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러한 인식이 잘못된 인식이라는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을 반도사관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반도사관은 근세조선이 만들어 낸 허위의 이데올로기이다. 대륙에서 고려를 이어 건국한 근세조선은 대륙에 있던 광대한 영토를 지켜내지 못하고 한반도로 이전했다. 고려의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정황은 고려사지리지, 요사,금사,송사 지리지 등을 종합해서 검토해보면 그 실상이 드러난다. 또 근세조선의 중심강역이 세종 때 변화했다는 사실도 조선왕조실록에서 알 수 있다. 세종의 즉위 시기에는 그 이전과 비교할 때 특이한 사실들이 발견된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사안이 훈민정음의 반포다. 그 시기에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게 했다는 것은 그 당시 언어와 문자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을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아울러 농사방법의 변화를 암시하는 새로운 농사서가 발간되었는가 하면 질병치료에 관한 책자도 발간되었는데 이 책은 한반도에서 채취할 수 있는 토종약초의 활용응 권장하고 있어 새로운 질병이 만연해 새로운 치료법이 절실했음을 알리고 있다. 이 밖에도 한양도성의 축조시기와 그 규모, 궁궐의 조성시기와 그 위치의 기록에서 사회 전반에 걸쳐 그 이전의 상황과 확연히 구분되는 시기였음을 간파할 수 있다.

1) 자연현상과 문화유적

우리역사가 한반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의 단초는 고대의 천체관측지에서 비롯된다. 고구려,신라 백제의 천체관측지가 대륙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또 빈발했던 대규모의 지진이나 강이 말라버리는 가뭄이 자주 있었고 메뚜기떼에 의한 농사피해가 수없이 발생했다는 기록은 반도사관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역사의 강역을 추정하는데 있어 객관적인 자료로 생활유적이 중요하다. 고대는 물론 중세의 군왕들은 예외없이 대규모 궁전을 짓고 호화생활을 누렸다는 사실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에 남아있는 근세조선의 궁전이나 북경의 자금성, 일본 동경의 궁전 등은 그곳이 각나라의 도읍지였음을 웅변하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고려와 근세조선 초기의 궁전을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흔적조차 없다는 기막히는 현실을 감안해 보면 반도사관이 얼마나 궁색한 이론인가를 느끼게 된다. 북경시의 사정도 한반도와 다르지 않다.원나라의 도읍지였다는 그곳에 해당 역사유적이 없다. 대륙의 동부는 물론이고 중부에서도 화하족의 중심국가였던 하, 은,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적을 발견할 수 없어 급기야 '하,상,주단대공정'이라는 잃어버린 역사찾기 소동이 벌어졌다. 한반도 평양시에는 고구려,신라,고려시대의 궁전으로 추정할 수 있는 건물이 단 한곳도 없다. 삼국사기에는 시라의 도읍지에 궁전이 35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경주시에는 단 한곳도 확인할 수 없다. 공주시나 부여시,그리고 김해시가 백제와 가락의 도읍지라고 확신하고 있는 이땅의 역사학자들은 단 한번의 의구심이라도 가져본 후 내린 결론인지 궁금하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정황은 울릉도에 고대국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못하는 추리력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우리역사를 제대로 연구하면서 바르게 가르칠 수 있을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2) 대륙의 활동기록

화하족 국가의 기록에 백제가 그들의 강역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벡제는 송,제,양,진,수,당과 국경을 접하고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화하족의 강역을 차지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사가 한반도의 역사라고 아무리 위장하려 해도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훨씬 더 어렵다. 반도사관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백제가 한때 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했었다는 주장으로 억지해석을 강요하고 있지만 발해가 백제의 옛강역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반도사관은 문제의 해결능력이 없다. 신라사에서도 반도사관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신라의 강역 중 당나라가 할애했다는 패주,또는 패강주는 어디이며 신라 말에 독자적으로 외교활동을 했다는 강주는 어디인가 ? 고려의 도읍지 개경 주변의 강인 예성강이 북류한다는 기록이나 대동강이 동류한다는 기록, 고려의 활발했던 무역 거점이었다던 예성항이나 흑산도가 아무런 흔적도 없는 개성 입구나 전라남도의 흑산도였다고 할 수 있을까 ? 한반도에서 고려 천리장성의 흔적은 커녕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할 때 낙타부대를 동원했다고 하는데 함경도 일대에 과연 낙타부대를 동원했을까 ?

3) 한반도의 역사유적과 유물

반도사관을 신봉하고 있는 역사학자들은 한반도와 만주에 있는 역사유적과 유물이 반도사관을 입증하는데 충분하다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유적이나 유물은 그대로 믿기에는 상당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만일 반도사관이 조작된 것이라면 조작한 사람들이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반도사관을 의심하지 않을 만한 거짓 증거들을 만들어내는데 게으르지 않았을 것이다. 광개토호태왕비, 진흥왕순수비, 무녕왕릉은 잘 짜여진 계획에 의해 집행되었겠지만 나름대로의 허점을 보이고 있다. 광개토호태왕비는 동황성에 있다는 기록과 일치하지 않으며, 진흥왕순수비는 대도시의 가장 번화한 곳에 있어야 그 자리가 어울리는 것이며 , 무녕왕릉은 그 규모와 위치가 격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묘지명을 보면 그것이 진품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 역사연구가 이병화

한국사 연구사료

우리민족의 고사서를 없앤 세력은 일본만이 아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의 군대가 사고와 전적을 불태웠고 발해 멸망 시 요의 군대가 발해의 사서를 불태웠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은말하게 숨겨서 후대에 전해지던 사서들이 고려 때는 물론이고 근세조선 초기에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근세조선 초 세조,예종,성종 시기에 이르러 우리민족 상고사와 관련된 역사서와 선도사상서를 거의 다 수거해 없애버렸다. 왜 이 시기에 고사서와 전통사상서를 없애는 작업을 했을까 ?

1) 조작된 역사

대륙의 강역을 상실한 근세조선과 근세조선의 강역을 차지한 명은 그 강역이 원래 명의 강역이었던 것으로 위장하고 우리민족의 역사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속이기 위해 반도사관이라는 허구의 역사인식을 조작했다. 찬란했던 대륙의 민족사를 초라한 반도사로 둔갑시키면서 고조선 이전의 역사는 민족의 뇌리에서 지워버리고 고조선의 건국 사실도 신화로 꾸미면서 모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강토의 회복은 아예 잊어버린 채 현상유지에 급급하면서 명에 철저히 사대했다. 우리역사는 축소, 비하하면서 화하의 역사는 확대, 과장하면서 중화로 존숭했다. 근세조선은 중화에 부속된 소중화로 자처하고 축소된 강역이라도 감지덕지하면서 보잘것 없는 기득권 수호에 안주했던 것이다. 아무리 역사를 말살하려 하더라도 애국지사들은 고사서와 선도사상서를 비밀리에 소장해 왔고 연구와 전승에 힘썼다. 그렇게 어렵사리 소장되었던 사서들마져도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거의 다 멸실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부도지','환단고기','규원사화' 등 소중한 사서를 접할 수 있음은 천행이다. 이 고사서의 도움으로 우리역사는 조선왕조실록, 고려사,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사서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우리역사의 복원작업은 민간 중심으로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고려사에는 고려의 도읍지 개경에 수십곳의 궁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개성시에는 궁전터라는 곳 두곳이 있을 뿐이다. 피난 도읍지 강도와 송도에 정궁이 여섯곳 있었다는데 강화읍에는 궁터라는 곳이 한곳 있다. 고려는 남경을 건설하면서 새로운 궁전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고려의 남경이었다는 서울에 고려의 남경이었음을 추측이라도 할 수 있는 역사적 흔적이 있는가 ?  반도사관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에서 그 허구를 드러낸다. 반도사관이라는 상식을 뛰어넘으면서도 허구성을 위장할 수 있었던 허구의 이데올로기가 수백년의 양생기간을 거쳐 콘크리트와 같이 굳어버렸다. 그렇게 단단하게 굳어버릴 수 있었던 기저에는 비굴한 사대사관과 자기비하의 열등감이 깔려있었다. 반도사관이 조작되 않았다면 식민사관이 기댈 언덕이 없다. 반도사관이 우리민족의 번영을 저해하는 사상적 질곡으로 작용함으로써 우리사회에 끼친 해악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 조선과 명이 꾸며낸 반도사관은 청과 일본이 조작한 식민사관의 숙주가 되었다. 청과 일본은 반도사관의 취약성을 바탕으로 머리를 짜낸 식민사관으로 우리민족을 침탈하는 만행을 합리화하는 빌미로 악용했던 것이다. 식민사관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흉악한 무기였던 것아다. 식민사관의 극복은 반도사관의 허구성을 확인하는 작업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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