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실리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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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실리외교
  • 다산연구소
  • 승인 2011.08.30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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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정책의 힘은 정확한 정보력에 있다
공민왕의 실리외교

1369년(공민왕 18) 5월, 공민왕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 황제 등극을 축하하는 외교문서를 보냈다. 원의 부마국으로 오랫동안 긴밀한 외교관계를 가졌던 고려 정부가 원과의 외교를 단절하는 순간이었다. 남경에서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원의 수도였던 북경을 점령한 때가 1368년 8월이므로, 아직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고려는 어떻게 백년 이상의 우방국을 버리고 얼마 전에 세워진 신생국과 수교할 수 있었을까?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원이 고려를 다시 침입할 가능성은 없었을까?

18세기의 학자였던 이익과 안정복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안정복이 스승에게 질문했다. “원나라 말기에 농민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주원장 외에도 진우량(陳友諒), 장사성(張士誠)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만약 고려에 외교문서를 보냈다면 공민왕은 그것을 받아들였을까요? 고려는 오랫동안 원을 섬겼던 나라이고, 그들의 병력은 고려를 공격하기에 충분한데 이런 외교는 괜찮은 것일까요?” 이익이 대답했다. “고려는 충렬왕 이후 원나라의 은혜가 컸으므로 원이 쇠퇴했다고 고려가 배반할 수는 없다. 의리로 따지더라도 소주(蘇州)를 기반으로 했던 장사성이 주원장보다 나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은 오랜 우방을 버리고 신생국을 택한 공민왕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외교정책의 힘은 정확한 정보력에 있다

『고려사』를 읽어 보면, 공민왕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살피면서 외교정책을 바꾸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 정부는 1368년 1월에 명나라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원 지배하의 요양성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명나라 군사력이 엄청나므로 방어에 힘쓰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8월에 공민왕은 북경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국경지대에 새로운 장수를 파견하여 국경 방어를 강화했다. 9월에 공민왕은 북경이 함락되고 원나라 순제가 상도(上都, 개평)로 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명나라와 사신을 통하는 문제를 의논하라고 지시했다. 북경의 정세는 현지에 머물던 고려인이 전해주었다.

공민왕은 북경이 함락되었지만 원과의 외교를 단절하지 않았다. 원에서 분리되어 나온 오왕(吳王), 회왕(淮王)과 사신을 교환하면서 정략결혼을 추진하기도 했고, 북원(北元)에서 공민왕을 우승상(右丞相)에 임명하자 이에 감사하는 외교문서를 보냈다. 이 때 공민왕은 ‘당신과 사위 관계가 있어 그 덕분에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당신의 군사가 남쪽에서 싸울 때 조금도 도와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당신이 북쪽 상도로 갔을 때 내 몸을 희생할 것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서를 가지고 떠났던 사신은 중도에서 돌아왔다. 고려에서 북원으로 가는 길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공민왕은 신하들에게 천도 문제를 의논하라고 했다. 무서운 기세로 북진하는 명이 고려를 침략할 가능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1369년 4월에 명 태조의 친서가 도착했다. 사신으로 온 설사(偰斯)는 이미 고려에 귀화해 있던 설손(偰遜)의 아우였다. 그는 1368년 11월에 남경을 출발했지만 바닷길에서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이때가 되어서야 개성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공민왕은 친명적인 태도를 분명히 했다. 공민왕은 5월에 원나라 연호인 ‘지정(至正)’의 사용을 중단하고, 명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외교문서를 보냈으며, 8월에는 명나라 황제와 황태자의 생일, 신년을 축하하는 사신을 파견했다. 마침내 그 해 10월에 고려 정부는 북원 황제의 외교문서를 가지고 온 사신을 죽였다. 원과의 외교관계를 완전히 단절한다는 표현이었다. 1370년 5월에 명 태조는 공민왕을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했고, 이로써 명과 고려는 군신 관계를 맺었다.

공민왕은 원과 명이 교체되는 역사적 순간을 목격했다. 그는 고려에서 북원으로 가는 길이 차단되고 명이 고려에 대해 우호적임을 확인하는 순간 친명정책으로 돌아섰다. 공민왕이 오랜 우방이었던 원을 버리고 신생국인 명을 선택한 데에는 원나라 조정의 동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정보원은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로 원나라에 머물던 고려인이었다.

필자는 역사적 전환기에 원을 버리고 명과 수교한 공민왕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글쓴이 / 김문식님은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조선후기 지식인의 세계인식』, 새문사, 200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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