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는 진행 중 - '지구별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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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진행 중 - '지구별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을 향해
  • 강형구
  • 승인 2021.04.11 2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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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1 소성리아침평화기도회

창세기 1:31~2:3 〔천지창조〕

1-31 하느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2-1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2-2   하느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2-3   이렛날에 하느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느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 새번역을 따르되, 새번역의 '하나님'이란 호칭은 공동번역의 '하느님'으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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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성경 첫머리 창세기 천지창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다 마치시고' 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는 구절에 매여서, 하느님의 창조 사역이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렛날에 쉬고 계신 하느님이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얘기만 주목합니다.  
안식일에 관한 여러가지 논쟁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다음 일주일은 또 어떻게 지내셨을까?" 
그 다음 이어지는 성경의 이야기는 계속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신 일뿐만 아니라 장차 하실 일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요.
하느님의 창조사역은 완결된 것이 아닙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는 그 사역에 동반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어지는 [에덴동산] 이야기는 하느님의 창조사역에 우리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말해줍니다. 아니 오늘 말씀의 앞부분에도 1장 28절 말씀부터 30절 말씀까지 압축된 이야기가 있지요.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현장중계방송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전하는 신문기사가 아닙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죽음을 운명적으로 맞아야 하는 아담의 머나 먼 후예들이 대대손손 전해진 이야기들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야기를 정리한 그 시대의 생각의 한계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장 28절의 '정복'이나 '다스림'이란 단어는 하느님의 창조사역에 동반자로 초대된 사람들에게 맡겨진 역할을 제대로 전하지 못합니다. 변질된 얘기라고 할 수 있지요.

오히려 유대인들보다 우리 조선(朝鮮)의 상고사에 나오는 말씀이 더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생각합니다. '홍익인간'의 가르침과 더불어 전해지는 이야기들이지요.
저는 그 내용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아사달, 고요한 아침의 나라
그 옛날부터 조선(朝鮮)이라 불렸다
뜻글자, 소리글자, 글을 만들어 백성이 서로 소통하고
나라의 경계를 넘어 널리 서로에게 덕이 되는 삶을 살았다 
지구별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을 살았다"

유대인들은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지으신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여주는 역할'을 맡기셨다고 전해줍니다. 앞부분 1;29~30에서는 우리의 먹거리로, 동물들의 먹거리로 식물들을 준다고 얘기하고 있지요.
저는 이 얘기가 조선(朝鮮)에서는 어떻게 전해지고 있었는지 대비시켜봅니다. '동물과 사람들에게 이름붙여주기'는 "뜻글자, 소리글자, 글을 만들어  만백성이 서로 소통하고"와 통합니다. 식물을 먹거리로 주신 얘기는 "지구별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과 통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 보다는 "나라의 경계를 넘어 널리 서로에게 덕이 되는 삶" - '홍익인간'의 정신이 더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 명령이 아닙니까?

우리의 탐욕이 "나라의 경계를 넘어 널리 서로에게 덕이 되는 삶"이 아니라 "부국강병을 꿈꾸는 국가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우리는 "지구별 하나로는 부족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부귀향락을 누리는 사람들은 "지구별이 일곱 개로도 부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다른 일곱 명의 목숨을 빼앗아 제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차마 모두 죽일 수 없으니 70명을 반쯤 죽여 마소처럼 부리면서 그들이 흘린 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별할 때, 그들은 그 동안 섭취해 온 에너지를 이 땅에 고스란히 내어놓기를 거부하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마소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모습입니다.

미국 양키들은 "지구별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을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청소하였습니다.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을 독식했습니다. 물론 마소처럼 부릴 사람들을 전세계에서 끌어들이기도 했지요.
이제는 전세계의 자원들을 독점하며 그곳의 원주민들을 자신들을 위한 마소로 부리기를 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 소성리 사드는 그들이 부리려 하는 마소, 그러나 아직 채 길들이지 못한 마소의 등짝에 휘갈겨 내리치는 채찍입니다.
우리의 평화행동은 바로 이를 막아내는 투쟁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투쟁의 전망을 어둡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지금 "지구별 하나만으로 충분한 삶"이 아닌 "적어도 지구별이 두세 개는 필요한 삶"을 꿈꾸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나라의 경계를 넘어 널리 서로에게 덕이 되는 삶"을 꿈꾸는 나라, 그러한 이상을 자본주의 대신에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체제를 통해 추구하는 나라들조차 "적어도 지구별이 두세 개는 필요한 삶"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북쪽 형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도 그렇고, 이 땅의 노동자들도 투쟁의 동력이 바로 그런 데서 나오지 않습니까?

"나라의 경계를 넘어 널리 서로에게 덕이 되는 삶"은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라는 수직적인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자주적인 공동체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밑바탕은 "지구별 하나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창조의 사명은 바로 이런 지구공동체를 완성할 때 완수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맡겨주신 사명을 수행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십니다. 
기대와 어긋난 길을 갈 때마다 하느님은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때로는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심판으로, 때로는 모세와 그 후예와 같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품은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드디어는 예수님 - 스스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창조 사역을 계속 진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평화행동은 그 창조 사역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 위 묵상글은 아침기도회에서 간략하게 나눈 이야기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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