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는 온통 지식인들의 말과 글로 꾸미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연 그대로 모습과 다양성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거리마다 기업CF광고 멘트가 가득하고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일회성 인스텐트문화 일색이다. 식물도 예외는 아니어서 원예학과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식물과 수목은 우리것이 없다. 더구나 얼마전까지 전국토의 길가에 심겨져온 조경수가 외래종 일색이었으니 변해도 너무많이 변하여 국제적으로 혁신이 가장 잘 된 곳이 이나라 조선이 아닌가 생각한다.
허브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식물이 라벤더·박하·로즈마리 따위의 외국산들로 주종을 이루고 있다. 허브란 예로부터 약이나 향료로 써 온 식물로 알려졌다. 나는 이러한 허브를 지인들과 우리 글(한자:뜻 글, 한글:소리 글)로 "발향초"라 부른다. 이는 배초향·산마늘·어성초·백리향·인진쑥·생강나무, 젠피 등을 비롯하여 우리들이 흔히먹는 파·마늘·고추가 모두 허브다. 그래서 이런 외래종 일색의 식물들 보다는 우리 땅 곳곳에서 나고자란 토종들로 농장을 이루는 꿈을 꾸어 본다.

지난 2006년 7월 6일과 7일 이틀간 횡성에 있는 글로리아 허브농장을 찾았다. 천천히 도시생활을 접고 허브농부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이건용(62) 박영숙(54) 부부는 건강을 위해 잘 나가던 회사를 정리하고 산골오지로 산 증인이다. 도시에서 회사를 경영할 당시 각종 향은 제공은 물론 부당경쟁과 탈세, 거짓말 등을 일삼았기 이를 참회하면서 그와는 반대되는 직업을 찾던중 농부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우리들이 부러워하는 소로우의 웰든이나 헨렌과 스콧트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센터 등을 구지 들추어 내지 않아도 지금 당장 넉넉한 여유로 농촌을 유심히 살펴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농부들과 마주대하게 될 것이다. 자연과 공생공존 할 수 있는 농업을 직업으로 삼아 낮에는 농작물을 가꾸며 유통을 걱정하고 밤에는 농민운동과 참 교육을 고민하는 젊은 귀농인들로부터 나이 많은 귀농자에 이르기까지 하루를 살아도 오만가지의 느낌을 갖고자 한다. 이들중에서 특별히 이 부부는 전원생활을 즐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뿌리치고 횡성의 깊고깊은 산골로 들어와 허브농사를 일구고 있다.
청명한 날씨 탓인지 푸르른 하늘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또렷하다. 서울에서 내부순환도로와 북부간선도로를 따라 이어진 호젓한 양수리를 지나 전형적인 농촌들녁을 따라 굽이굽이 난 국도 길로 횡성읍에 접어들었다. 횡성군 갑천면은 횡성에서 40분가량 북쪽으로 가야 닿을 수 있으며 횡성천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아름다운 길은 아름답다.
으뜸천이 흐른다는 횡성 갑천의 깊고깊은 골짜기로 찾아간 곳은 횡성군 갑천면 상대리 직장에서 함께 일을 짓고 있는 일행들과 함께 워크샵을 갖기 위해 찾은 글로리아 허브농장은 갑천면에서도 1시간 가량을 더 산속으로 들어가서야 만날 수 있다.

산골경치를 감상하면서 아홉사리를 지나고 구비진 고개를 넘다보면 어느새 상대리와 만주하게 된다. 마음을 진정시켜 찾아 들어간 곳에 보건소와 작은 분교, 교회당 건물이 마중한다. 우측으로 난 실개천을 따라 곧장 들어가면 서양식의 허브리조트 건물을 만난다.
깨끗한 계곡물이 두갈래로 흘러나와 시원스럽고 뽕나무의 오디가 지천으로 널려있어 입이 심심하지가 않다. 1만평이 넘게 펼쳐진 각종 허브들을 만나려는 순간, 글로리아 허브농장을 가꾸시는 이건용님이 반긴다. 우리들은 곧바로 1층에 마련된 허브샵으로 안내되어 진한 허브차 한잔을 마시고는 즉석 허브특강을 청해 들었다.
이건용님은 현재 한국에 있는 허브농장은 모두 허브카페나 샵에 불과하다고 간파하시고는 뚝딱뚝딱 1~2년에 만들어지는 몇몇동의 비닐하우스가 모두 허브농장이나 허브랜드는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셨다.

첫해 450만원을 들여 라벤더를 심고 가꾸었는데 그해 장마철 습기를 이기지 못하고 모두 죽였던 일을 상기 시키면서 장마에 견딜 수 있는 라벤더를 연구개발 하였으면 했다. 대학의 육종학과에서도 실험실습을 글로리아 허브농장에서 한다고 하셨다. 인근에 7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온 금광채굴 광산이 있는데 천연동굴로 박쥐들이 살고 있어 보호한다는 이야기도 덧 붙이셨다.
학생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하셔서 학생운동을, 청년 때는 정당활동을, 귀농하기 전까지는 중소기업 3곳과 공장 3곳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사업가 이셨다. 하지만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하남시 검단산 밑에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챙기기 위하여 산속생활을 하던중 회사도 흠잡을 때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맞겼는데 1년후 회사의 재산은 해외로 빼돌려져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법인과 개인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던중 갖은 산고끝에 1개의 회사를 되찾을 무렵, 회사가 도시계획지구로 편입되면서 땅값이 수배올라 아예 시골행을 결심하고 회사와 공장을 모두 정리하여 횡성군 갑천면의 땅 5만평을 구입하였다. 그후 아내와 함께 가시나무를 헤치고 황무지의 땅을 보러 왔다가 아내에게 멋진 집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한 이야기가 씨가 되었다 한다.
농촌으로 내려올 결심을 하고서 서울의 농업기술센터에서 농민교육과 귀농운동본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귀농학교도 찾아 공부하면서 귀농을 위한 아이템을 찾았다. 늘 생각해 왔던 것이 특화된 농업과 차별화된 농업이었다. 그러다가 타조사업에 관심을 두고 어렵게 수입에 대한 관련법규를 만들어가면서 준비해오다가 2년이라는 기간을 견딜 수 없어 새로운 사업을 택한 것이 허브였다.

1차 농사체험과 2차 가공사업, 3차 수요자 중심의 관광 등이 이루어지는 허브사업을 4년 동안 구상하다가 3년간의 공사 끝에 2005년 6월 27일 글로리아 허브리조트로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초기 지자체의 무관심과 주민들의 냉담함에 많은 고초를 겪으셨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나라 농촌이 도시인들을 바라다보는 시선은 곱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년 동안 사는지역의 군, 관, 민이 서울에서 내려온 기업가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특히 농장까지의 9키로 미터가 비포장 구간으로 포장하는데만 10년이 걸렸다. 그러면서 역점을 두고 실행했던 것이 인사였다고 한다.
첫해 1년은 상대리와 중대리, 하대리 주민들에게 일일이 달리던 차에서 내려 90각도로 인사를 했고, 그 다음해 6개월 상반기에는 내리지 않고 시동만 끄고 인사를 했고, 그다음은 시동을 안 끄고 인사를 하고, 그 다음은 차를 달리면서도 인사를 했고, 이제는 주민들이 먼저 인사하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첫해 농사로 감자 농사를 위해 1만5천평 짓는데 씨감자만 150박스 심었다가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망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그후 육모장을 만들어 허브 수백 가지를 준비하고 식재장을 조성하는데 설계비만 8천만원이 드는 것은 물론 대학의 해당학과 교수의 도움이 말로만 이루어진 것에 마음아파 하셨다. 결국에는 돈을 주거나 배워 조성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본인이 독학으로 이뤄냈다.
글로리아 허브농장은 동서양에 널리 분포된 허브식물들을 샘플가든, 테마가든, 이벤트 가든에 모아서 조경과 차경을 고려하여 조화롭게 배치했다. 가능한 한 관람과 체험학습에 필요한 학술적 정보를 담으려고 허브식물마다 명패를 담아서 배치ㆍ공개하여 허브를 사랑하는 분들께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돌아오면서 자연을 닮아 가려는 우리에게 아낌없는 충고로 이건용님은 “농촌생활의 환상을 버리고 저마다 자생력이 있는 특화된 상품을 찾아 검증을 받고 시작해야 하세요.”라고 당부하셨고, 아내인 박영숙님은 “농촌에서 농사일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마음은 너무 편해요.”라고 잘라 말했다.
조금은 불편하고 힘이 들겠지만 하늘, 땅, 물, 바람, 사람, 동물, 식물들이 자연과 오롯이 하나되는 생태적인 허브농장이 되기를 바라며 나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사는 보람과 뜻, 희망을 주는 감동의 글로리아 허브농장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