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문화과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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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문화과학이야!
  • 류기석
  • 승인 2009.09.26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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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의 잣대로 바로보는 과학이 중요

과학, 오래된 새길을 찾아서

지금까지 우리 과학이 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해 평가되지 않았다. 이에 각 민족의 독특한 과학을 서양식의 절대적기준으로 평가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우리의 잣대로 재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서적의 대량 인쇄·유통을 통해 지식과 정보의 확산을 가져왔고, 이는 곧 종교개혁와 과학혁명으로 이어져 유럽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인도 감탄한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200여 년이나 앞섰지만 인쇄기술의 기업화, 즉 자본주의화를 이뤄내지 못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 최첨단 전자현미경에 의한 표면분석 ⓒ 류기석

그런데 요즘 최첨단의 과학기술로 자본화를 이른 우리사회의 희망은 있는 것인가. 언론과 방송사에서 쏟아내는 상업적인 광고와 함께 첨단과학의 우수함이 앞을 다투어 보도되고 있다. 이는 전문가들의 사실적인 이미지들과 표현들에 의하여 포장되어 미래사회의 지속성을 강조하며 현실적인 위기상항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듯 보인다.

생태적인 환경과 살림문화에 대한 정직한 학문의 연구와 개발보다는 편리성과 효율성을 앞세운 자본축적의 부도덕한 연구개발에 더욱 열을 올리며, 떠들썩하게 홍보한다. 홍보에 의한 막대한 예산은 서둘러 집행되고, 이에 대한 개발사업들이 앞을 다투어 시행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결과들이 쌓이지만 정작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연구사업들은 몇몇에 불과하다.

그 결과라는 것들도 천천히 인문 사회적, 철학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판단하고 여과하는 기능이 없이 고스란히 현실의 생활에 녹아든다. 그러기에 우리사회의 공동체문명은 현대의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빠른 속도의 모순과 위기구조에 놓여 끝없이 달려가고 있다.

2005년 초부터 최대의 뉴스는 단연 온 국민을 희망으로 들썩이게 했던,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이다. 생명의 위기에 있는 수많은 환자들을 구원할 획기적인 의생명공학처럼 여겨졌으나, 결국에는 2005년 12월 16일(금) '추악해지는 황우석 파동... 국민들 고통스럽다'(이데일리)라는 카피문구로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현재 과학은 우리사회 모든 구성원리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를 지키지 않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기서 지금의 문화가 서양문화이고 이의 기본적 구도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합으로 통상적으로 알고 있으며, 근대의 서양문명은 고대유럽의 과학정신과 기독교와의 결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과학이란 진리를 추구하고, 정신은 외부세계를 탐구하고 여태까지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기독교란 사랑을 기본 선으로 추구하며, 신앙은 인간가치를 존중하고 사회적인 갈등을 조정한다. 이는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지금의 시대를 유지시켜온 힘이다. 그러나 서양문명의 양대 축은 서로가 모순 된 구조로 결정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순은 계몽주의 이전 기독교 교리를 벗어난 과학자 코페루니쿠스와 갈릴레이 등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학자들이 무조건 이단으로 내몰리는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은 종교가 과학에 대한 억압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종교를 앞서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문명의 기본구조를 와해시킴이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에 동의한다.

첨단과학기술이 인간적 생명가치의 증대보다는 오히려 전쟁무기나 다국적 자본의 금융축적을 위한 전략적 신상품연구와 개발이 발전동기가 되어, 끝없는 자본축적에 대한 전략적 수단이 되었다. 이는 조화로운 사회에 균형을 잃게 하는 변화를 가져와 높은 실업율과 거대자본에 의한 생명경시풍조, 핵의 위협과 각가지 암발생과 화학적으로 오염된 생태계는 물론 인간자체의 삶에도 심각한 위기를 주었다. 이제는 과학이 행복과 희망을 주기보다는 불행과 공포의 대상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의 천경과 신고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서로간의 상생의 공생공존의 평화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사회가 좀더 성숙한 지(地) 애(愛)의 모습으로 서구문명을 하나하나 검증하고 몸으로 체득하여 도덕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 비종교적인 인문사회주의에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쯤에서 동양적인 과학기술사상 단편을 장자(莊子) 천지(天地)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남쪽 초(楚)나라에 놀러 갔다가 한음(漢陰)이란 땅을 지나게 될 때에 한 노인이 채소밭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노인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만들고는 그 통로로 들어가 항아리에다 물을 길어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적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자공이 도르래를 사용해서 물을 푸라고 충고하자 그 노인은 화를 내며, 기계(機械)를 사용하면 기심(機心)이 생기고 기심이 생기면 순백(純白)한 마음이 없어져 도(道)가 사라진다고 하면서 자기는 기계를 사용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사용함을 부끄럽게 여겨 사용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고사(故事)다.

동양은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관계의 망을 인문주의적인 가치로 채워져 있음이다.

17세기 서양의 자연과학자와 사상가인 데카르트, 갈릴레이, 뉴튼, 베이컨 등에 의해 확립된 서구의 근대적 자연관은 세계에 대한 기계론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와 물질의 무한함을 인정하는 이념들이 자연의 수탈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사상은 고려중기 이규보만 하더라도 만물이 근원적으로 평등함을 자연철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지혜의 차원이라 했고, 17세기 홍대용의 자연관은 인간과 물(自然)의 조화와 공생을 중요시하는 이념을 강조했다.

박지원은 홍대용과 마찬가지로 인과 물이 다같이 만물중 하나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김시습의 사상은 자연철학과 사회철학은 물론 정치철학까지도 아우르고 있다. 이는 인과 물의 근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삶이 물의 삶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통찰했다.

수운 최제우는 동학사상을 통하여 "인간 존중의 인내천(人乃天)을 근본이념으로 종교와 정치의 혼연일체를 지향하면서,‘한울님’은 우주 만물을 낳으신 초월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만물 속에 내재해 있으면서 무궁한 생성, 변화와 그 조화를 주재하고 있는 존재"라고 했고, 이러한 "하늘의 조화는 자연계와 모든 생명, 그리고 우주 만유의 끊임없는 생성 변화와 그 질서를 주재하는 진리와 하나 되어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이다"라고 했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와 전통사상 속에는 함부로 과학과 기술을 남용하여 자연을 학대하거나 파괴하지 않은 심성이 있었다. 무조건 부의축적이나 남의 것을 탐하는 욕심으로 사회적인 조화와 균형을 잃어 본질적인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 본다. 미래는 오랫동안 내려온 역사와 전통문화 속에 내재되어 아직도 생활습성으로 곳곳에 남아 있다.

아무리 개혁과 변화가 세상으로부터 온다 해도 내 마음과 생활이 정직한 역사와 자연을 온전히 깨닫지 않고서는 어떠한 일도 아름답게 지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쯤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너희는 두 주인으로 못 섬긴다.’는 말이 생각나는 것은 하나님보다는 돈의 가치를 사랑해온 결과로 현대사회의 과학이요 문명이지 싶다.

나와 가족들 그리고 우리 이웃들이 재촉하는 발길은 미래과학이 이룩할 편리성에 대한 환상내지는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적 행복이다. 매일 매일을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외형적인 꾸밈에 만족하는 사치의 길로 바쁘게 오고가면서 무의식적으로 많이 벌자, 갖자, 늘리자, 배우자, 쓰자 그리고 버리자 라는 식의 초국적기업의 CF광고가 현대문명의 꽃이다. 이러한 행복은 무엇이며, 어디서오는 것인가. 이제 하나하나 겉껍데기를 벗어 생명의 좁은 길로 가기위한 올바른 선택의 시간이 된 것 같다.

대량생산과 소비적인 구조는 서툰 노동력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착취를 요하며, 사람을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현재 삶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천연자원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도 고갈시키고 오염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본성을 무시한 이용과 착취는 사람을 기계로 보는 현재의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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