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검이 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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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검이 뭐야 !
  • 김민수
  • 승인 2012.11.1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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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과 도교의 우주관 담아

동대한해(East Korea Sea) 서대한해(West Korea Sea) 남대한해(South Korea Sea) 동대한해(East Korea Sea) 서대한해(West Korea Sea) 남대한해(South Korea Sea)

일본 정부가 대한국령(大韓國領:Korean territory)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Dokdo) 사이에 국제법적으로 불법적인 국경선을 임의로 획정하고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불법적으로 표기한 왜곡 교과서를 검정 승인하고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대한국(大韓國) 영토 주권을 침해하는 외교청서,방위백서를 재발간하였지만 독도(獨島:Dokdo)는 1897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대한국(大韓國)을 건국한 이후 115년간 대한국령(大韓國領)이다. 일본 정부의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표기한 외교청서,방위백서 재발간,각급학교 교과서의 검정 승인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에 대한 재침략 도발이므로 즉각적인 대한국(大韓國) 영토 주권 침해의 시정을 촉구,지도에 동대한해(East Korea Sea) 서대한해(West Korea Sea) 남대한해(South Korea Sea)로 표기하고 국제수로기구(IHO)에 대한국령(大韓國領:Korean territory) 대한해(大韓海)의 Sea Of Korea 단독 표기를 요구해야 한다.독도(獨島)는 동도(東島), 서도(西島) 2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졌으며 동도의 면적은 7만3297㎡이고, 서도의 면적은 8만8639㎡로 서도의 면적이 조금 더 넓다. 독도(獨島)는 우산도(于山島), 자산도(子山島), 삼봉도(三峰島), 요도(蓼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던 대한국의 고유한 영토이다. 신라국 지증왕 13년(512)에 이사부(異斯夫)가 울릉도와 우산도, 죽서도(竹嶼島), 관음도를 아우르는 우산국(于山國)을 편입한 이래로 대한국의 영토가 되었고 조선국 초기에는 독도를 우산도ㆍ요도ㆍ삼봉도 등으로 불렀으며 세종실록에는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의 부속 도서를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로 하였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우산도를 울진현 소속으로 기록하였다. 성종1(1470)년에 함경도 영흥(永興)에 사는 김자주(金自周)가 섬을 관찰해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삼봉도(三峰島)라 불렀다. 조선국(朝鮮國) 3대 국왕 태종 대에 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워 두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취했다.

조선국(朝鮮國)의 공도정책(空島政策)의 틈을 이용하여 일본의 어부들이 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Dokdo)에서 불법적으로 고기를 잡아가자 안용복(安龍福)은 40여 명을 이끌고 울릉도,독도(獨島:Dokdo)에 들어가서 일본 어부들을 몰아내고 일본까지 가서 일본 막부(幕府)로부터 다시는 울릉도에 오지 않겠다는 약속과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Dokdo)가 조선국(朝鮮國) 영토라는 서계(書契)까지 받아 왔다. 조선국(朝鮮國)은 독도를 자산도(子山島)라고 불렀으며 3년마다 관리를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하였다. 정조18(1794)년에 수토관(搜討官)으로 파견되었던 한창국(韓昌國)은 독도를 가지도(可支島)라고 부르고 바다사자인 가지어(可支魚)를 잡아 왔다. 1899년 12월 15일 내부 대신(內部 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아뢰기를 “울릉도(鬱陵島)를 개척한 지 여러 해가 되어 호구가 늘어나고 토지가 점점 개간되는데 시찰위원(視察委員)을 임용하여 해도(該島)에 가서 일체 정형을 자세히 조사하는 동시에 주민들을 안착시키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돌보아주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大韓帝國) 칙령 41호(勅令 四十一號)를 제정하고 대한제국이 독도(獨島:Dokdo)의 주권국임을 전세계에 공포하였다. 대한제국 칙령 41호는 울도(鬱島:울릉도)군의 관할 구역을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ㆍ석도(石島:독도)로 규정하고 있으며 죽도(竹島)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竹嶼島)이고 석도(石島)가 독도(獨島)이다. 1906년 울도(鬱島:울릉도) 군수 심흥택(沈興澤)은 우산도라 부르던 독도를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한 공식 문서에서 독도(獨島:Dokdo)라고 처음 사용하였다. 돌섬을 음역하면 독도이며 의역하면 석도(石島)이다. 1909년 11월 대한국(大韓國:Korea)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계승하는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를 표기한 고지도를 상설전시, 교육홍보하고 역사적,국제법적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확립하여 대한국(大韓國:Korea) 115년 역사를 바로세우고 일본 정부의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대한국(大韓國)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 및 영토,영해가 1919년 4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계승되었다.1919년 3·1대한광복운동 후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국인 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개원 회의에서 국호는 대한(大韓)으로 정체(政體)는 민주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民國)으로 각각 의결함으로써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탄생을 보았다.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1조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으로 함’이라 천명함으로써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2차 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의정원 의원을 선출했으며 의장은 이동녕, 부의장은 손정도를 선출했다. 의정원은 법률안 의결, 임시 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의정원은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 외무 김규식, 군무 이동휘, 재무 최재형, 법무 이시영, 교통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고 한성에는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연해주에는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9월 상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한반도(韓半島:Korean Peninsula) 제주도 간도(間島) 대한해(Sea Of Korea) 독도(Dokdo) 울릉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대한국(大韓國)의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제주도에서 중국이 이민족국가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건축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남동쪽 간도(間島)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일(統一)했으며 1900년 10월 25일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칙령(勅令) 41호를 공포하여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시킨 울도군(鬱島郡)의 관할 구역으로 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를 포함시키고 대한국 관보를 통해 공포했다. 칙령(勅令) 41호는 울릉도(欝陵島)를 울도(欝島)라 개칭(改稱)하여 강원도(江原道)에 부속(附屬)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改正)하고 울도군(鬱島郡)이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독도)를 관할한다고 명시하였다.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는 일본제국주의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제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한반도(韓半島:Korean Peninsula) 간도(間島)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국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을 점령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甲辰勒約:한일의정서)을 불법 늑결(勒結)하였다.일본제국주의는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대한국령(大韓國領) 독도(獨島)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다.1906년 울도(鬱島) 군수 심흥택(沈興澤)은 독도를 울도군(鬱島郡) 소속이라고 밝혀 독도(獨島)가 대한국의 영토이며 울도군에 소속된 행정관할구역임을 확인하였으며 1907년 현성운(玄聖運)이 제작한 대한전도(大韓全圖)와 현공렴(玄公廉)이 1908년에 제작한 대한제국지도(大韓帝國地圖)에 대한해(大韓海)로 표기하였고 학부(學部)의 검정을 받았다. 일제 총독부가 1910년 8월 대한국(大韓國) 영토를 불법 병탄(倂呑)하고 1929년 대한해(Sea Of Korea)를 일본해로 바꿨으므로 지도에 동대한해(East Korea Sea) 서대한해(West Korea Sea) 남대한해(South Korea Sea)로 표기해야 하며 국제수로기구(IHO)는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4판에 대한국령(大韓國領:Korean territory) 대한해(大韓海)를 Sea Of Korea 단독 표기해야 한다.

가지어(可支魚:강치)는 경상북도 울릉도, 독도(獨島)에 서식한 물개과에 속한 포유동물로 몸길이는 수컷 2.4m, 암컷 2.0m이며 몸무게는 수컷 390㎏, 암컷 110㎏이다. 헤엄치기에 알맞는 평평한 지느러미발을 갖고 있다. 코르크색이며 보통 가슴 부분의 빛깔이 더 진하고 솜털은 없다.수명은 약 25년이며 번식은 연 1회, 1마리를 낳는다. 임신 기간은 11개월이며 출산기는 5~6월이고 양육 기간은 10~12개월이다. 먹이는 어류와 연체동물류 등을 잡아먹으며 도서 및 연안 바위 지대에서 생활하고 계절에 따라 수백 킬로미터 이동하며 번식기에는 도서나 연안 바위 지대에서 출산과 양육을 한다. 수컷은 번식기 이외는 단독생활을 하며 암컷은 새끼들과 함께 집단생활을 한다.울릉도, 독도(獨島)에 사는 가지어(可支漁:강치)에 대해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6월 26일 가지도(可支島)에 가서 보니 가지어(可支漁:강치) 너댓 마리가 놀라 뛰어나왔는데 생김새는 수우(水牛)를 닮았고 포수가 두 마리를 쏘아 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9세기 초반 4만~5만 마리에 이르던 독도 인근 가지어(可支漁:강치)는 1904년 갑진늑약 불법 늑결이후 독도(獨島)에서 157㎞나 떨어진 일본 오키섬 어부들의 남획으로 1950년대 완전히 멸종되었으며 일본이 1904~1956년에 걸쳐 43년간 16,614마리를 남획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대한국(大韓國)의 주권과 한반도와 제주도,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대한해(大韓海) 등 영토,영해를 되찾았으며 1946년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제주도,울릉도,독도(獨島)를 일본에서 분리되는 땅으로 명시한 지령(SCAPIN) 677호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1948년 8월 15일 서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체만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전환하고 국호 및 영토를 계승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는 1952년 대한민국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인 독도(獨島)를 포함하는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을 선포하고 1954년 독도(獨島) 남동쪽 암벽에 ‘韓國領‘과 태극기(太極旗)를 새겨놓았고 등대를 설치하였으며 1982년 독도를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하였다.국제수로기구(IHO)는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에 대한국령(大韓國領:Korean territory) 대한해(大韓海)의 Sea Of Korea 단독 표기를 환원하고 지도에 동대한해(East Korea Sea) 서대한해(West Korea Sea) 남대한해(South Korea Sea)로 표기하여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朝鮮)을 침입(侵入)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난리를 피해 평안도 의주로 몽진(蒙塵)하였던 조선 14대 국왕 선조가 한성(漢城)으로 환도(還都)한 후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를 국왕의 시어소(時御所)로 쓰면서 궁(宮)이 되었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한 후 15대 국왕 광조(光祖)가 이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면서 궁호(宮號)를 경운궁(慶運宮)으로 명명(命名)하였다.1897년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0월 12일에 백악(白嶽:북악산)의 남쪽 황단(皇壇)에서 천제(天帝)에 고유제를 올리고 대한국(大韓國)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 등극하며 천하에 국호(國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을 삼는다고 천명하여 조선시대에 이어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었다. 1895년 이토 일본 총리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에 살해된 왕후 민씨(閔氏)를 대한국(大韓國)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였으며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황태자(1919년 1월 고조 광무제 붕어(崩御) 후 2대 황제 등극한 순종 융희제)가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進致詞儀),문무백관들이 황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賀表儀)를 비로소 거행하였고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였다.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종묘를 태묘(太廟)로,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격상하여 개칭하였으나 일본 제국주의 통감이 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킨 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부정하며 황태자에게 조선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하고 대한국(大韓國) 황궁 경운궁(慶運宮)을 조선시대에 상왕의 궁에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일반 궁호로 격하시켰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는 을사늑약의 불법 늑결로 1906년 일제의 통감통치가 시작된 후 1907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조 광무제가 황태자(2대 황제 순종 융희제)에게 조선국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한 뒤 덕수궁(德壽宮)에 임어하였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편전 겸 침전으로 사용된 서양식 근대건축물 덕수궁(德壽宮)은 대한제국 황실 궁내부가 1900년 착공하고 1909년 완공해 1919년 1월 붕어시까지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전각으로 사용하였고 덕수궁(德壽宮) 1층은 상궁 처소·주방, 2층은 접견실·귀빈실, 3층은 침실·욕실 등 고조 광무제의 공간이다. 덕수궁(德壽宮)은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고문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영국인 기사인 하딩이 설계하고 건축 기사 심의석(沈宜錫)이 전체적인 공사를 감독했으며 1904년 이후 영국인 데이비슨이 덕수궁(德壽宮) 공사 감독을 맡았다. 완벽한 좌우 대칭의 덕수궁(德壽宮)은 고전주의 양식을 채택하였으며 이오니아식 기둥이 상부를 떠받치고 있다. 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 군대 강제 해산 후 황태자의 대리청정은 일본 통감의 강박에 의한 것이며 대한국 황제 고조 광무제는 대한국 황궁 경운궁(慶運宮)에 1919년 붕어(崩御) 시까지 임어(臨御)하였고 황태자와 친일 내각(작위,은사금)이 조선 왕궁 창덕궁으로 옮겨 간 것이며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강탈당한 나라도 대한국이고 1945년 일본(日本)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한 나라도 대한국(大韓國)이므로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 궁호(宮號)의 환원은 완전한 대한 광복을 위한 역사적 당위이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는 일본의 대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한반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국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甲辰勒約:한일의정서)을 불법 늑결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독도(獨島)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국을 강제 병탄(倂呑)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 9일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하여 일본군을 앞세워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불법 늑결을 대한국 정부에 강요했으며 11월 18일 불법 늑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대한국의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통치자가 일본 통감이라고 규정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한 여러 사무를 관장한 일본 통감은 일왕에 직속하고 외교는 일본 외무대신을 거쳐 내각 총리대신을, 기타 사무는 내각 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고 재가를 받게 되었고 일본 통감은 대한국의 일본 관리 및 관청이 시행하는 업무를 감독하고 한국 수비군 사령관에 대하여 일본군(日本軍)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었다.1906년(광무 10) 2월 1일 일본제국주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여 한국 수비군을 통수하는 원수의 자격을 겸임,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전시 편제 일본군(日本軍)을 주둔시키고 경찰기구도 강화시켜 나갔다. 일본인 경찰고문이 5명에서 678명으로 급격하게 늘었으며, 경찰 수도 1,851명에 이르게 되었고 헌병대도 강화시켜 경술늑약(庚戌勒約) 불법 늑결, 대한국 불법 병탄(倂呑) 이후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반을 이루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 불법 늑결, 일제 통감부(일제 총독부 전신) 설치 이후 대한국 국권 회복을 위한 한민족의 저항이 대한독립운동·계몽운동과 같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었으며 대한국 고조 광무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 반일 상소, 자결이 계속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불법 늑결 후 1906년 설치된 일제 통감부가 1907년 헤이그 특사 처벌,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大韓國) 군대 강제 해산시킨 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부정하며 일제 통감이 황태자에게 조선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하고 경운궁(慶運宮)을 조선시대에 상왕들의 궁에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일반 궁호로 격하시켰으므로 문화재청은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 궁호(宮號)를 환원, 재지정해야 한다.1907년 일제 통감이 황태자에게 조선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한 후 반일 정미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일본제국주의 통감은 대한국(大韓國)을 불법 병탄(倂呑)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황태자에게 지방을 순행(巡幸:일제 통감부의 정치선전 쇼)하게 하며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 대리청정기간은 고조 광무제의 치세(治世),일제 통감부의 강박에 의한 것)이 아닌 황태자의 2대 황제(1919.1-) 즉위(고조 광무제가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한 것을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이 황제 양위로 조작)로 왜곡,선전하였다. 1623년 16대 국왕 인조가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으며 1897년 2월 20일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대한국 황궁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대한국 황궁(皇宮)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0년 궁장(宮墻) 공사가 완성되고 1901년 경운궁과 경희궁,경운궁과 의정부(議政府)를 연결하는 운교(雲橋)가 가설·개통되었으나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殿閣)이 소실되었고 1905년 태극전(太極殿)·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경운궁(慶運宮)은 경희궁 사이에 후원(後苑) 상림원(上林苑)과 궁장(宮墻), 북쪽에 평장문(平章門)과 포덕문(布德門), 영국 공사관 쪽에 생양문(生陽門), 서북쪽에 영성문(永成門),회극문(會極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서남쪽에 용강문(用康門), 동쪽에 대안문(大安門), 남쪽에 인화문(仁化門)의 대문이 있으며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고조(高祖) 광무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고조 광무제가 등극한 태극전(太極殿), 편전 덕홍전(德弘殿),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접견실·연회장 정관헌(靜觀軒),고조 광무제의 접견실 구성헌(九成軒),환벽정(環壁亭),황태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돈덕전(惇德殿), 고조 광무제의 침실과 접견실 덕수궁(德壽宮)(연지(蓮池),명성황후의 혼전(魂殿) 경효전(景孝殿),태조 고황제의 어진을 봉안한 흥덕전(興德殿),순명황후(純明皇后)의 혼전(魂殿) 의효전(懿孝殿),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가 붕어한 석어당(昔御堂), 고조 광무제가 외국 사절을 접견한 준명당(浚明堂),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 대한국 황실 사무와 근대적 광무개혁을 추진한 궁내부(宮內府),최고 군통수기관 원수부(元帥府)가 있다.

태묘(太廟) 태묘제례(太廟祭禮)

태묘제례(太廟祭禮)는 대한국(大韓國) 황제와 황후의 신위를 봉안한 황실 묘궁(廟宮) 태묘(太廟)에서 봉행하며 태묘제례악(太廟祭禮樂)에 맞추어 진행된다.태묘(太廟) 정전에는 대한국 태조 고황제부터 순종 융희제에 이르기까지 19실(室)의 신위를, 별전(別殿)인 영녕전에는 16실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정전(正殿)은 서편을 위로하여 1실이 있고 19실이 동편 끝에 있으며, 영녕전에 목조,익조,도조,환조 등 태조 고황제 위의 4대조 신위가 있다. 대한국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황태제 의친왕을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시대(大韓時代) 대한광복운동기에 민족자결 국제정세를 인식하고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영친왕 신주를 천위(遷位)해야 한다. 부묘(祔廟)시에 선황제(先皇帝) 신위에 배알(拜謁)하는 부알판위(祔謁版位)는 태묘 정전의 신문(神門)에서 정전으로 들어가는 부묘(祔廟)할 때 신주를 봉안하여 모시는 신로(神路)의 중간 쯤의 동쪽에 있는 사각의 검은 전돌을 깐 판위이며 3년상을 치룬 황제나 황후의 신주(神主)를 모신 가마 신여(神輿)를 잠시 주차하고 부알례(祔謁禮)를 봉행하던 판위이다. 태묘 정전의 신주장에 이미 봉안되어 있는 태조 고황제 이하 모든 신주들을 신실 앞에 있는 신탑 위에 꺼내 놓고 부알판위(祔謁版位)에서 태묘 정전에 먼저 부묘(祔廟)한 선황제들에게 부알례(祔謁禮)를 봉행한 후 밤나무 신주 율주(栗主)를 정전에 모시는 의식을 행한다.

태묘제례(太廟祭禮)는 춘하추동 4시(四時)와 12월 납일(臘日)에 봉행하였으며 영녕전(永寧殿)은 태묘(太廟) 정전과 더불어 향사(享祀)하였다.제향(祭享)은 대한국(大韓國) 황제가 직접 행하는 친행(親行)과 대신으로 대행하게 하는 섭행(攝行)이 있으며 친행과 섭행은 제관의 명칭과 품계(品階) 또는 축문(祝文)이 다르다. 절차는 홀기(笏記)의 창홀(唱笏)에 따라 진행되고 제기(祭器)는 63기가 있으며, 제물(祭物)은 소, 돼지, 산양의 3생(三牲), 2갱(二羹), 서직도량(黍稷稻梁), 2제(二齊), 3주(三酒), 6과(六果), 6병(六餠), 2포(二脯), 4해(四醢), 4조율료(四俎率膋), 돼지 머리털을 몇 가닥 뽑고 염통의 피를 조금 뽑아 넣은 모혈(毛血)을 쓴다. 제수(祭需)는 매우 엄격하고 정성스럽게 차려졌으며 곡식이나 고기는 날 것을 그대로 올린다. 날 것과 맨국을 쓰는 것은 불을 이용하지 않은 선사시대에 생식을 하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례는 제관이 정해진 자리에 서는 취위(就位)·영신(迎神)·신관((晨課:강신)·진찬(進饌)·초헌(初獻)·독축(讀祝)·아헌(亞獻)·종헌(終獻)·음복(飮福)·철변두(撤籩豆)·망료(望燎) 순으로 진행된다.

대한국(大韓國) 황제의 제복(祭服)은 면류관(冕旒冠)과 12장복(十二章服)으로 이루어진 12장면복(十二章冕服)을 착용하였는데, 면류관은 9류(九旒)를 늘어뜨리고 오채옥(五彩玉)을 꿰었다. 면류관의 모(帽) 위에 장방형 판은 짙은 흑색, 안은 홍색이며, 앞뒤에 황·적·청·백·흑·홍·녹색의 주옥(珠玉)으로 구슬줄을 황태자는 9류ㆍ황제는 12류(十二旒)씩 매달고 관 위에는 옥잠(玉簪)을 꽂았다. 9장복은 겉은 흑색, 안은 청색으로 한 대례복(大禮服)으로 상의(上衣) 양 어깨에는 용(龍)을 수놓고, 등에는 산(山), 양쪽 소매에 화(火:불꽃무늬), 화충(華蟲:꿩), 종이(宗彛:술 그릇)가 각 3개씩 들어가며, 하의(下衣)에 초(藻:수초), 분미(粉米:쌀), 보(黼:도끼), 불(黻:亞자 무늬)가 새겨진다. 1897년 고조(高祖)가 대한국(大韓國) 1대 광무제에 등극하고 제정한 12장복은 9장복에 일(日), 월(月), 성신(星辰)이 추가되었다. 황제관은 12류면(十二旒冕)이 되었고 황태자관은 9류면(九旒冕)이 되었다.

대한시대(大韓時代) 원년(元年)은 1897년

1897년 9월 26일 대한국(大韓國) 외교 사무를 담당한 외부(外部) 협판(協辦) 유기환(兪箕煥), 충청도 무위무관(無位無官)의 유생(儒生)인 유학(幼學) 심노문(沈魯文) 등이 황제(皇帝:emperor)로 칭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9월 28일 황태자궁 시강원(皇太子宮侍講院)에서 황태자(皇太子)의 교육을 담당한 시독(侍讀) 김두병(金斗秉)이 칭제(稱帝)를 주청하였다.9월 29일 김규홍(金奎弘)이 천제(天祭)를 봉행할 제천단(祭天壇) 황단(皇壇)을 설치할 장소를 택정(擇定)할 것에 대해 간심(看審)하겠다고 아뢰었다.김재현(金在顯)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連名)으로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다. 9월 30일 시임 의정(時任 議政)과 원임 의정(原任 議政) 이하가 칭제(稱帝)를 주청하였고 진사(進士) 이수병(李秀丙) 등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였다.10월 1일 황단(皇壇)을 설치할 장소를 간심(看審)하였다. 심순택(沈舜澤) 등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황제로 칭할 것을 아뢰었다.10월 2일 승지(承旨) 김선주(金善柱) 등이 상소를 올려 칭제(稱帝)를 청하였다.10월 3일 심순택 등이 정청(庭請)하여 다시 황제라고 부를 것을 아뢰었다.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 이하가 황제국(皇帝國)의 제도에 대해 아뢰고 황제위에 등극(登極)하고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추책(追冊)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는 날짜를 정하였다.

10월 7일 즉조당의 편액(扁額)을 태극전(太極殿)으로 격상하였다. 대한국(大韓國) 황실 사무를 총괄한 궁내부(宮內府) 관제 가운데 황단 사제서(皇壇 司祭署) 증치(增置)를 반포하였다.10월 8일 사직단(社稷壇)의 위판(位版)의 국사(國社), 국직(國稷)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격상하였다. 대한국(大韓國) 고조(高祖)는 10월 12일에 백악(白嶽:북악산)의 남쪽 황단(皇壇)에서 천제(天帝)에 천제(天祭)를 올리고 대한국(大韓國)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 등극하며 천하에 국호(國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이 해로써 광무(光武) 원년(元年)을 삼는다고 천명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어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었다. 1897년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황제위에 등극하기 전 대신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국호(國號)를 의논하고 제후국에서 황제국(皇帝國)으로 국격이 격상되어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며 모든 예가 다 새로워졌으니 황단(皇壇)에 첫 천제(天祭)를 봉행하는 지금부터 새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하며 우리나라 대한국(大韓國)은 상고시대 3한(三韓:고구려,백제,신라)의 영토에서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고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므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황제(皇帝)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으므로 조선(朝鮮)은 황제국(皇帝國) 국호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大韓)은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쓴 적이 없고 한(韓)이란 이름은 고유한 우리나라의 이름이며 고구려·백제·신라의 3한(三韓)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니 대한(大韓)을 국호로 한다. 국호(國號)를 3한(三韓)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의미의 ‘대한(大韓)’으로 정해져 황단(皇壇)에서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대한(大韓)’으로 썼다. 단군(檀君) 이래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국(高麗國)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신라의 3한(三韓) 영토를 통일(統一)하였다. 태조(太祖) 고황제가 용흥(龍興)하여 밖으로 개척한 영토가 더욱 넓어져 북으로 말갈(靺鞨:간도)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 탐라(耽羅: 제주도)을 거두어 탐라에서 귤과 풍부한 해산물을 공(貢)하였고 탐라(耽羅: 제주도)에서 말갈(靺鞨: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이르는 영토를 통일(統一)하는 업(業)을 세우셨다. 산하가 공고하여 복(福)을 우리 자손만세(子孫萬歲) 반석의 종(宗)에 드리셨고 상제(上帝)께서 위태함을 돌려 평안(平安)함을 갖게 하고 독립(獨立)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自主)의 권리(權利)를 행하게 하셨다.

10월 12일 대한국(大韓國)의 주권자(主權者)이며 천제(天帝)의 아들 천자(天子)인 황제(黃帝)의 자리에 등극하고 왕후 민씨를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고 산호만세(山呼萬歲) 등을 창하였다.10월 13일 황태자가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進致詞儀),문무백관들이 황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賀表儀)를 거행하였고 칙서(勅書)를 반포하여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으며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였고 대시령(待時令)을 내려 중죄인들의 죄를 가볍게 해주었다.10월 14일 태극전(太極殿)에 나아가 명헌태후(明憲太后)에게 옥책과 금보를 올리고 왕태자비 민씨를 황태자비(순명황후)로 책봉하였다.10월 16일 대한 황실 사당 태묘(太廟)에 삭제(朔祭)를 지낼 때 헌종실과 철종실에 대한 칭호를 정하였다.10월 20일 태묘(太廟)의 남전(南殿), 경기전(慶基殿),조경묘(肇慶廟), 준원전(濬源殿), 선원전(璿源殿), 화령전(華寧殿)의 기물들과 의장들은 천자(天子)의 의식 절차대로 쓰되 고친 것에 대하여 고유하는 절차는 장례원(掌禮院)에서 택일하여 시행하게 하였다.11월 21일 인화문(仁化門) 밖에 나아가 곡하고 영결(永訣)하였으며 황태자(皇太子)가 따라가 하직하였고 산릉(山陵)에 나아가 밤을 지새는 경숙(經宿)을 하였다. 12월 2일 고조 광무제가 대한국 황제(皇帝)에 즉위한 날을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로 칭하였다.

공녀(貢女) 환향녀(還鄕女)

공녀(貢女)는 조선국이 명나라의 요구로 뽑아 보낸 처녀이다.명나라는 1408년(태종 8)부터 1521년(중종 16)까지 거의 10여 차례 환관(宦官)과 함께 공녀(貢女)를 요구하였다. 1521년(중종 16) 명나라의 새 천자가 등극한 것을 축하하는 하등극사(賀登極使)로 홍숙(洪淑)을 보낼 때 공녀(貢女)의 철폐를 명나라에 요구하여 공녀의 요구가 사라졌다.환향녀(還鄕女)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쟁 중 적에게 강제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이며 정절(貞節)을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이혼 청구를 받은 여성들이었다. 환향녀(還鄕女)의 남편들이 이혼을 청구할 경우에는 먼저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선조 대에 환향녀(還鄕女)의 남편들이 집단으로 국왕에게 이혼을 청구했다. 선조는 “이혼을 요청한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환향녀(還鄕女)들이 절개를 잃은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이혼 청구를 거절했지만 환향녀(還鄕女)의 남편들은 모두 첩을 얻어 부인을 멀리했다.환향녀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도 많이 발생했다.평안도 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미인이 많아 벼슬아치나 양반의 처까지도 끌려갔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 중 많은 돈을 주고 돌아온 여자들은 환향녀(還鄕女)로 불리면서 치욕을 감수해야 했고 환향녀(還鄕女)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아야만 했으나 인조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라상(水刺床)

조선 국왕은 6시 이전의 이른 아침에 먹는 초조반(初朝飯), 아침 수라(水刺), 점심의 낮것상과 저녁 수라(水刺), 밤중에 내는 야다소반과(夜茶小盤果) 등 총 5차례의 식사가 있었으며 조선 국왕은 아침 수라(水刺)는 오전 9시경에 저녁 수라(水刺)는 오후 5시경에 먹었다. 수라상(水刺床)은 주칠(朱漆)을 한 호족반(虎足盤) 2개, 네모난 책상반의 총 3개로 구성되며 국왕이 수라(水刺)를 드실 때는 대원반(大圓盤) 앞에 앉고, 소원반(小圓盤)에는 기미상궁(氣味尙宮)이 앉아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를 확인하는 기미(氣味)를 보고 네모난 책상반에는 전골 상궁이 전골 시중을 들며, 수라 상궁이 음식 시중을 든다.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인 기미(氣味)는 경험이 많은 큰방 상궁이 하는데 기미상궁(氣味尙宮)이 곁상에 놓인 빈 공기나 접시에 여벌의 은수저를 사용하여 음식을 조금씩 덜어 국왕의 면전에서 맛 본 후에 국왕이 수라(水刺)를 들게 되어 있었다.수저는 은수저가 쓰였는데 은은 독이 닿으면 검정색으로 변색이 되므로 미리 국왕의 위해를 막을 수 있었다.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은 주칠합에 담아 옮겼으며 반찬을 담는 그릇은 철에 따라 달리 썼다. 추운 계절인 추석부터 다음 해 단오 전까지는 은 반상기를 쓰고, 더운 철인 단오부터 추석까지는 사기 반상기를 썼다. 수라상(水刺床)은 수라, 탕, 찌개, 찜, 전골, 침채, 장류와 반찬 12 종류로 이를 12첩 반상(飯床)이라 한다. 수라는 흰 밥인 백반과 팥 삶은 물로 지은 찹쌀밥인 홍반 2가지를 밥그릇에 담고, 탕은 미역국과 곰탕 2가지를 탕기에 담아 올렸고 찌개는 토장찌개와 젖국찌개 2가지를 준비하고 찜, 전골, 침채 3가지가 기본 음식이며 청장, 고추장, 초고추장, 겨자집 등이 종지에 담아 올린다. 쟁첩에는 12가지의 반찬이 담겨지는데 더운 구이(육류, 어류의 구이나 적), 찬 구이(김, 더덕, 채소의 구이나 적), 전유화(육류, 어류, 채소류의 전), 삶은 편육, 익힌 숙채, 생채, 육류, 어패류, 채소류의 조림, 장과(짱아찌, 갑장과), 젓갈, 포, 자반, 튀각 등 마른 찬, 회(육, 어패, 채소류의 생회와 숙회), 찬수란(수란 또는 다른 반찬), 차수(숭늉 또는 곡물차)등을 올렸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죽이나 미음으로 허기를 달래는 상을 초조반(初朝飯)이라고 불렀다. 조선 국왕은 매일 보약을 먹었고 보약을 먹지 않을 때는 죽, 미음 등을 먹었으며 어포, 육포, 암치, 북어보푸라기, 자반 등의 마른 반찬 2-3 가지와 소금, 꿀, 청장,국물김치,맑은 찌개가 함께 내어졌다. 수라상(水刺床) 외에 낮에는 간단히 낮것상이라 하여 가벼운 점심을 먹었다. 명절에는 면상인 장국상을 차렸는데, 온면, 냉면 또는 떡국이나 만두 중 한 가지를 차리고 편육, 회, 전유화, 신선로, 나박김치, 장김치, 동치미 등을 놓았다. 궁중에서 차리는 화려한 야식상인 야다소반과(夜茶小盤果)는 채만두, 전유어,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숭어, 해삼, 전복을 한꺼번에 끓여낸 별잡탕(別雜湯), 편육, 각색병, 각색당, 여러 과일이나 인삼, 도라지, 연근, 무, 생강 등 식물의 뿌리를 설탕,물엿, 꿀 등을 넣어 조려내어 만든 각색정과(各色正果), 만두과, 꿀, 면, 약식, 식혜, 우유죽 등을 놓았고 밤늦은 시간의 주안상(酒案床)에는 다과상(茶菓床)에 떡, 과자, 음청류(飮淸類), 안주류와 면 등의 음식이 차려졌다. 

금천교(禁川橋)

금천교(禁川橋)는 궁궐 정문 안 명당수 금천(禁川) 위에 만들어진 돌다리이다.경복궁 영제교(永濟橋)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禁川)에 설치된 다리로 근정전 앞에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다.교각은 홍예(虹霓)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감시하고 있다. 창덕궁 금천교(錦川橋)는 태종 11년(1411년)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궁궐에 남아있는 금천교(禁川橋)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금천교(錦川橋)의 네 모서리에 산예(山猊)라 하여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동물들이 조각된 것도 금천(禁川)의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창경궁 옥천교(玉川橋)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앞을 흐르는 금천(禁川)인 옥류천을 가로 질러 놓여 있는 다리이며 전체적인 형태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2개를 이어 붙여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 돌다리는 두 개의 아치를 틀고서 그 위에 장대석(長臺石)으로 귀틀을 짜고, 장대석과 판석(板石)을 끼워 넣어 바닥을 만들고, 양옆에 아름다운 돌난간을 세웠으며 도깨비(나티)를 새겨놓았고 양끝에는 석수(石獸)를 돌로 깎아 세웠다. 경희궁 금천교(錦川橋)는 1619년(광조 11)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터를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禁川)에 놓여진 돌다리이다. 궁 안으로 들어가려면 국왕을 알현하는 문무백관들이 마음을 깨끗이 씻고 들어오라는 의미로 반드시 금천(禁川)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다. 난간의 서수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산예(山猊)는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이다. 경운궁 금천교(錦川橋)는 대안문 안 명당수(明堂水) 금천(禁川) 위에 만들어진 돌다리 금천교(禁川橋)이다. 경운궁의 금천(禁川)이 그 원형을 잃어버렸다.명당수(明堂水) 금천(禁川)은 풍수적인 의미로 궁궐의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이루며 주술적으로는 나쁜 기운이 이 물을 건너지 못하게 하여 황궁과 황제를 보호한다는 바람이 담겨있다.

4인검(四寅劍)

4인검(四寅劍)은 인년,인월,인일,인시에 제작하였고 네 호랑이가 포효하는 장식 및 호신용 보검이며 4인검 표면은 27가지의 순금으로 새겨진 한자와 이면의 별자리 조각은 용맹과 신비를 나타내고 있다.4인검 자체가 칼의 형태를 지닌 부적(符籍)이고 또한 인(寅)이 들어간 시간에 제작하여 하늘의 양기를 칼에 담고자 했다. 검신과 검파에는 입사(入絲)와 상감(象嵌)으로 7성문(七星紋), 28 성수문(星宿紋), 한문주문(漢文呪文)을 금은으로 새겨 검의 신비한 힘을 더하였다.

4인검(四寅劍)은 반드시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를 기다려 만들었으며 인년(寅年)은 12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며 월(月)의 경우 음력 정월(正月)이 항상 인월(寅月)에 해당된다. 또한 인년(寅年) 인월(寅月)에는 인일(寅日)이 몇차례 있지만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하다는 첫 번째 인일(寅日), 상인일(上寅日)이 특별히 신성시되었고 인시(寅時)는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의 시각이다. 4인검(四寅劍)은 12년마다 돌아오는 이 2시간 동안에만 만들어질 수 있었다.

4인검(四寅劍)에는 북두7성(北斗七星)이나 별자리 중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28 성수(星宿)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4인검의 핵심 상징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북두7성은 북극성의 바로 옆에 국자 모양으로 늘어서있는 일곱개의 별이고 28성수(星宿)는 적도대(赤道帶)를 28구역으로 나누어 각각을 하나의 별자리로 구성한 것이다. 북두7성(北斗七星)과 28수를 새기는 것은 모두 7성신앙의 표현이며 결국 같은 의미를 지닌다.

북극성(北極星)은 북극의 하늘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으면서 수억개의 별을 지배하는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도교에서는 원시천존(元始天尊),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이 북극성에 머물러 천계(天界)를 지배한다고 보았다. 북극성과 그 자리에 머물러있는 천신(天神)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다스리며 이 북두7성을 통하여 28수 300의 성좌와 1,460개의 별 모두를 다스리므로 북두칠성을 새기거나 28수를 새기는 것은 모두 천제의 힘과 지배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4인검(四寅劍)에는 칼에 신령한 기운을 불어 넣기 위해서 한문으로 주문(呪文)을 새겨넣는 경우가 있는데 검의 명칭을 제외하고 총 24자의 한자가 전서체로 입사(入絲)되어 있다. 4인검의 명문은 주역(周易)과 도교(道敎)의 우주관을 담고 있으며 음양(陰陽)의 원리를 따라서 산천(山川)의 음기(陰氣)가 뭉쳐서 생성되는 요귀(妖鬼)를 하늘의 양기(陽氣)가 담긴 4인검(四寅劍)으로 제거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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