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마을엔 ‘104년 된 교회’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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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엔 ‘104년 된 교회’가 있었네
  • 류기석
  • 승인 2013.04.26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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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법전면 척곡교회와 명동서숙을 찾아서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사랑방교회(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림리, 정태일 목사)는 속회나 구역회가 없다. 대신 사랑방이라는 독특한 교회생활 조직이 있어 성서모임과 공동체생활 등을 진행한다.

   
▲ 척곡교회 2층으로 된 나무종탑은 엣 것을 그대로 재현했다.

이는 경건생활에 장애가 되는 복잡한 교회생활의 구조를 보다 단순화하여 주일에 여유 있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영과 육이 아울러 휴식할 수 있도록 하며, 모든 교인이 친교, 예배, 교육, 봉사, 선교생활에 균형 있게 참여하기 위함이다.

필자도 사랑방교회의 한 식구가 되어 사람을 사랑하고 공동체 안에서 삶의 감격을 나누는 생활과 성서연구에 힘쓰고 교육공동체 통하여 가정을 보호하고 생활 속에서 주님을 증언하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교회공동체성 회복과 공동체적인 삶을 위해 훈련한지도 13년째다.

사랑방교회가 예배당을 도심이 아닌 전원에 둔 것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서 경건을 훈련하며, 그리스도인의 휴식처로 환경운동과 생명운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위함이다. 특별히 지역사회를 섬기며 지역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교회가 됨은 물론 말씀과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교회로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척곡교회 김영성 장로(좌)와 드림사랑방 옥혜숙 권사(우)

 

   
▲ 1909년 건립된 봉화 척곡교회 뒷 뜰 전경

금번 사랑방교회 각각의 사랑방 중 드림사랑방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방원들이 1박2일 공동체생활을 위한 장소로 경북봉화를 택했다. 경북봉화는 여러모로 인연이 깊다. 우선 필자가 1996년도 첫 귀농지로 삼고자 했던 곳이 봉화로 이곳을 무수히 오고갔던 점과 함께 드림사랑방을 섬기시고 계신 김영식 장로의 고향 또한 봉화춘양 도심리다. 그곳엔 아직 생가 터가 남아있다.

19일, 맑은 봄 햇살을 가르며 경기도 포천과 남양주 그리고 서울인근에 살고 있는 방원들이 하나둘씩 스탁렉스에 몸을 맡기고는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중부와 영동 그리고 중앙고속도로를 달렸다.

   
▲ 척곡교회가 자리한 봉화 법전면 척곡리 오지마을 전경

아침부터 출발한 승합차는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기동리에 자리 잡은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를 들렀다. 단양휴게소의 특징은 휴게소가 고속도로의 주행차선과 좀 멀리 떨어져있어 조용하다는 것, 주변의 수려한 풍광 속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휴식과 각자가 준비한 특별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는 봉화 산골을 향해 또다시 출발했다.

풍기와 영주를 거쳐 봉화로 달리는 차창 밖으로 만화경처럼 스쳐 가는 봄 풍경들을 바라보다가 봉화군 법전면 소재지로 들어서니 스르르 타임머신처럼 옛날로 돌아갔다. 법전 송월재 종택과 기헌고택(법전 강씨), 법계서실, 경체정, 이오당 등이 널 부러진 마을길을 지나 10여분쯤 산길을 꼬불꼬불 오르내리다가 오른쪽 산 아래 앙증맞은 3층 나무종탑과 나란하게 놓인 허름한 교회당 건물이 눈앞에 들어왔다.

   
▲ 봉화 척곡교회 예배당 입구

교회가 자리한 마을은 첩첩산중의 궁벽한 산골마을로 5가구정도 남짓한 집들만 드문드문 살고 대부분 빈집들이 산재해 있었다.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척곡1리 833번지에 있는 척곡교회(예장통합 사적지 3호 영주노회)를 막 들어서니 김영성(89세) 장로가 반가이 일행을 맞았다. 김 장로는 평생을 교직에 몸담아 오다가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이후 2004년 6월부터 낙향하여 척곡교회를 지켜왔는데 몇해 전 봉화 고향을 방문 중이던 김영식 장로 부부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오늘에 반가움이 한층 더했다.

나름대로 초창기 한국교회 발생배경을 살펴보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가 솔내(松川)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래교회 또는 솔내교회(松泉敎會)로 불렀던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이 교회는 1884년 서상륜(徐相崙)이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교향에 세운 교회로서 건립과 운영을 자급자족하였고, 건축양식도 기와집의 전통적 가옥이다.

솔내교회는 후에 선교사들이 이 교회를 방문하여 한국인 주도의 교회생활과 학교교육 등을 관찰하기도 했고, 1888년 인도의 대기근 때는 68달러의 막대한 구제금을 보낸 일도 있다. 이밖에도 꾸준히 동학도와 우호적 관계를 맺었으며 1896년 언더우드(Underwood, H. G.)목사가 이곳에 왔을 때는 동학군의 지휘관급 2명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교회는 처음으로 한국인들 손에 의하여 세워지고, 최초의 장로 장립, 동학과의 해후 등이 이루어진 역사적 교회로서, 김명선(金鳴善)·노천명(盧天命)·김필례(金弼禮)·양주동(梁柱東) 등이 이 곳 출신이다. 이런 솔내교회와 척곡교회는 교회사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비슷한 면면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사랑방교회 드림사랑방식구들이 공동체생활의 일환으로 척곡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는 장면

우리나라 장로교 최초의 교회는 1887년 9월 선교사 H.G. 언더우드가 세운 서울의 새문안교회이고, 감리교 최초의 교회는 1887년 10월 H.G. 아펜절러가 창립한 정동제일교회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새문안교회나 정동제일교회는 서울 한복판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장연의 솔내교회가 그렇듯이 봉화의 척곡교회도 자생•자급적 성격과 가족적 성격이 강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척곡교회는 대한제국 탁지부 관리를 지냈던 김종숙(김영성 장로의 조부)이 1907년에 창립한 교회로 예배당은 1909년경에 건립한 건물로 당시 대다수의 초기 교회 건물이 'ㄱ자형' 또는 '一자형'으로 지어진 데 반해 9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이루어졌고, 동서쪽에 각각 솟을대문 형식의 출입문을 두어 남녀 출입을 구분했다.

   
▲ 사랑방교회 드림사랑방 김영식 장로의 기도

 

   
▲ 척곡교회 김영성 장로의 말씀

일제강점기 초기에 교회 부지 안에 명동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초가 형태로 지어 후진 양성에도 힘쓴 모습이 독특했다. 본래 6칸 규모로 5칸은 교실, 1칸은 여자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93년 8칸으로 확장했으며, 예배당과 명동서숙을 구분 짓는 자연석 담장이 둘러져 있다. 초창기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ㅁ자형' 교회로 초기 기독교 건축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단다.

우선 드림사랑방공동체식구들은 교회당 종탑 아래에 모여 개략적인 교회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예배당에 들어섰다. 작지만 의미 있는 기념예배에 김영성 장로가 직접 피아노 반주를 맡고 김영식 장로는 기도를 드려주셨다. 잠시 척곡교회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듣는 순간 작은 산골교회는 금방 활기를 되찾았다.

   
▲ 척곡교회 창립 당시부터 내려온 소박한 의자

 

   
▲ 봉화 척곡교회 옆 명동서숙 전경

1907년 11월 교인들이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사로부터 학습을 받아 세운 영주 내매교회, 봉화 문촌교회와 더불어 봉화 척곡교회는 경북북부지역 초대교회사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예배를 마치고 김 장로는 할아버지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교회주변과 명동서숙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시면서 안내했다. 예배당은 원래 맨 마루와 기와지붕이었으나 나중에 긴 의자를 놓고 함석지붕으로 교체했다. 예배당 안에는 아치형 강단 장식과 의자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어 눈에 띄었다.

   
▲ 봉화 척곡교회와 명동서숙 전경

명동서숙에는 “교육이 독립운동이다”라며 중국 만주로 넘어간 다음 북간도 화룡현에 자리를 잡아 1908년 4월 27일 명동학교를 세운 김약연 선생의 기독교교육기관과 깊은 인연이 있어 보인다. 1909년 완성된 척곡교회는 명동서숙과 더불어 한국기독교건축 초기의 공간구성을 보여주는 데다 개인의 선구적인 의지로 설립된 종교건축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문화재청에 제257호 문화재로 등록됐다.

또한 이곳에는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척곡교회 초기 세례인명부와 당회록이 남아있어 현재 경북도 유형문화재 지정받은 상태다.

척곡교회를 세운 김종숙 목사는 서울에 있는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설교를 듣고 ‘야소교를 믿어야 조국을 개명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가솔들을 이끌고 처가가 있던 봉화군으로 낙향, 전도와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 1907년 법전의 유림마을을 피해 산골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 바로 옆에 ‘명동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 조국 독립을 위한 후진 양성에도 뛰어들었다.

1926년에는 경안노회 목사 및 성도들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일경에 적발돼 모진 고초를 겪었고 광복 직전인 1945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체포돼 옥고를 치른 사실도 있다. 김영성 장로는 이러한 교회역사에 힘입어 척곡교회를 지키고 가꾸기 위한 계획을 구체화하면서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07년 명동서숙을 그대로 복원하면서 기념예배를 드렸다.

김 장로 부부는 낙향하자마자 담임목사도 없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교회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수리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새로 부임한 목사와 법적 다툼까지 벌여야했던 아픈 시련이 있었지만 올해부터는 좋은 일만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한다. 아무죠록 아무 목회자나 들이기도 쉽지않아 보이는 이곳에 농촌교회에 맞는 목회자나 평신도 선교사가 농사지으며 산골교회에 맞는 특별한 농촌사역을 했으면 좋겠다.

현재 신학생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지만 정작 농산촌 오지의 교회에서 헌신할 진실한 목회자는 많아 보이지 않아 씁쓸하다. 김 장로 부부는 도시로 나간 참 신앙인들이 귀농이나 귀촌을 해서 농촌으로 돌아오는데 그들이 다시 척곡교회를 찾아주기를 내심 기대하는 눈치다.

   
▲ 척곡교회 김영성 장로 댁에서 교회 야사를 듣고 식혜를 대접받는 모습

척곡교회와 명동서숙을 둘러보고는 바로 앞에 있는 김영성 장로 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생생한 김 장로의 가족사와 야화를 들을 수 있었고, 불편한 몸으로 우리들에게 맛있는 식혜를 손수 만들어 주신 안난희(84) 권사도 뵈었다. 특히 안 권사는 허리수술도 받아 몸이 몹시 불편하신 모양이다.

두 부부의 몸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가 하루속히 치유되기를 바란다. 그래서그런지 김 장로 부부는 눈물 나도록 반가워하셨고, 헤어짐을 무척이나 아쉬워하셨다. 아예 다음번 척곡교회를 방문할 시는 명동서숙과 집 옆 컨테이너하우스를 내줄테니 마음대로 쓰란다. 농촌지역과 교회봉사를 위해 한번 더 와야겠다는 생각을하면서 척곡교회 산길을 돌아나와 다음 장소인 춘양면 소로리마을회관으로 떠났다. 

찾아가는 길은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풍기 나들목으로 나가 영주 시내를 지나 봉화, 춘양방면으로 가다보면 법전면을 만나게 된다. 법전면 농협건물을 보고 우회전하여 약 6Km 정도 가면 척곡교회를 만나게 된다. 초행자는 찾기가 쉽지 않아 아래의 연락처를 참고바란다.

   
▲ 봉화 척곡교회만 있는 유일한 식사기도문 안내장

 

   
▲ 제1회 명동서숙 포럼 안내장

주 소 :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척곡동 833-1
전 화 : 054-672-4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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