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거푸 빠져나가자 더워지네요. 얼마나 더울까요? 유럽이 겪는 폭염보다 덥지 않을 거라 말하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위를 견디기 어려워집니다. 아직 천장에 달린 에어컨을 켜지 않았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요?
갈등이 커지면 열을 받는다고 하지요. 요즘 폭염은 갈등의 산물은 아닐까요? 인간 사이의 갈등이 개인의 문제라면 싸움에서 끔찍한 범행으로 이어질 수 있지고, 국가 사이의 문제라면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푸틴이 일으킨 전쟁이 그럴 텐데, 최근 갈등을 이용해 정치적 이권을 챙겨온 일본의 정치인이 자국민의 수제 총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폭력으로 갈등은 해결될 리 없는데, 여름 더위는 소나기 없는 폭염으로 변하고 인간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후손과 갈등을 벌이니까요.
계층 사이의 갈등을 사회정의, 경제정의로 풀어갈 수 있다면, 미래세대와 갈등을 세대정의로 풀어야 하겠지요. 어떻게하면 될까요? 저는 끝모를 탐욕에서 벗어나, 미래세대가 누릴 행복한 삶을 배려하려 노력해야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방법은 함께 허심탄회하게 고민하며 찾아야겠죠. 생태계와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생태계에서 인간이 90% 넘는 지위를 독차지한다고 하는데, 적어도 절반을 돌려주어야 생태계가 회복되고, 인간의 생존도 지속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더군요.
분명한 것은, 생태계의 안위를 해치며 편의를 구하는 지금과 같은 방식의 생활은 미래세대의 생존을 머지않아 위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상이변으로 나타나는 기후위기, 코로나19로 나타난 생태계 위기를 우리 미래세대에 물려줄 수 없습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이미 해답을 알고 있고, 멀지 않은 선조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미래세대에 "행복한 생존"이라는 선물을 주는 삶으로 그들과 갈등을 풀어야겠습니다. 심해지는 폭염이 후손에 위기가 되는 요즘, 갈등과 화해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작은책>에 기고한 글을 잇습니다.
(공동체) 미래세대에 어떤 내일을 전할까 | 공동체·인간 일본의 힘 있는 정치인이 총탄으로 사망했다. 각국 정치인의 애도 물결이 일었고 취재하는 언론은 살해 동기에 관심을 쏟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본과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정치권에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므로 보도 내용은 많았지만 별 관심이 없었는데, 임종에 대한 짧은 소식이 눈에 띄었다. 기다렸던 걸까? 심장 멈추게 한 고통을 견디더니 부인 만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비슷한 사연은 드물지 않다. 작업장 사고로 쓰러진 이가 부인의 품에서 힘겨운 숨을 거두는 모습은 치료하던 의사를 경이롭게 만들었다는데, 비슷한 사연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도 언급했다. 흑연 제어봉이 너울너울 타오르는 핵발전소로 소집된 소방관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수소문해 찾아간 곳은 모스크바의 병원이었다. “당신 남편이 아니라 핵폐기물”이라며 만류하는 의료진을 밀어낸 아내는 숨 쉴 때마다 내장이 섞여 나오는 고통을 이겨내던 남편을 끌어안았고,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썼다. 어렵사리 파종한 밀과 해바라기가 익어가는 우크라이나 벌판에서 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젊은 아내와 아이들을 초호화별장에 보호하는 푸틴은 불치병 속에 암살 위기에 봉착했으면서 일본 정치인의 유가족에 조문을 보냈다고 한다. 푸틴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에 관심 없는데, 유명한 정치인과 사업가가 애도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아쉬웠다. 영향력과 관계없이, 누구든 숨을 거둘 때 가족과 친지의 배웅을 받는다. 사람만이 아니다. 집안 서열을 파악하는 고양이는 측은히 바라보는 남자보다 사료를 챙겨주던 아내를 기다리는지, 깊은숨을 쉬며 죽음을 견디는 게 아닌가. 긴급 전화로 일찍 퇴근한 아내를 확인한 고양이는 비로소 눈을 감았다고 한다. 아내는 정착 동물 반려를 한사코 꺼린다. 그런 아내는 집안 화초가 시들면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다. 관심을 기울이면 식물도 응답한다고 말한다. 물컵에 올려놓은 양파 한 뿌리에 물 갈아줄 때마다 격려하고, 다른 뿌리에 저주를 퍼부었더니 상반된 결과를 보이더라고 생활협동조합 활동가는 경험을 일러주었다. 저주받던 양파는 조급히 잎사귀를 펼치더니 시들었고 격려받은 양파는 뿌리를 무성하게 내리며 건강하게 성장했다는 거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겉보기 똑똑한 친구와 비교해 날이면 날마다 지적받는 자녀나 학생은 엇나갈 가능성이 크지만, 개성을 배려하며 도전을 격려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하는 청년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행복한 삶을 누리겠지. 사회운동가 데릭 젠슨은 연구실에서 쫓겨날 뻔했던 대학원 경험을 이야기했다. 지도교수의 당부에도 특정 생쥐에 감성의 눈빛을 보낸 것이다. 따뜻한 시선을 받은 생쥐는 의약품을 투입해도 저항하지 않았는데, 반색하는 녀석을 차마 죽일 수 없었다. 후배에게 슬며시 부탁했다 크게 혼났다는데, 쇠죽 끓여 먹이던 우리네 농부도 비슷했다. 외양간 소를 도축업자에 넘기던 일이 힘겨웠다. 글썽이며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었는데, 공장식 축산업이 외양간을 없애자 개성 잃은 가축은 어릴 때 일제히 도축돼 고깃덩어리로 바뀐다. 올 1월 입적한 승려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은 음식으로 화가 전달된다고 설교했다. 과학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죽을 때의 화가 전달되어 그런지, 살아갈 날이 긴 동물을 잡아먹는 육식동물은 대개 포악하다. 방목하는 순록을 무작위로 잡는다는 스칸디나비아의 라플란드 사람들은 희생된 가축이 고마워 살 한 점, 뼈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라플란드까지 갈 필요가 없다. 생존을 위해 다른 생물을 희생시키는 사람은 일찍이 사치와 낭비가 없었다. 동물도 자연도 마찬가지다. 100회 생일 지나 곡기와 물까지 마다하던 스콧 니어링은 “항구를 떠난 배가 저쪽 항구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삶과 죽음을 해석했다고 그의 부인 헬렌 니어링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썼다.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환생일까? 막대한 사료와 에너지를 동원해 방대하게 사육하거나 재배하여 얻는 음식을 필요 이상 소비하며 함부로 버리는 요즘, 사람들은 무슨 생명으로 환생해 어떤 삶을 이어갈까? ![]() 인적 드문 산길에서 모르는 이와 마주치면 피곤하더라도 인사를 나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가 보이면 대개 도와주는데, 회색도시는 다르다. 속도와 경쟁이 난무하는 철근콘크리트 도시에서 부대끼는 인파는 대부분 이방인이다. 개성을 파악해 일일이 배려하지 못하는 도시에서 이방인들은 눈을 외면하며 공연한 시시비비를 피한다. 낯선 사람들이 총부리를 겨누는 전쟁터라면 어떨까? 바스락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는 상황이라도 한 가족의 일원에게 일부러 총을 쏘지 않겠지만, 적개심에 불타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그런가? 전쟁을 부추기는 자는 민간인에 총질을 명령하고 민가에 포탄이 마구 떨어뜨린다. 한국전쟁이 그랬고 우크라이나가 그렇다. 국제평화연구소를 창설한 사회학자 요한 갈퉁은 전쟁이 없는 상황을 평화로 규정하지 않았다. 전쟁 원인이 되는 갈등을 문제 삼으며, 갈등 없는 사회의 평화를 설파했다. 국가, 종교, 정파 사이의 갈등은 원인이 무엇일까? 흔히 “평등하면 건강하다”라고 말한다. 부유한 동네에서 외면받는 사람은 가난한 동네에서 정을 나누며 사는 이웃보다 병에 시달릴 확률이 높다는데, 갈등의 원인은 불평등이 아닐까? 힘이 약한 국가나 민족, 그리고 종교집단에 희생을 강요하면 갈등이 발생하고 저항이 이어진다. 기득권이 권력을 함부로 행사할 때 갈등이 노출된다. 성별 갈등도 비슷한데, 세대 갈등은 어떨까? 2000년 전 로제타스톤도 기록을 남겼다는 세대 사이의 갈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젊은이의 개성과 상상력을 통제하려는 기성세대의 완고함이 아니라, 미래세대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현세대가 일으키는 갈등이다. 우리 다음의 세대도 내내 건강하고 평화로우며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반드시 보전해야 할 자연이 사라져간다. 자원은 낭비되었고 생태계는 무너졌으며 대기와 지층, 심지어 우주공간까지 돌이킬 수 없게 오염되었다. 기후변화와 감염병 창궐은 그 결과이자 더욱 위험해질 위기다. 자원과 에너지 확보를 위해 식민지를 경쟁적으로 수탈하던 시절, 세계를 휩쓸던 열강 사이의 전쟁은 이제 재현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권을 나눈 그들의 신사협정으로 세계대전은 없을 거라지만, 국지적인 대리전쟁은 여전하다.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까닭일 텐데, 막강한 군대가 갈등을 예방할까? 그렇다 치자. 문제는 세대 갈등이다. 현세대의 탐욕에 저항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한 미래세대는 수탈될 자산이 남지 않았다. 자식 키우는 우리는 파국 이외에 어떤 내일을 미래세대에 전할 것인가? 식민조선에 위안부와 징용과 징병을 강요한 사실을 부정하고, 혐한 발안을 일삼으며 정치적 이익을 편취한 일본의 정치인은 떠났다. 그가 선동한 한일 갈등은 진정되지 않았는데, 일본과 우리나라는 이 시간, 미래세대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가? 일본과 우리만이 아니다. 핵발전으로 기후위기를 잠깐 모면하려는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에너지를 흥청망청 쓰는 대신 치명적 방사능 쓰레기를 자자손손 안기려는 기득권은 미래세대에 희생을 강요하지 않나. 2021년 말 세상을 떠난 생태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말년에 허물어지는 생태계를 걱정하며 생태계의 절반 이상을 자연에 돌려주자고 호소했다. 그래야 파국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을 텐데, 충분할까? 충분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전혀 그럴 용의가 없다. 수많은 생물이 어우러지는 생태계가 안정적일 때 세상에 나타난 인간은 자신의 터전을 터무니없이 망가뜨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끝 모를 탐욕으로 자신의 미래세대를 위협한다. 총탄보다 흉측하다. 에너지가 낭비되고 생태계가 황폐해지도록 걷잡을 수 없게 인구를 늘린 인류는 무모하게 갈등한다. 미래세대가 생존하려면 온갖 갈등을 피해야 할 텐데, 제 자식 귀여워죽는 우리는 미래세대의 지속 가능한 행복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양보해야 하나? 모를 리 없다. 눈을 감았을 뿐이다. (작은책, 2022년 8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