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을 생각하는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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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을 생각하는 차원
  • 이승무
  • 승인 2010.02.09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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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스러운 사회 속의 청년들을 생각하며

[편집자 주] 제201004호 2010.1.29일자 이승무 박사의 순환경제연구통신 생물학자들은 지구가 무생물인 지질학적 공으로서, 그 표면에 어떤 기적에 의해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 생겨났다는 가정을 가지고 작업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구는 끊임 없이 내부로부터 바깥으로 스스로를 창조한다는 것, 용암이 그 녹아 있는 내부로부터 분출하여 새로운 바위를 이루는가 하면 오랜 된 바위는 침식을 하여 미생물들과 유기체들로 체화되고 해양으로 유기물과 무기물로 쓸려가서 침적이 되어 결국에는 구조판의 섭입대에서 다시 용융이 됩니다. 이 모두는 하나의 거대한 지각 재생 체계를 이룹니다. 다른 재생 체계들이 지구의 물, 토양, 대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순환들은 끊임 없는 창조성의 원천이며, 미생물, 식물, 동물들로 체화될 물질들의 끊임 없는 공급원입니다. – 엘리자벳 사투리스


순환을 생각하는 차원

위의 인용문은 어느 여류 생물학자의 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물질이 순환하지 못하고 정체되고 낭비되는 것을 큰 문제로 생각하고 순환경제를 향해 나아가야겠다고 늘 고민을 하지만, 지구 자체는 이미 거대한 리사이클링 체계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땅 속의 마그마가 분출하여 생겨난 암석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풍화작용에 의하여 잘게 부수어지고 결국에는 흙이 되어 미생물로 동식물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이러한 생물체의 몸으로 들어간 물질은 그 생물체가 사멸한 후 다시 흙이 되어 강으로 바다로 흘러들어가서 바다 밑의 퇴적층을 이루고 이는 다시 지구 표면층의 밑으로 들어서서 뜨거운 불로 녹아 다시 지구 표면으로 흘러 넘칠 준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순환에서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큰 산의 바위 덩어리도 지금 그 자리에 무생물처럼 버티고 있지만 그것이 영구히 그런 무생물의 상태로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단견이고 비과학적인 것이 됩니다. 이러한 광대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다소 초연한 마음을 얻게 되고 분명하지는 않지만 전혀 근거가 없지 않은 약간의 위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세계 만물은 어차피 순환하는 것이고 지금의 과도한 물질문명은 언젠가 덧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듭니다. 사람은 자연의 환경을 자원으로 생각하고, 돌이나 바위나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그 중에서도 무생물 자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태초에 지금과 같은 생물체들이 없었을 때는 그런 것들이 지구의 주인이었고 그들은 분명히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바위덩어리에서 생명체가 나오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미 인간을 포함한 생물체들이 생겨난 모태인데도 그럴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완전히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이고 생장하는 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죽어 있는 듯이 있는 것들을 그렇게 보는 것은 착각일 뿐이고, 바로 그런 생물들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대상화되어 죽은 듯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도 사라지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라고 불리는 것들이 사라지면 다시 바위와 먼지들이 주인이 되어 또 생명을 키워낼 잠재성이 있는 것이니까 그런 존재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인과 미술가들은 평범한 과학자들보다 오히려 정말로 진리에 가까운 분들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는 애니미즘은 오늘날 다시 해석되고 복원되어야 할 인류의 오랜 지혜에 속한다고 보입니다.

청년들의 처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청년들은 사회적 약자가 되고 억압과 착취의 대상으로 된 듯합니다. 제가 보더라도 생계조차 보장해 주지 않는 사회를 위해 군대에 가서 온갖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무조건 복종하는 훈련을 받는 것은 많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액의 돈을 대학에 가져다 바치고도 단지 몇 년간 학교 울타리에 몸을 의탁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희망도 격려도 받지 못하다가 사회로 나아가 천편일률적인 내용을 암송하는 국가 고시에 매달리거나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거나 그나마 잘 된 경우란 것이 자본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 세상을 더 자본의 입맛에 맞는 곳으로 만드는 일에 밤낮 없이 몰두하는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청년들은 항상 부모보다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나은 형편에서 사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었고 그런 자신감이 있어서인지 오히려 전체 공동체를 위한 공적인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말하자면 청년들의 순수한 열정을 사회는 인정했고 또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가능성은 이제 사라지고 매년 불투명한 전망 속에서 청년들은 기성세대인 기업가들에게 물건을 생각도 없이 순진하게 잘 팔아 주는 철 없는 소비자일 뿐이고 약간의 취업 기회만 주면 엄청난 충성심과 각종 기능과 실력을 갖춘 노동자로 부릴 수 있는 자원 이상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의심스러운 사회 속의 청년층”(Youth in suspect society)라는 책이 나왔다고 하며, 저자가 쓴 책 소개문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Henry A. Giroux “ 의심스러운 사회 속의 청년층: 민주주의냐 처분가능성이냐?”

호두껍질 속에서

여러 가지 점에서 “의심스러운 사회 속의 청년층”(youth in a suspect society)은 분노감과 희망의 감각에서 동기를 받은 것이다.

청년층은 항상 애매한 범주를 나타내 온 반면에, 그들은 지난 30년 동안 유례 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이 책은 청년들에게 함께 위협을 가해온 수많은 힘들 – 고삐 풀린 자유시장 이데올로기, 비인간화 하는 소비주의 양태, 인종적으로 편향된 처벌 국가의 등장, 그리고 공교육과 고등교육에 대한 공격 등- 을 식별해 준다. 이 힘들이 결합된 위협은 아주 극단적이어서 그것은 “청년층에 대한 전쟁”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다.

1970년대 말 이래로 청년들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내포한 세대에서 시장이 주도하는 기업 국가와 점차 강해지는 처벌 국가의 병합에 의해 파괴된 사회 안의 범죄 혐의자들의 세대로 변모해 왔다. 이런 주장의 중심에 있는 생각은 현재의 청년세대가 더 이상 중요한 사회적 투자라든지 민주주의의 상태와 국민의 도덕적 삶의 척도로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년층은 지금 여러 세력들의 공격을 받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고 은근하게 해를 끼치는 것이 시장이 주도하는 힘들, 그리고 청년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 점차 침투하여 그들을 상품화하고 그들의 비판적 사고, 공민적 책임, 참여 시민의식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소비의 가르침들이다.

게다가 복지국가가 점차 해체되어 청년층은 또한 정치, 경제 및 문화의 여러 전선에서 가해지는 더욱 직접적이고 파괴적인 공세의 대상이 되어 왔다. 청년들은 점차 거버넌스, 교육, 처벌 및 주로 감옥을 모델로 한 통제의 양태들에, 그리고 그들을 가혹한 규율에 점차 종속시키면서 그들의 행동의 점점더 많은 측면들을 범죄화하는 청년-범죄-관리 복합체에 종속되고 있다. 학교에서부터 길거리까지 빈곤한 소수집단 청년층은 무작위 약물검사, 사물함 검사, 특정 인종 표적화, 감시, 무관용의 법률들을 포함한 거칠고 야비한 처벌에 토대를 둔 통제 방식들에 종속된다.

의심스러운 사회 속의 청년층은 카지노 자본주의와 처벌국가의 독특한 병합 – 그리고 일상생활을형성하는 데서의 이 새로운 사회 구성의 영향 - 을 이해함으로써만 청년층에게 전쟁이 도발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 시대의 윤곽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 책은 학계와 고등교육 기관이 청년층 및, 그들과 정치 및 비판적 교육과의 관계성의 위기에 대처하는 데서 맡을 수 있는 역할도 고려한다. 지식인들과 그밖의 문화 일꾼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등치시키는 것에 반대하면서 청년층을 열망하는 민주주의의 약속들을 구체화하는 미래에 연결시키는 정치를 통하여 청년층에 대한 이 공세를 중단시키는 일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특별히 초점을 주고 있다.

넓은 시각(視角)

“의심스러운 사회 안의 청년층”은 청년층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공격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주 된 조직적 관념으로 취한다. 나의 가정은 청년들이 지금 최근 역사에서의 다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위험한 세계를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공세는 “부드러운 전쟁”과 “딱딱한 전쟁”이라는 관련 개념들을 통해 전개된다.

부드러운 전쟁은 모든 청년층을 대체로 시장과 상품으로 취급함으로써 이들을 벌 주는 전 지구적인 시장 사회의 부단한 팽창 속에서 청년층의 변화하는 환경을 분석한다. 이 저강도 전쟁은 아이들의 삶의 모든 측면을 상업화할 뿐 아니라 인터넷, 휴대전화 그리고 더 직접적이고 팽창적인 방식으로 청년들을 시장과 소비자로서 공략하는 새로운 미디어 기술들과 함께 다양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문화의 교육적 힘을 통해서 전개된다. 시장 주도적 가치, 욕구, 정체성을 창출하는 과정은 성인들, 가족, 전통적인 중재 양태들을 우회하여 청년들과 친근한 관계로 들어간다.

고강도 전쟁은 청년들에게 더 심각하고 위험하며 이는 가난한 소수집단 청년층을 처벌, 감시, 통제의 논리를 통하여 점차 다스리는 성장하는 청년-범죄 복합체의 극히 가혹한 요소들, 가치 및 명령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청년-범죄 복합체의 각인은 교도소 문화와 밀접하게 닮은 훈육 실무를 통하여 학교들을 조직하는 점차 인기를 얻어가는 실무관행에서 가장 명백하다. 이 예에서 기업 국가는 금융 경색 중에 있으면서도 처벌 국가로 변모하며, 청년 인구의 일정 부분은 훈육적 통제의 가장 우악스런 형태에 기초한 새로운 지배 양태의 대상이 된다.

의심스런 사회 속의 청년층에 중심이 되는 것은 삶정치(bio politics)와 처분가능성의 개념이다. 이는 정치의 새로운 형태, 그리고 시장 주도적 잔인성의 더 악한 요소를 암시한다. 삶 정치는 사회적 국가가 거덜나자 정치는 더 이상 더 나은 삶을 확보하려는 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제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것에 주로 중심을 두는 것임을 시사한다. 미셀 푸코, 조르조 아감벤, 지그문트 바우만, 기타 이론가들의 업적에 의존하여 의심스러운 사회 속의 청년층은 정치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형시켜 온 경제적 다윈주의의 한 형태에 초점을 맞춘다. 정치는 더 이상 민주주의의 약속과 좋은 삶을 살 가능성 모두에 중심이 되는 제도들과 가치들에 참여하고 이들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삶과 죽음이 이제는 정치의 중심 쟁점이다.

나아가서 신자유주의적 삶 정치는 모든 공적인 것들과 사회적 국가의 존속 가능성을 공격하면서 전체 인구를 눈에 띄지 않게 만들거나 형사법 체계의 명령에 종속되게 만들 처분 가능한 인간 폐 제품들로 간주한다. 이는 가난하고, 피부색이 검고 실직상태이거나 결함이 있는 소비자이기 때문에 한계적 집단으로 간주되는 수많은 청년들에게는 특히 사실이다. 가난한 소수집단 청년층은 “아메리칸 드림”으로부터 배제되어 왔을 뿐 아니라 그들을 더 이상 어떤 가치 있는 존재들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의 완전히 쓸모 없고 처분 가능한, 폐 제품들이 되어 왔다. 그런 상황에서 생존과 처분 가능성, 삶과 죽음은 정치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상상하는가 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10년 전에 내가 깨달은 것은 진보주의자들이 계급, 인종, 성, 성적 취향, 장애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이 있으면서도 청년층의 위기, 시장 근본주의의 영향 분석을 위한 그것의 엄청난 중요성, 처벌국가의 등장 그리고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발흥과 그것의 처분가능성 문화에 관하여 이야기할 비판적이고 교육적인 문화를 제공하는 데서 교육이 갖는 결정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이 이론적 정치적 공백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해 왔더, 나의 책은 청년층과 민주주의의 관련된 위기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동시에 학계와 공적인 지식인들 그리고 그밖의 문화 일꾼들이 그것에 도전하는 데서 담당할 수도 있는 역할에도 초점을 둔다.

클로즈업

나는 언제나 중요한 사회적 쟁점들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한 언어와 맥락 모두를 제공하는 데서 이론이 그 자산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 책의 많은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더 큰 사회적 쟁점들을 연결시키도록 짜여진 것이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이 책을 읽기 시작함으로써 독자는 사적인 문제들을 더 넓은 공적인 문제들과 연결시킬 수 있고 또 그 반대 방향으로 연결시킬 수도 있다.

학교를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한 공공재이면서 비판적 학습과 참여적 시민의식을 위한 실험실로부터 교도소를 본뜬 수용소로 변모시킨 것은 무관용 정책들이란 이름으로 관철되는 권력남용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에서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서 마이애미에서는 한 1학년생이 식탁용 나이프를 학교에 가져가서 동급생한테 점심값으로 1달러를 빼앗는데 썼다는 것이다. 학교 관리들은 그가 “퇴학이 가능하며 무장한 강도의 죄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04년 12월에 발생한 다른 예에서는 필라델피아 초등학교의 4학년생이 교실에서 끌려나가 수갑이 채워지고 경찰서로 인계되어 8시간 동안을 있었다. 8인치 짜리 가위를 학교에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그 여학생은 학교숙제를 하는 데 그 가위를 사용해 왔다. 학교의 구역관리들은 그 소녀가 가위를 무기로 사용하거나 누군가를 위협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펜실바니아 주 법률에서는 가위는 잠재적인 무기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의심스러운 사회 속의 청년층은 독자들에게 청년들이 직면한 위기에 관하여 비판의 언어를 제공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 이상을 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독자들에게 가능성의 언어를 제공한다. 교육, 권력, 그리고 정치가 청년들에게 그리고 열망하는 민주주의를 위해 대안적이고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는 데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도록 독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의 다른 관념, 곧 미래를 현재의 반복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현재와는 큰 편차가 있는 것을 동시에 상상할 수 없다면 어린이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경제적 불확실성과 정치적 가능성의 현재 순간에 교육자들, 예술가들, 지식인들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길들이는 병영화와 경제적 다윈주의의 문화가 – 그 상품화, 수용, 잔인성과 야수화의 정책들을 가지고서 – 어떻게 지난 30년간 미국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만들어내고 얻어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엄격한 분석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도전이 새로운 정치 양태를 개발하고 희망과 상상의 미래가 그 안에서 민주주의 자체는 아닐지라도 모든 청년들의 운명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교육의 형태들을 띄워주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억압과 누그러질 기미가 없는 착취의 참을 수 없는 풍토하에서 청년들과 유색인 공동체들은 정의, 자유, 사회적 시민의식 그리고 민주주의를 상대로 한 계속되는 전쟁에서 새로운 희생자들이 되어 왔다. 내가 희망하기는 의심스러운 사회 속의 청년층이 청년층의 현재의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비판적 어휘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나는 또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생명이 경시되고 시장이 정치를 주도하며, 자원과 기회를 갖지 못한 자들이 불필요하고 궁극적으로는 처분이 가능한 존재들로 생각될 수 있는 그런 형태의 삶 정치를 거부하고 집단적으로 이에 맞서 싸우도록 설득하기를 희망한다.

여기에는 더 커다란 쟁점들이 걸려 있다: 이전 세대들에게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게나마 이용할 수 있었던 자원과 기회가 없는 저 젊은이들을 나라는 얼마나 더 오랫동안 무시할 수 있는가? 한 나라가 그 정년층에게 희망과 기회가 있는 미래를 더 이상 제공하지 않을 정도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상상력에서 얼어붙게 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다양한 공적 영역들에 살고 있는 지식인들이 입장을 취하고 집단적 문제는 집단적 해결책을 써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환기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위험에 처한 것은 지금 범죄 혐의자들의 세대로 간주되는 청년과 성인들의 세대만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깊어지고 넓어질 가능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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