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오로지 내일을 위해 오늘을 꾸미고 축적하여 애써 이 순간순간을 외면해야만 행복해 지는 도시인들에게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자동차와 전화가 없는 그래서 자연의 풍요로 가득한 삶이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산골오지에서 날마다 찬란한 낮과 깜깜한 밤을 맞으며 사계절의 변화에 기뻐하고 나와 다른 이웃들과 함께 감격하는 그래서 날마다 감동하는 농부가 있다면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하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함께했던 농부철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다사함 김명식 선생님을 대안으로 찾아 '도시의 빈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북녘 땅이 코앞에 있는 산골에서 자연순환적인 농업은 물론 우리 말과 글의 얼과 뜻을 가르치고 기르는 현장'이 있어 찾았다.
농부의 삶으로...
지난 6월 25일 일요일 오후 강원도 화천 외딴 산골 시시각각 느껴지는 자연의 변화에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을 모아 희망을 노래하는 하늘평화학교 선이골을 찾았다.
지난 6월 25일 일요일 오후 강원도 화천 외딴 산골 시시각각 느껴지는 자연의 변화에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을 모아 희망을 노래하는 하늘평화학교 선이골을 찾았다.
▲ 선이골의 즐거운 보물이 숨겨져 있는 신비한 밭 ⓒ 류기석
양평의 허름한 시골 농가를 개조해 창의적으로 만든 야생꽃차 연구소를 엿보고는 곧장 북한강변을 따라난 청평과 가평, 춘천의 호젓한 호반 길을 달려 화천으로 향했다. 화천이 가까워질수록 산과 강 그리고 들판이 여유롭고 넉넉하여 평화로워 보인다.
강변을 따라 굽이굽이 난 길로 화천시내에 들러 선이골 아이들을 위해 커다란 수박 한통을 챙겼다. 상서면 노동리는 화천에서 북서쪽으로 난 들판 길로 30분이면 닿을 수 있으며, 그곳에서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2키로 쯤 올라가서야 만날 수 있는 곳이 선이골이다.
사륜구동이 아니면 오르기 어려운 그곳의 깊은 골들이 줄지어 서서 나를 반긴다. 외딴집 바로 못미처에는 어느새 통나무 집 한 채가 지어지고 있었고, 아기자기한 다랑지 논들에는 고만고만한 벼들이 앙증스럽게 제자리를 지키며 자라고 있었다.
▲ 하늘말씀배움터 앞에선 선이골 다섯 아이들은 자연이다.
다섯 아이들로 웅성웅성한 하늘평화학교에 들어서니 김명식(61)님이 반기셨다. 막내 원목(10)이는 수돗가에 않아 설거지에 정신이 없었고, 장남 선목(16)이와 고만고만한 주목(14)이 일목(13)이 화목(12)이가 눈웃음의 예로 맞는다.
강한 태양빛을 피해 다랑지 논들이 바라다 보이는 마루에 걸 터않아 도시와 농촌에 대한 골짜기문화와 제자리문화를 화두로 삼았다. 첫 대화의 물꼬로 다양성의 문화를 아래와 같이 나누었다.
[선이골 현장에서 나눈 이야기]
노란 것과 빨강 것 서로의 색깔이 달라도 다양성의 문화는그것이 옆에 없으면 비교 자체가 안되니까 노랑과 빨간 것을 칭찬해 주는 것인데 지금 이 땅에서는 너무 하나만을 위하여 구별 짓고 다른 한쪽은 무시해 버린다. 옛날 서로가 그리워 사랑방에서 밤새 이야기를 해도 웃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 나왔다. 남편을 잃은 한을 들어주고 풀어주곤 하는 문화, 또 만나고 또 보고싶은 만남, 소소한 감자를 찌거나 김치를 담가도 나누어 주고 싶은 문화가 제자리 찾기 문화다.
현재 우리의 제자리가 없으니까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다. 밖에 있는 엄나무와 구기자 나무는 서로간의 긴밀한 대화(疏通)를 나누면서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늦은 잠을 자면서도 사랑방모임을 잊지 못하는 감정은 꼭 무엇이 있을 때만 나누고 싶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골짜기 문화는 각자 따로 떨어져 있지만 하나의 문화를 지향하면서 삶을 가꾸는 문화이다. 근본부터 우리의 얼을 찾아보려고 글 공부를 시작 했다. 글은 수 천년동안 쌓인 말이 모여 글이 된 것이다. 글속에서 많은 인간의 불씨들을 찾아 다시금 살려야 한다. 우리 남자들에게는 저마다의 불씨가 있다. 이것이 바로 불알로서 각자에게 적정한 ‘불’ 즉 ‘빛’을 바라는 생활이 중요하다. 빛을 바라지 않으면 모든 생명체들은 죽기 때문이다.
“빛”은 “하늘”로 상징적인 표현을 쓴다. 하늘을 바라는 마음들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각자에게는 자마다 가지고 있는 하늘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도 범접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인디언대로 서양인들은 서양인대로 아프리카인들은 아프리카인대로 조선사람은 조선사람 대로의 저마다 하늘이 있어서 그들 나름의 하늘을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하늘을 우리는 그냥 대할 따름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서로가 피워내는 하늘을 볼 뿐이고 느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아니면 안된다는 억측은 글~쌔, 그렇다면 예수전의 수천 수만년의 역사는 우리가 어떻게 대면하여야겠는가. 그렇다고 예수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내가 이스라엘의 예수를 존경한다. 그런데 나의 예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종교인들하고 대화할 때는 우리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나의 예수, 나의 신학, 조선의 역사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신학을 찾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에서 믿는 이스라엘 신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권에서 하면 된다. 인디안들의 대답이 분명한 결과를 주었다. 즉, 답을 준 것으로 안다. ‘기독교적인 신학이 인디언들이 믿는 와탕깐타로서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알라가 이스라엘에서는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에게는 제자리가 없기 때문에 상대방 것이 좋아 보이고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편을 갈라버리는 이원론 이라할까 대립적 현대문명에 길들여진 것이 사실이다. 현대문명은 100점짜리만이 1등을 한다. 하지만 100점에서도 1등, 90점짜리도 1등, 80점.....50점짜리도 1등을 하는 문화는 없는 것일까.
전체적인 순열과 조합은 하나로 통한다. 현대철학이 대단히 이분적이다. 대립적이다. 강화적일 때는 경쟁적과 투쟁적이다. 이러한 300년 동안의 교육과 문화가 근대문명과 문화속에서 오염되게 되었다. 근현대 문명 문화속에서 교육과 종교가 전부 오염되어 버린 것이 되었다.
현대문명의 좋은 것을 활용하는 것이 지혜다. 근대문화의 좋지 못한 것은 도려내는 작업이 있어야만 한다. 도려내는 아픔을 갖는 것이 제자리문화 찾기다.
자연계는 모두 제자리에서 키가 작고 크고 마르고 살지고 미끈하고 토라지고 하지만 생태계의 하나라도 없어지면 흐트러짐을 사람들은 모른다. 즉,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즉, 종합적인 상황을 판단하여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득만을 계산하여 생태계를 대한다.
숲을 정비하는 곳에서도 여지없이 양만을 계산하여 5그루에서 2그루만을 남기고 베어낸다. 하지만 개수 보다는 서로가 균형을 맞추어주는 시각의 변화가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늘 그리운 사람들의 골짜기 문화는 각자의 사는 위치와 모양은 다르지만 따로 떨어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처지에 맞게 집을 짓고 살면서 근본부터 함게 공부하는 문화가 우리나라 말이다.
근대와 현대교육에서 문법이나 낱말의 뜻이 아니라 그 말의 근본적 의미나 본래 가지고 있던 얼이 무엇인가 넋이 뭔가 슬기가 뭔가 느낌이 뭔가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에 대한 대답은 수 천년동안에 쌓여 왔던 말인데 말을 글로 모양을 짓는 것이 글자인데 여기에 왜 우리의 정신이 담겨져 있지 않은가. 왜 안 새겨져 있을까하는 답을 농사를 지으면서 얻고 있는 것이다. 말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글을 뿌리는 것에는 온전한 불씨가 담겨있어야 불이 불빛이 제대로 살라질 수 있다.
잠시 주고받는 이야기를 접고 양평에서 가져온 햇감자를 밥상으로 차려낸 아이들의 대견한 손길을 대했다. 짝 벌어진 감자 하나하나에는 에너지가 넘쳐 맛있었다. 밥상을 물리고 아이들은 아랫마을 삼촌과 함께하는 풀베기를 돕기 위해 분주하다. 저마다 긴팔의 작업복과 모자를 쓴 모습에 정이 넘친다. 집 앞 하늘평화학교에서 잠시 얼굴을 마주하고서는 김명식님의 안내로 산골 밭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길옆으로 빨간 꽃 양귀비를 심어 단장했고 비탈 밭에는 오이와 각종 콩류, 옥수수와 감자 등 작년보다 제법 많은 량의 농사를 짓고 계셨다. 고즈넉하고 양지바른 언덕으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김용희(45)님의 무덤가 주위로는 분홍 꽃과 빨간 꽃들이 앞을 다투어 많은 꽃망울을 터트려 평소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했던 ‘혹시 내게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조용히 보내주길 바란다.’면서 ‘무덤엔 나무 한 그루 정도 심어 달라’고 예언 같은 고인의 희망이 살아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안흙이 가림다한글마을 전경
김명식님은 은행나무와 과일나무 동산을 만들어갈 꿈과 희망을 들려주시면서 “저 만발한 꽃들 좀 봐! 아직도 용희는 선이골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야! ”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밭 위로는 초막이 하나 있는데 손님들의 쉼터란다. 그곳에 들러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는 아이들은 이곳 선이골이 하늘말씀배움터가 되어 계절별로 맞이하는 과목들이 다르다. 봄에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몸의학, 씨앗공부, 우리말, 천연계, 역사, 집짓기, 대토론 등 꼼꼼하게 준비된 일정들을 치러낸다.
영어단어 몇 개를 더 외우고 수학공식을 줄줄 외우는 것보다는 사계절에 따라 바람의 기운을 읽고 씨를 뿌릴 때와 거둘 때를 알고, 흙의 촉촉한 정도를 읽고 심을 나무의 종류를 정하거나 산새들의 소리에 따라 날씨를 가늠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둔다. 많은 이들이 어머니가 떠난 뒤 아이들의 밥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만 선이골 아이들에게 변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전부터 해오던 대로 맡은 자기 일을 충실히 할 따름이다. 아니 이전보다 더욱 성숙한 모습이 엿보였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보호대상으로 볼일만은 아닌 것임을 선이골 아이들은 삶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김명식님은 예술적 재능을 많이 지닌 그래서 글 솜씨가 제법인 화목이의 두틈한 시집을 건네주시며 최남선(崔南善)이 14세 땐가 지은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상기시키시며 시를 짓는 솜씨가 제법인 화목이를 대견해 하셨다. 그 옆에 주목이의 만화공책도 있어서 잠깐 들쳐 받는데 만화솜씨뿐 아니라 각종 동식물들의 특성도 빼곡하다. 그중에서도 낚시하는 그림이 눈에 띄어 물었더니 전에 커다란 베스를 두 놈 잡더니 요즘 낚시에 푹 빠졌단다. 어젠지 오늘도 낚시 대를 챙기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잠시 그곳에서 피곤한 몸을 뉘이고는 천천히 언덕가 무더기로 핀 꽃들과 저 멀리 첩첩의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를 바라 보았다. 온 천지가 초록들로 향기롭다. 쩌렁쩌렁하게 짖어대는 개들을 뒤로하고 마당으로 나갔다.
전날 심다 남은 땅콩을 심고 마당에 풀을 다듬고 계시는 김명식님은 끝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있는 조선(晁僊)신학대학을 제안하셨다. 매월 둘째 주 금요일저녁부터 다음날까지 조선(晁僊)의 철학과 종교, 역사와 문화, 의학과 예술 등을 아우르는 대학2년 과정과 대학원 2년 과정의 구체적인 공부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초고층의 건물과 자본 그리고 이름난 교수가 전부인 현재의 교육체계에서 번듯한 건물하나 권위 있는 교수나 학교, 학위가 없더라도 선생과 학생이 구분됨이 없이 배움을 서로 나누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