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을 위한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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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을 위한 제사
  • 김문식
  • 승인 2011.11.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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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奉祀)에는 아들 딸 구분없어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날 중종은 왕대비이자 모친인 정현왕후의 명령으로 왕위에 올랐고,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추방되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왕대비는 연산군의 세자를 새 국왕으로 세우자고 했지만, 반정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연산군이 추방된 후 그의 가족들에 대한 조치가 뒤따랐다. 왕비 신씨는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격하되어 궁 밖으로 나왔다. 신씨는 울면서 남편을 따라가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정청궁, 광평대군의 집, 부친 신승선의 집, 안처겸의 집을 옮겨가며 살았다. 폐위된 연산군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신씨 소생으로 세자 이황과 창녕대군 이성이 있었고, 후궁 소생으로 양평군 이인과 이돈수가 있었다. 반정 직후 이들은 정선, 수안, 제천, 우봉 등지로 분산 유배되었다가 9월 24일에 죽음을 맞았다. 중종은 조카들의 나이가 어리고 형세가 고단한 점을 들어 처벌을 반대했지만, 대신들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하고 말았다. 훗날 이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결집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30세의 짧은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연산군

연산군이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은 그 해 11월 6일이었다. 실록을 보면 그는 ‘역질로 괴로워하다 죽었고, 부인 신씨를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연산군의 장례는 왕자군(王子君)의 수준에서 거행되었고, 묘소는 강화도 현지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1512년 12월에 강화도에 홍수가 일어나 묘소가 침식되었고, 신씨는 이 참에 남편의 묘소를 양주 해촌(海村)으로 이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져 1513년 3월에 양주 해촌에 연산군의 묘소가 조성되었고, 묘소의 관리는 현지의 관리가 담당했다.

1516년(중종 11)부터 연산군의 제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제사는 거창군부인 신씨가 지내고 있었지만 적절한 예법은 아니었다.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한때 국왕을 지낸 사람이고, 중종과는 형제가 되는 지친(至親)이었다. 게다가 조선 왕실은 고려 국왕의 제사까지 이어지게 했으므로, 명분이나 인정으로 볼 때 연산군의 제사가 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당시 관례대로 종실 가운데 한 사람을 연산군의 후사로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중종은 연산군의 후사가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중종은 결정을 미루었고, 사관은 ‘상(중종)이 폐주(연산군)의 후사가 없는 것을 슬퍼했으면, 동기간의 두터운 정으로 종실 사람을 선택해 후사를 이어가게 하고, 부박한 논의에 저지당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기록했다.

조상 봉사(奉祀)에는 아들 딸 구분없어

1537년(중종 32) 4월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사망했다. 신씨의 장례는 왕자군 부인의 장례보다는 격이 높고 왕비 부모님의 장례보다는 낮은 수준에서 거행되었다. 다시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은 외손봉사(外孫奉祀)로 결정되었다.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는 외동딸 이수억이 있었다. 그녀는 처음 휘순공주로 봉해졌다가 휘신공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1503년(광해군 9)에 휘신공주는 구문경에게 출가하여 아들 구엄을 두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종실의 일원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을 받았다.

구엄이 사망한 후 그의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이필에게 입양되었고,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이렇게 보면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로 이어졌다.

연산군 부부의 묘소는 현재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이곳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이 하사받은 땅인데, 전후의 사정은 이러하다. 처음에 임영대군은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의 묘소를 조성했다. 태종이 사망한 후 의정궁주는 세종이 모셨고, 임영대군이 후사가 없는 그녀의 제사를 맡았다. 이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 신씨가 연산군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했고, 신씨의 외손자인 구엄이 부모님인 휘신공주 부부의 묘소를 이곳에 조성했다. 조선시대에 외손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외손봉사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본 글은 다산연구소 다산포럼의 글이며, 글쓴이 김문식님은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이다.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 조선후기 지식인의 세계인식』, 새문사, 200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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