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근묵
근묵, 오세창,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06.30, 1,000,000원

해제 오세창 선생이 모아 엮은 34첩의 글씨첩을 다섯 권의 책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600여년의 시간 동안 쌓인 우리 선조들의 묵적 1136점이 들어있다. 원본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기 위해 세밀한 작업 과정을 거쳤으며, 전 작품을 영인해 싣고 번역문을 한 권으로 정리했는데, 번역문에도 상세한 설명을 더해 전문가가 아니라도 글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 서예사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근묵』은 행서, 초서, 해서 등 다양한 서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편지글이 상당수를 차지해 자연스러운 필치를 엿볼 수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 이이와 정약용 등 여러 지식인들의 서체를 담고 있고, 당시의 사회와 생활 관련 문제들을 다루고 있어 한국의 서예와 당시의 문화, 문장들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모아서 엮은 총34첩의 글씨첩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하여 다섯 권의 책으로 엮었다. 약 600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우리 선조 1,136분의 묵적(墨蹟), 1,136점이 망라되어 있다.
근묵이란? 「근묵(槿墨)」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모아서 엮은 조선시대의 글씨첩이다. 선인들의 묵적(墨蹟) 중에서 서간류의 소품(小品)을 오랜 세월에 걸쳐 모아서 34첩의 첩장본(帖裝本)으로 만들었다.
고려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조선 초기의 정도전(鄭道傳), 성삼문(成三問) 등을 위시하여 이황(李滉), 이이(李珥), 정약용(丁若鏞) 등은 물론 대한제국 말기의 민형식(閔衡植), 이도영(李道榮)에 이르기까지 모두 1,136명에 달한다. 연대로 보면 맨 처음의 정몽주가 1341년에 사망하였고, 민형식이 1947년에 가장 늦게 사망하였으므로 상하 600여년에 걸친다. 작가를 신분별로 보면 위로 국왕과 왕후로부터 문무 관료와 학자뿐만 아니라, 승려와 중인까지 모두 망라되어 있다.
작가 소개 저자 | 오세창, 1943년 34첩으로 [근묵]을 펴낸 위창 오세창선생은 1864년 7월15일 서울 시동(詩洞: 청계천 2가)에서 역관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오경석은 중인 출신으로 한어역관이 되어 청나라를 왕래하며 신학문에 일찍 개명하였고,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 등 소장 정치인들을 지도하여 개화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국가의 문호를 개방할 것을 적극 주장하여 병자수호조약(丙子條好條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고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편찬할 만큼 금석학(金石學)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위창은 넉넉한 집안 형편과 높은 학문의 분위기 속에 성장하였고, 8세 때부터 부친의 친구인 유대치(劉大致: 1831~?. 본명은 鴻基, 의원)를 스승으로 모셔 1879년(16세)에 역과에 합격하였다. 위창의 주요 행적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1882년(19세) 임오군란 직후 9월에 후원주위청영차비관(後苑駐衛淸營差備官)이라는 벼슬을 받아 창덕궁 후원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사들의 통역을 맡았다. 1886년(23세)에 사역원직장에 임명되었다. 1894년에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되었고,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공사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1년간 체류하였다. 귀국 후 개화파 역모에 연루되어 1902년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이때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4년 뒤인 1906년에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여 [만세보]를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였으니, 이때부터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서울신문사명예사장·민주의원·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동란 중 피난지 대구에서 사망하여 사회장(社會葬)이 거행되었다.
위창은 일찍부터 서화골동의 가치를 인식하여 국외로 유출되는 서화를 동분서주하며 수천 점을 구입하였다. 또한 간송 전형필이 10만 석의 사재를 헐어 골동서화를 수집하는데 감식안을 제공하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의 고서화 명품 가운데 상당수가 오세창의 감정과 평가를 거쳐 수집된 것이다.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수준 높은 감식안을 더욱 발전시켜 민족문화의 유산을 지키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위창은 서화의 수장뿐만이 아니라, 저술에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문집이나 국고문헌(國故文獻)에서 인명·미술사 자료를 두루 모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년)을 출간하여 한국미술사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명화(名畵) 251점을 모아 [근역화휘(槿域畵彙)]를 만들었고, 우리나라 문인화가 830여명의 도장 3,930여방을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1937년)를 만들었다. 위창은 이런 여러 편의 대저(大著)를 만들어 불모지인 우리 미술사학에 기초적인 공적을 남겼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모아서 엮은 총34첩의 글씨첩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하여 다섯 권의 책으로 엮었다. 약 600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우리 선조 1,136분의 묵적(墨蹟), 1,136점이 망라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