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을 생각하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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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을 생각하며(2)
  • 김민수
  • 승인 2012.01.2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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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한 경운궁(慶運宮) 태묘(太廟) 환원의 진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는 일본의 대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일제는 1904년 2월 8일 한반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제국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였다. 일제(日帝)는 러일전쟁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독도(獨島)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다.

▲ 역사연구가 김민수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 9일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불법 늑결을 대한국 정부에 강요했으며 11월 17일 불법 늑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통치자가 통감이라고 규정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한 여러 사무를 관장한 일제 통감은 일왕에 직속하고 외교는 일본 외무대신을 거쳐 내각 총리대신을, 기타 사무는 내각 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고 재가를 받게 되었고 통감은 대한제국의 일본관리 및 관청이 시행하는 업무를 감독하고 한국 수비군 사령관에 대하여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었다.

1906년(광무 10) 2월 1일 일본제국주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여 한국 수비군을 통수하는 원수의 자격을 겸임,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전시 편제 무력을 주둔시키고 경찰기구도 강화시켜 나갔다. 일본인 경찰고문이 5명에서 678명으로 급격하게 늘었으며, 경찰 수도 1,851명에 이르게 되었고 헌병대도 강화시켜 경술늑약(庚戌勒約) 불법 늑결 이후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반을 이루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 불법 늑결,통감부 설치 이후 대한제국 국권 회복을 위한 한민족의 저항이 대한독립운동·계몽운동과 같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었으며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 반일 상소, 자결이 계속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불법 늑결 후 1906년 설치된 일제 통감부가 1907년 헤이그 특사 처벌,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 군대 해산시킨 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부정하며 일제 통감이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고 경운궁(慶運宮)을 조선시대에 상왕들의 궁에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일반 궁호로 격하시켰으므로 문화재청은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 궁호(宮號)를 환원, 재지정해야 한다.

1907년 일제 통감이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한 후 반일 정미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일제 통감은 대한제국을 불법 병합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황태자에게 지방을 순행(巡幸)하게 하며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 대리청정기간은 고조 광무제의 치세(治世),일제 통감부의 강박에 의한 것)이 아닌 황태자의 2대 황제(1919.1-) 즉위(고조 광무제가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한 것을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이 황제 양위로 둔갑)로 왜곡,선전하였다.

1623년 16대 국왕 인조가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으며 1897년 2월 20일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대한국 황궁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대한국 황궁(皇宮)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으며 1900년 궁장(宮墻) 공사가 완성되고 1901년 경운궁과 경희궁,경운궁과 의정부(議政府)를 연결하는 운교(雲橋)가 가설·개통되었으나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殿閣)이 소실되었고 1905년 태극전(太極殿)·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경운궁(慶運宮)은 경희궁 사이에 후원(後苑) 상림원(上林苑)과 궁장(宮墻),영성문(永成門) 포덕문(布德門) 대안문(大安門) 인화문(仁化門)의 4대문이 있으며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고조(高祖) 광무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고조 광무제가 등극한 태극전(太極殿), 귀빈을 접견하던 편전 덕홍전(德弘殿),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접견실·연회장 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환벽정(環壁亭),황태자가 대리청정 시작한 돈덕전(惇德殿), 고조 광무제의 침실과 접견실 석조전(연지(蓮池),거북상),명성황후의 혼전(魂殿) 경효전(景孝殿),태조 고황제의 어진을 봉안한 흥덕전(興德殿),순명황후(純明皇后)의 혼전(魂殿) 의효전(懿孝殿),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가 붕어한 석어당(昔御堂), 고조 광무제가 외국 사절을 접견한 준명당(浚明堂),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 대한국 황실 사무와 근대적 광무개혁을 추진한 궁내부(宮內府),최고 군통수기관 원수부(元帥府)가 있다.

1897년 9월 26일 외부 협판(外部 協辦) 유기환(兪箕煥), 충청도 유학(幼學) 심노문(沈魯文) 등이 황제(皇帝)로 칭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9월 28일 시독(侍讀) 김두병(金斗秉)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였다.9월 29일 김규홍(金奎弘)이 황단(皇壇)을 설치할 장소를 택정할 것에 대해 간심하겠다고 아뢰었다.김재현(金在顯)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9월 30일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 이하가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였고 진사(進士) 이수병(李秀丙) 등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였다.10월 1일 황단(皇壇)을 설치할 장소를 간심(看審)하였다. 심순택(沈舜澤) 등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황제로 칭할 것을 아뢰었다.10월 2일 승지(承旨) 김선주(金善柱) 등이 상소를 올려 황제로 높여 부를 데 대하여 청하였다.10월 3일 심순택 등이 정청하여 다시 황제라고 부를 것을 아뢰었다.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 이하가 황제 국가의 제도에 대해 아뢰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황후를 책봉하며 태자를 책봉하는 날짜를 정하였다. 10월 7일 즉조당의 편액을 태극전(太極殿)으로 고쳤다.궁내부 관제 가운데 황단 사제서 증치 건을 반포하였다.10월 8일 사직단의 위판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쓰도록 하였다.

대한국(大韓國) 고조(高祖)는 10월 12일에 백악(白嶽:북악산)의 남쪽 황단(皇壇)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를 올리고 대한국(大韓國)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 등극하며 천하에 국호(國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이 해로써 광무(光武) 원년(元年)을 삼는다고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었다.

1897년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황제위에 등극하기 전 대신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국호(國號)를 의논하고 제후국에서 황제국(皇帝國)으로 국격이 격상되어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며 모든 예가 다 새로워졌으니 황단(皇壇)에 첫 천제(天祭)를 봉행하는 지금부터 새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하며 우리나라는 곧 3한(三韓:고구려,백제,신라)의 영토에서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고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므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三代) 이래로 황제(皇帝)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으므로 조선(朝鮮)은 황제국(皇帝國) 국호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大韓)은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쓴 적이 없고 한(韓)이란 이름은 고유한 우리나라의 이름이며 3한(三韓)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니 대한(大韓)을 국호로 한다.

국호(國號)를 3한(三韓)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의미의 ‘대한(大韓)’으로 정해져 황단(皇壇)에서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대한(大韓)’으로 썼다. 단군(檀君) 이래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신라의 3한(三韓) 영토를 통일(統一)하였다. 태조(太祖) 고황제가 용흥(龍興)하여 밖으로 개척한 영토가 더욱 넓어져 북으로 말갈(靺鞨:간도)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 탐라(耽羅: 제주도)을 거두어 탐라에서 귤과 풍부한 해산물을 공(貢)하였고 탐라(耽羅: 제주도)에서 말갈(靺鞨: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이르는 영토를 통일(統一)하는 업(業)을 세우셨다.

산하가 공고하여 복(福)을 우리 자손만세(子孫萬歲) 반석의 종(宗)에 드리셨고 상제(上帝)께서 위태함을 돌려 평안(平安)함을 갖게 하고 독립(獨立)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自主)의 권리(權利)를 행하게 하셨다. 10월 12일 황제(黃帝)의 자리에 등극하고 왕후 민씨를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고 산호만세(山呼萬歲) 등을 창하였다.

10월 13일 황태자가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進致詞儀),문무백관들이 황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賀表儀)를 거행하였고 칙서(勅書)를 반포하여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으며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였다.대시령(待時令)을 내려 중죄인들의 죄를 가볍게 해주었다.10월 14일 태극전에 나아가 명헌태후(明憲太后)에게 옥책과 금보를 올리고 왕태자비 민씨를 황태자비로 책봉하였다.10월 16일 태묘(太廟)에 삭제(朔祭)를 지낼 때 헌종실과 철종실에 대한 칭호를 정하였다.12월 2일 고조 광무제가 대한국 황제(皇帝)에 즉위한 날을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로 칭하였다.

일본이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Dokdo) 사이에 국제법적으로 불법적인 국경선을 임의로 획정하고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불법적으로 표기한 왜곡 교과서의 검정 승인에 이어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청서,방위백서를 발간하였다. 일본의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표기한 외교청서,방위백서 발간,교과서의 검정 승인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에 대한 침략 도발이므로 즉각적인 영토주권 침해의 시정을 촉구하고 국제수로기구(IHO)에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의 Sea Of Korea 영문 표기 환원을 요구해야 한다.

1909년 11월 대한국(大韓國:Korea)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를 표기한 고지도를 상설전시, 교육홍보하고 역사적,국제법적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확립하여 대한국(大韓國:Korea) 114년 역사를 바로세우고 일본 정부의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 및 영토,영해가 1919년 9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계승되었다.

한반도 제주도 간도(間島) 대한해(Sea Of Korea) 독도(Dokdo) 울릉도(鬱陵島) 대마도(對馬島)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대한국(大韓國)의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일(統一)했으며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勅令)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鬱陵島)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울릉군의 관할 구역으로 독도(獨島)를 포함시키고 대한국 관보를 통해 공포했다.

고조 광무제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제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하고 대한제국 한성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였다.

일제(日帝)는 러일전쟁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독도(獨島)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으나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은 독도를 울릉군 소속이라고 밝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이며 울릉군에 소속된 행정관할구역임을 확인하였으며 1907년 현성운(玄聖運)이 제작한 대한전도(大韓全圖)와 현공렴(玄公廉)이 1908년에 제작한 대한제국지도(大韓帝國地圖)에 대한해(大韓海)로 표기하였다.

일제는 1910년 8월 대한국(大韓國) 영토를 불법 병합하고 1929년 대한해(Sea Of Korea)를 일본해로 몰래 바꿨으므로 국제수로기구(IHO)는 대한해(大韓海)의 Sea Of Korea 영문 표기를 환원해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대한국(大韓國)의 주권과 한반도와 제주도,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 등 영토를 되찾았으며 1946년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제주도,울릉도,독도(獨島)를 일본에서 분리되는 땅으로 명시한 지령(SCAPIN) 677호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 및 영토를 계승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는 1952년 대한민국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인 독도(獨島)를 포함하는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을 선포하고 1954년 독도(獨島) 남동쪽 암벽에 '韓國領'과 태극기를 새겨놓았다.

우리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10월 상순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원형의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천제(天祭)를 봉행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며 환구제(圜丘祭)는 10세기 고려 성종(成宗) 대에 제도화되고 조선 세조(世祖) 대에 폐지되었으며 1897년 10월 12일 고조(高祖)는 대한제국(Daehan Empire)을 건국하고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의해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황단(皇壇)을 축조하고,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황단(皇壇)에 나아가 환구제를 봉행하고 1대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광무 원년 백악(북악산)과 목멱(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제천단 황단(皇壇)을 축조하였으며 1층은 장광이 144 척이며 둥글게 돌로 쌓아 석 자 높이로 쌓았고, 2층은 장광이 72 척이며 석 자 높이로 쌓았고, 3층은 장광이 36척이며 석 자 높이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바닥은 벽돌을 깔고 황단(皇壇) 주위를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세웠고 남문은 문이 셋이다.

1910년 8월 불법 무효한 경술늑약 늑결로 대한제국 강제 병합한 일제 총독부가 1913년 대한제국 황단(皇壇)과 황궁 경운궁의 동편 권역을 철거하고 호텔,경성부를 악의적으로 설치하여 민족 정기를 훼손하였고 경운궁은 원형 복원이 가능하지만 황단은 원 위치 복원이 불가능하며 광무 3년(1899년)에 축조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8각 3층 건물로 황천상제,황지지 신위를 봉안한 황궁우(皇穹宇)와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는 돌로 만든 석고(石鼓) 3개,정문만 남아 있다.

총독부가 황단과 경운궁을 철거하고 호텔,경성부를 악의적으로 설치하여 민족정기를 훼손하였으므로 경운궁과 황단의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경성부를 철거하고,경운궁 대안문과 황궁우 석고단 사이에 황단을 복원하여 고조 광무제가 친히 황단에서 제사드린 친사환구의를,경운궁 태극전에서 고조 광무제가 황제위에 오르는 등극의,고조 광무제의 조칙을 반포하는 반조의,황태자가 고조 광무제에게 축하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문무백관들이 고조 광무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의 환구제를 봉행해야 한다.

태묘제례(太廟祭禮)는 대한국 황제와 황후의 신위를 봉안한 태묘(太廟)에서 지내며, 태묘제례악(太廟祭禮樂)에 맞추어 진행된다.태묘(太廟) 정전에는 대한제국 태조 고황제부터 순종 융희제에 이르기까지 19실(室)의 신위를, 별전(別殿)인 영녕전에는 16실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정전(正殿)은 서편을 위로하여 1실이 있고 19실이 동편 끝에 있으며, 영녕전에 목조,익조,도조,환조 등 태조 위의 4대조 신위가 있다.대한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황태제 의친왕을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광복운동기에 민족자결 국제정세를 인식하고 일제에 저항하지 않은 영친왕 신주를 천위(遷位)해야 한다.

부묘(祔廟)시에 선왕 신위에 배알(拜謁)하는 부알판위(祔謁版位)는 태묘 정전의 신문(神門)에서 정전으로 들어가는 부묘(祔廟)할 때 신주를 봉안하여 모시는 신로(神路)의 중간 쯤의 동쪽에 있는 사각의 검은 전돌을 깐 판위이며 3년상을 치룬 국왕이나 왕후의 신주(神主)를 모신 가마 신여(神輿)를 잠시 주차하고 부알제(祔謁祭)를 봉행하던 판위이다.

태묘 정전의 신주장에 이미 봉안되어 있는 태조 이하 모든 신주들을 신실 앞에 있는 신탑 위에 꺼내 놓고 부알판위(祔謁版位)에서 태묘 정전에 먼저 부묘(祔廟)한 선왕들에게 배알한 후 밤나무 신주 율주(栗主)를 정전에 모시는 의식을 행한다.

태묘제례(太廟祭禮)는 춘하추동 4시(四時)와 12월 납일(臘日)에 봉행하였으며 영녕전(永寧殿)은 태묘(太廟) 정전과 더불어 향사(享祀)하였다.제향(祭享)은 국왕이 직접 행하는 친행(親行)과 대신으로 대행하게 하는 섭행(攝行)이 있으며 친행과 섭행은 제관의 명칭과 품계(品階) 또는 축문(祝文)이 다르다.

절차는 홀기(笏記)의 창홀(唱笏)에 따라 진행되고 제기(祭器)는 63기가 있으며, 제물(祭物)은 3생(三牲), 2갱(二羹), 서직도량(黍稷稻梁), 2제(二齊), 3주(三酒), 6과(六果), 6병(六餠), 2포(二脯), 4해(四醢), 4조율료(四俎率膋), 모혈(毛血)을 쓴다. 제수(祭需)는 매우 엄격하고 정성스럽게 차려졌으며 곡식이나 고기는 날 것을 그대로 올린다.

날 것과 맨국을 쓰는 것은 불을 이용하지 않은 선사시대에 생식을 하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례는 제관이 정해진 자리에 서는 취위(就位)·영신(迎神)·신관((晨課:강신)·진찬(進饌)·초헌(初獻)·독축(讀祝)·아헌(亞獻)·종헌(終獻)·음복(飮福)·철변두(撤籩豆)·망료(望燎) 순으로 진행된다.

황제의 제복(祭服)은 면류관(冕旒冠)과 12장복(十二章服)으로 이루어진 12장면복(十二章冕服)을 착용하였는데, 면류관은 9류(九旒)를 늘어뜨리고 오채옥(五彩玉)을 꿰었다. 면류관의 모(帽) 위에 장방형 판은 짙은 흑색, 안은 홍색이며, 앞뒤에 황·적·청·백·흑·홍·녹색의 주옥(珠玉)으로 구슬줄을 황태자는 9류ㆍ황제는 12류(十二旒)씩 매달고 관 위에는 옥잠(玉簪)을 꽂았다.

9장복은 겉은 흑색, 안은 청색으로 한 대례복(大禮服)으로 상의(上衣) 양 어깨에는 용(龍)을 수놓고, 등에는 산(山), 양쪽 소매에 화(火:불꽃무늬), 화충(華蟲:꿩), 종이(宗彛:술 그릇)가 각 3개씩 들어가며, 하의(下衣)에 초(藻:수초), 분미(粉米:쌀), 보(黼:도끼), 불(黻:亞자 무늬)가 새겨진다. 1897년 고조(高祖)가 1대 광무제에 등극하고 제정한 12장복은 9장복에 일(日), 월(月), 성신(星辰)이 추가되었다. 황제관은 12류면(十二旒冕)이 되었고 황태자관은 9류면(九旒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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