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함께 하는 착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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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함께 하는 착한 사람들
  • 새마갈노
  • 승인 2009.09.29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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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찾아서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문경기행

입춘을 하루 앞두고 세 가족, 10명이 함께 신라 천년고도(千年古都)를 간직한 역사와 문화 도시이자 불도신앙(佛道信仰)의 땅 서나벌(徐那伐)로 역사기행을 떠났다.

이번기행은 지역적인 네트워크로 다져진 전원의 가족들이 가끔씩 작은 음악회와 좋은 영화감상회도 갖고, 꽃들과 나무들, 새들을 감상하는 수요산행과 산악자전거로 떠나는 여행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보니 자연히 교회의 틀을 뛰어넘어 자연을 벗하며 자전거로 경주를 역사기행 할 수 있는 여유를 낸 것이다.

우리들의 만남은 자연속에 예배당 공간을 두기로 하고 10년 전 광릉 숲이 가까이에 있는 포천시 소홀읍 무림리로 종로5가에서 교회 터를 옮긴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랑방공동체교회’를 통한 지역사랑방 ‘이하 방모임’을 갖던 가족들이 끼리끼리만 협동하는 교회문화를 넘어, 인근전원에 삶터를 옮기고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과 자유롭게 신앙의 생활화를 지향하는 분들이 함께했던 기행이었다.

▲ 문경시내에 있는 청기와 집

길 따라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거쳐 경부고속도 김천나들목을 지나 경주나들목으로 빠져나와 서나벌로 입성한다는 계획을 정한다음, 점심때는 입맛 떨어지는 휴게소보다는 중간기착지인 문경시내에 들러 맛있는 밥상과 차사발 도예현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겨울기행을 한껏 짜릿하게 만들어 주기위한 영하의 강추위가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창너머로 괴성을 지르며 따라온다. 어느덧 신 문경세재를 넘어 문경읍에 들어서니 거대한 준령들이 육중한 능선들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도열하여 반긴다. 1,000미터가 넘는 백화산과 조령산, 주홀산과 운달산 등의 봉우리마다에는 하얀 눈꽃들의 풍경이 시선을 압도했다.

▲ 문경도예 명장 천한봉 선생님이 재현한 주병과 술잔
문경시외버스터미널 옆에서 시골밥상을 물리고, 문경읍 북동쪽에 위치한 운달산 성주봉 아래쪽에 자리잡은 도천 천한봉(74)님의 문경요를 찾았다. 한적한 농촌마을인가 싶더니 잘 가꾸어진 당산나무 숲이 정갈하게 손님을 맡는다. 이윽고 거대한 산처럼 쌓여있는 장작더미가 보이는 곳이 문경요, 14살 때부터 민요(民窯)에 입문하여 욕심을 낮추고 자연을 닮은 차(茶)사발을 빚었던 도예명장 집이다.

온유한 마음으로 질퍽한 우리민족의 혼을 빚어서일까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인자하시다. 철모르는 아이들에게 세배를 받으시고는 세배 돈도 잊지 않는다. 2층 응접실에 올라가니 한쪽에 마련된 차사발과 도자기들로 풍요롭다.

도자기를 직접 빚은 도예명장으로부터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듣고, 먼저 눈길과 손길이 닿았던 것은 무어라 딱 부러지게 형용할 수는 없지만, 섹시하고 날렵한 긴 주둥이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백자로 된 막걸리 주병 앞이다. 어찌나 곱던지 잘빠진 여성 같으면서도 우람하고 씩씩함이 깃든 위풍당당한 남성미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 해맑은 모습으로 막걸리 잔을 받고 계시는 천한봉 선생님

옛 서민들이 즐겼던 발효 술 막걸리에 대한 필자의 애착이 기우가 아닌 것으로 귀한 술을 담아내는 주병과 잔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바쁘신 와중에서도 우리민족의 애환이 서려있는 막걸리 주병과 잔을 고증해 주시겠다는 열의에 힘을 얻고, 금년 전국막걸리 품평회 때에 도예명장의 자기들이 전시되고 사용되어지기를 바래본다.

작고 둥그런 모양에 뚜껑이 달린 기름종지를 비롯하여 실용성과 우아한 미에 앙증맞음을 더한 갖가지 민간도기들을 60년간 빚으신 행복의 비결은 꾸밈없는 정직함일 것이다. 조선시대 평민들이 아끼던 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도다완이 되어 국보급지정을 받았는데, 천한봉 장인이 만든 사발과 같아 현지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다.

원탁의 테이블에 도예명장과 함께한 가족들이 나란히 깊은 맛의 차를 마시고, 나오면서 전시된 사발 중 대부분이 사발 안에 네 개의 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음이 무슨 표시인지가 궁금하여 여쭈어보니, 소규모로 일일이 가마에 불을 지펴 도자기를 구워내는데 한 가마에 여러 사발을 굽기 위해 포개놓는데서 생기는 자국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차물 속에서 대류작용을 일으켜 차의 맛을 훨씬 좋게 해준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요즘 한국에서보다는 일본에서 더욱 유명해져 전시와 주문은 물론 일본왕실의 화병도 장인의 손끝으로 직접 빚으신다니 가슴 벅차다.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역사도시 경주기행

▲ 신라 천년을 만나는 즐거움에 앞서<풍경앞>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경주 땅에 다다르니, 고대문화의 진수들이 즐비하게 기다리기보다는 매서운 바람과 함께 경주시가지는 사통팔달 이어주는 속도에 매달린 千年高都 같았다. 이제 경주는 옛 왕경문명의 찬란함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여느 도시 못지않은 콘크리트 문명일색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재야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역사의 수수께끼(1)]삼국유사 기록에 보면 전성시대 경주의 호구 수는 178,936호였고, 인구수는 한호에 4.5명으로 계산하면 805,212명에 달한다. 하지만 조선초 경주부의 호구 수는 1,552호였고, 인구수는 5,89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경주의 호구 수는 95,170호이며, 인구수는 292,000명으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지금의 경주가 신라의 도읍지였다고는 믿기 어려운 부분이다.

▲ 천년고도 경주의 옛 지도

예약없이 당일 경주에서 머무르기로 하고 보문단지 못 미쳐 한적한 마을에 자리 잡은 풍경펜션을 찾아 그곳의 14평 공간에 한 지붕 세 가족의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어두움이 뉘엿뉘엿 다가올 무렵 저녁밥은 가져온 쌀과 밑반찬으로 곤두레나물밥을 만들었다. 때마침 출타중이던 풍경펜션 주인 아줌마께서 김치 한포기와 경주 최고의 과일로 빚은 전통막걸리를 받아와 차와 밥과 술로 회포를 풀고, 그곳 주인 아줌마와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신라인들이 대경(大京) 또는 금성(金城)이라 불렀던 서나벌(徐那伐), 즉 서라벌(徐羅伐)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경주보문의 한적한 농촌마을 논밭이 온통 팬션단지로 바뀌어가는 숙소를 뒤로하고, 두 팀으로 나뉘어 경주역사문화유물과 유적 곳곳을 답사했다. 한 팀은 차량으로 아이들과 함께 대릉원과 경주박물관, 계림 등을 답사하고 또 다른 한 팀은 입춘을 맞는 경주의 기록적인 찬 바람, 매서운 추위를 온몸으로 맞아 들이고자 자전거를 타고 역사의 숨결을 찾아 북천을 따라 분황사와 황룡사터가 있는 시내로 패달을 밟았다.

한반도 동남쪽 작은 귀퉁이 사로국(斯盧國)으로 출발하여 멸망할 때까지 천년동안이나 한나라 수도였던 서라벌 경주는 고려 태조 18년(935년)에 경주로 개칭되었다가 987년 동경으로 잠시 바뀌었다. 그러다가 1012년 다시 경주로 개칭 되 오늘날까지 이어진 도시다.

경주는 동으로 설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가 있는 토함산(吐含山), 남으로 남산(南山:金鰲山) 서로는 선도산(仙桃山)에 둘러싸인 분지의 지형이다. 수준 높은 불교문화가 꽃피고 수많은 전설을 낳은 신라 역사의 중심지 경주에는 사찰이 164개(삼국유사)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신라 때 사찰은 고작 11개다.

[재야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역사의 수수께끼(2)]신라시대 수도왕경에는 왕궁이 외성(사방7.7km*7.2km), 내성(사방2km*2km)의 크기로 알려지고 있으며, 삼국유사에 보면 서라벌인 경주에 내성(궁성)이 31개나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서라벌, 금성, 월성, 명활성, 신성만이 전하는데 현재 금성과 신성의 위치는 찾을 수 없다. 필자가 알기로는 반월성은 부여(반월)를 지칭하고, 월성은 달 모양으로서 중국의 출판물 성지사(城地史) 장한환저, p307, 제3장 동성현성평면도(중국 안휘성 동성시 소재)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경주시내에 들어서자 차분하고 고즈넉한 역사문화의 땅이란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시내를 가로지르는 대형차량들의 질주가 심하다. 또한 유적지들을 압박해오는 아파트단지의 행렬은 세계문화유산도시 경주를 다시금 되새겨보게 한다.

▲ 황룡사 터에서 바라본 분황사와 모전석탑

첫 번째로 들른 곳이 당나라에서 계율을 공부한 자장(慈藏), 신라의 명필 혜강(慧江분)을 비롯하여 원효(元曉황)가 머물렀다는 분황사를 지나쳐, 안산암(安山岩)을 벽돌처럼 쌓아 올린 분황사(芬皇寺) 모전석탑(模塼石塔) 감흥에 사로잡혔다. 원래는 7층 내지 9층 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3층만이 남아있는 이 탑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허물고 조선시대의 승려가 수리하려다 오히려 더 손상시켰고,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원형이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파란의 역경을 겪은 석탑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 너른 황룡사 터에 누워버린 자전거

분황사에서 매표를 끊지않고 살짝 지나쳐 우측으로 나있는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길로 접어드니 이곳이 황룡사(皇龍寺) 터다. 553년(진흥왕 14) 새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黃龍)이 나타나 계획을 바꾸어 16년 동안이나 공사를 하여 절을 지었다는 황룡사는 동서 288m, 남북 281m의 큰 절이다. 삼국유사에는 자장이 황룡사의 강당에서 이틀 밤낮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할 때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강당을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황룡사는 신라가 어려움에 처하고 있을 때 간절하게 호국염원의 뜻으로 일본, 중국, 오월, 말갈 등 아홉 나라를 제압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兒非知)를 데려와 9층 목탑을 완성했다는 사연 많은 곳이다.

▲ 황룡사 9층 목탑이 자리했던 곳의 석조물
결국 13세기 후반 몽고군의 침략을 맞아 절이 불타버린 황량한 초원, 황룡사 금당자리 빈터에는 오랜동안 땅속에서 잠들어 있던 거대한 돌 받침만이 제자리에 복원되 무력해진 불국정토의 무상을 생각나게 했다. 우리들의 방문에 바람도 잠시 잠잠해져 이틈에 자전거와 함께 잔디밭에 누워 맑고 고은 햇살 속에 새로운 기운을 한껏 받아 수많은 역사의 흔적들과 조우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라 왕경문명 자전거와 만나다 .

 

▲ 임해전을 비롯한 많은 부속건물과 정원이 있었던 자리(안압지)

황룡사 터에서 서쪽평원을 달려 도착한 곳이 신라 원지(苑池) 임해전지(안압지),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별궁 안에 있던 것으로 임해전을 비롯해 여러 부속건물과 정원이 있었으며, 동궁(東宮)에 달려 있던 인공 연못이다. 신라 674년(문무왕 14) 궁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국왕이 임해전(臨海殿)에서 연회를 베푼 기록이 여러 번 나오고, 후백제 견훤에게 경애왕이 살해당한 뒤에 즉위한 경순왕이 고려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왕건을 초청하여(931년) 연회를 베푼 장소라고도 하여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접대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라 부르게 됐고, 1975년 연못을 발굴하면서 월지(月池)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상화문전에 기년명(紀年銘)으로 보아 흥덕왕이 왕이 되기 전인 822년(현덕왕 14)에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가 살다가 몇 년 뒤에 즉위한 것으로도 추측하여 이곳이 동궁이었던 것으로도 추측된다. 안압지의 많은 유물들은 옆에 있는 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 월성(반월성)과 석빙고 그리고 자전거
안압지를 돌아 나와 월성해자를 지나니 월성(月城)터 비좁은 입구가 발에 채이듯 마음에도 걸린다. 구릉위를 간신히 올라서니 활기 잃은 활궁장과 삼각천막위 빨간 깃발만이 나붓기는 쓸쓸한 승마장과 널따란 언덕공간이 아늑하게 자리한 이곳에 왼 석빙고가 품어져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얼음저장고로 규모나 기법이 걸작이다. 현재의 석빙고는 조선시대 만들어진 시설로 원래 월성 서쪽에 있던 것을 1741년(영조 17)에 이곳에 옮겨지었다 한다. 월성의 흔적이 도처에 널려 있어야 되는데 아쉽다. 대신 석빙고 앞에서 따끈한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는 신라왕들이 월성을 쌓은 뒤부터 왕경의 가장 중심이 되는 장소로 여겼다는 이곳 저곳을 말 대신 자전거로 한바퀴 들러보았다.
▲ 자연으로 둘러쌓인 월성에는 말이 많다.

오랜 세월동안 흙과 돌을 섞어 쌓은 토성이 무너지고 묻혀져 이제는 건강하게 자란 참나무들과 대숲들만이 자리하고 있는 월성을 위에서 바라본 모습은 반달모양 같아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부른다. 성벽과 접해있는 남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남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오솔길은 낭만적이고 참 예쁘다. 과거 자연적인 해자구실을 한 남쪽과는 달리 동쪽과 서쪽, 북쪽에는 인공으로 해자를 만들었다는데 발굴당시 뻘 속에서 많은 목간(木簡)이 나왔다 하며 국왕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재성(在成)이라고도 불렀다한다.

월성과 석빙고를 둘아 나와 인왕파출소를 지나니 인왕동시가지가 우측으로 줄을 지어 서있다. 좌측으로 월성(반월성)과 그 밑에 해자발굴을 하다만 공사현장을 단번에 지나니 첨성대가 눈앞에 보인다. 첨성대(瞻星臺)는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9.108m이며, 아래로부터 4.16m되는 곳에 사방 1m의 구멍이 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별자리를 관측했다고 기록은 있지만 하늘을 관측하는 곳으로는 너무 좁다는 이유로 첨성대는 별자리를 관측하는 장소에 세워진 상징물로 보고 싶다. 사실 천문대는 산꼭대기에서 하늘을 보고 별자리를 관측하는 것이 아니라, 평원에서 물을 담아두는 커다란 첨성을 쌓아 여러 명이 교대로 물속에 나타난 별자리를 관측하는 것이다. 이는 하늘의 뜻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옛 현실정치의 혜안이 그대로 베어있는 의미로 한나라의 정치평가는 자연현상이 내린다고 믿었던 시대 시설로 매우 중요함을 내포한다.

첨성대를 우측으로 하고 좌측 길로 접어들어서니 김씨 시조 알지(閼智)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곳 계림이다. 탈해(脫解) 이사금 때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와 호공(瓠公)을 보내니 보라색 구름이 하늘에서 드리워 작은 궤가 걸려있는 나무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궤를 열자 외모가 준수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이 아이가 바로 알지로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했다.

김알지의 탄생설화는 김씨 집단이 외부에서 이주해 온 집단임을 암시하고 이들은 초기 이사금 자리를 박씨와 석씨 집단과 교대로 차지하면서 내물마립간 이후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왕위를 독점했던 것 같다. 경주에 거대한 고분이 많이 만들어진 시기도 김씨가 왕위를 독점한 마립간의 시기와 일치하여 신라 김씨 집단이 북방의 기마풍습과 함께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경주로 이동해 왔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 뒤로 시림(始林)이라는 이름을 고쳐 계림(雞林) 즉, 사로(斯盧)라 하다가 503년(지증왕 4)에 신라로 고정하여 불렀다 한다.

▲ 유교문화의 본산 경주향교를 찾아서
울창한 숲속에 흙 담을 두른 사각정자 계림을 뒤로하고 우측으로 들어서니 우리나라 향교 중 가장 긴 세월동안 한자리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기관으로 조선의 많은 유생들을 배출한 곳이 경주향교다.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유교문화의 찬란함을 자랑하듯 자리한 대웅전 돌담을 지나 동쪽 끝에 나있는 사립문을 살며시 밀치니 육중한 돌우물이 반긴다.

작고 아담한 한옥사이 문들을 통과하여 학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 뜰에 들어서니 감회가 새롭다. 이어 공자를 비롯하여 유현들을 제사하는 대웅전은 크고도 장대했다. 본래 이 자리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사랑했던 그 유명한 요석궁(瑤石宮)이 있었던 유서 깊은 터란다. 이 향교는 임진왜란시 전소됐다가 1600년(선조 33)에 기공하여 1602년(선조 35년)에 완공된 후 2000년 대성전의 도리이상을 해체보수 하던중 종도리에 묵서로 씌여진 상량문이 나와 귀한 사료적 가치로 쓰인다. ㅁ자로 남쪽에 정문이 자리한 대성전을 휘돌아 나와 경주 최부자 집으로 향했다.

[재야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역사의 수수께끼(3)]삼국유사 권1에 35입금택(금칠을 한 기와집)은 주로 왕도(경주)에 몰려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남아있는 금택은 하나도 없다.

▲ 한국식 자본주의로 지속적인 부와 명성을 얻은 경주 최부자 댁

최부자 집은 10대 300년간 부를 누린 우리사회에서 도덕성과 아울러 고준한 지혜를 가진 최고의 경영과 경제의 CEO가문이다. 우리식의 자본주의의를 성공적으로 이끈 이들 가문에는 여섯 가지의 철학이 있고 대대로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문의 전통과 역사가 살아있는 집안, 남의 집이 살아야 내 집도 산다는 상생(相生)의 구현이 신앙처럼 내려오는 집안이다. 또한 궁중으로부터 유래된 술 교동법주가 토종찹쌀과 밀누룩, 우물물로 유명한 집이다.

전통적인 한옥구조로 된 대문 안을 들어서니 좌측으로는 교동법주 전시물들과 창고가 있고, 좀더 안쪽으로는 작은 정원이 돌우물과 함께 손님을 맞는다. 사랑채에 걸터앉으니 따스한 볕이 몸을 녹여주는 듯 포근한 느낌이다. 사랑채 좌측으로 또 다른 대문이 있는데 그곳 안쪽마당에는 장독들로 즐비하다. 가늘게 들려오는 피아노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숨을 죽이고 있는 순간 옆에 있는 아내가 ‘피아노를 좋아하는 배영신(89세)님’의 은율이라고 넌즈시 말문을 연다. 자전거로 이동하기 때문에 법주를 사가진 못하고 대신 시음을 청하니 꿈일 뿐이다.

최부자집 인근에는 여러 채의 한옥이 들어서 있는데 또 다른 한 채는 대대적인 보수공사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용과 위세가 짐작되고도 남는다. 어마어마한 곳간은 잘 정리되어 있어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을 반겨준다.

최부자집 정겨운 골목길을 뒤로하고 앞쪽 커다란 마당길에 나오니 요석궁이라는 멋진 한옥에서 청아한 가야금소리가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누군가가 한식집임을 알리자 자전거는 쏟살같이 신작로로 접어들어 교동의 오릉앞에 멈추어 섰다.

▲ 경주시내에 있는 오릉과 자전거

[재야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역사의 수수께끼(4)]신라시대 왕릉으로서 오늘날 그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56명의 왕릉 중에서 3명의 왕뿐이고, 그 중 고 신라시대의 것은 오릉, 탈해왕, 지마왕, 일성왕, 아달라왕, 미추왕, 내물왕,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무열왕릉 등 모두 17릉이다. 이들 왕릉은 조선후기에 와서 정리되고 위치가 추정된 것이며, 그 중에는 전부터 내려오는 신용할 만한 구전과 증거에 의한 것도 물론 있으나 잘못된 민간전승을 그대로 따른 것도 있어, 17세기의 학자 류의건(柳宜健)이 비판한 것처럼 현재의 왕릉을 전부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라고 ‘역사도시경주(열화당편) 저자 김원용외’에서는 지적했다.

▲ 추령재 백년찻집 앞에 자전거와 함께 선 부부

자전거길을 따라서 - 경주오릉에서 감은사지를 지나 감포까지

▲ 적정기술로 만들어진 자전거는 에너지 위기시대에 교통수단

도심속 인공정원에 심취해봄도 잠시 서둘러 감포방향으로 왔던 길을 되돌렸다. 차량들과 뒤엉켜 또다시 보문단지 앞길을 지나 천군동 석탑 두기를 보듬고, 따뜻한 점심을 먹었다. 보문호와 명활산성, 신라촌 등을 먼발치에서 지나는 순간 엄청난 찬바람에 자전거와 함께 어려움을 겪었다. 산골짜기를 돌고 돌아 황룡동을 지나니 턱밑가지 숨이 차올랐다. 때마침 자동차로 박물관 등을 둘러본 아이들과 만나게되 잠시 쉼을 갖고는 또다시 옛 추령고개를 향해 열심히 자전거 폐달을 밟아 고색창연한 백년찻집의 위풍당당함과 만났다. 찻집에서 흘러나오는 가야금소리와 꾸불꾸불한 내리막길의 희열에 잠시 피로를 잊었다. 경주시 양북면에 넓다란 들녘을 자전거로 의지해 달리니 마음엔 어느새 평화가 인다.

 

▲ 보문호를 지나 방치된 채 외로이 서있는 천군동 석탑 앞에서

 

▲ 감은사지는 동서 양탑이 같은 규모로 선 장중하고 기운찬 석탑이다.
한갖진 대종천 뚝방길과 논두렁 밭두렁 사이를 지나니 신라 문무왕의 뜻을 기린 감은사지가 외로이 서있다.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하려는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죽어 동해에 장사된 후 아들 신문왕이 지은 절이 감은사다.

 

웅장한 규모와 장중하고 기운찬 탑의 기상, 전체적인 균형이 안정감을 주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천천히 감상하고 나오니 시원스런 동해바다가 박수를 쳐준다.

 

 

▲ 황룡동을 지나 추령재를 향하고 있는 자전거와 사람들

바닷가 길을 통하여 규모는 작지만 어선이 많이 드나드는 감포항에 입성하여 3일과 8일에 장이 열리는 감포장을 만났다. 복잡한 장과 포구가 만나 새벽의 가슴 벅찬 감동을 연출하는 감포는 바닷가를 전경으로 형성된 방파제와 등대도 좋았다. 경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와 일출을 공짜로 제공하는 감포항 언덕배기위에 짐을 풀고는 또 하룻밤의 추억을 맞는다. 

▲ 자전거를 타고 머나먼 동해바다 끝 감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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