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저항의 퍼포먼스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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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저항의 퍼포먼스여야
  • 양재성
  • 승인 2021.03.28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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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린 나귀를 타다(요한복음 12장 16~22절)

▪ 종려주일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순례는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니면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입니다. 예수는 이미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걸 아셨고 제자들과 군중들은 예수와는 전혀 다른 기대를 갖고 예수 일행을 맞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인 셈입니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당신의 가르침과 비전을 제시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나중에라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표징이 필요했습니다. 어린 나귀가 그것입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제자들과 군중은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기적과 이적으로 로마제국을 때려눕히고 자신들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위선적 종교로부터 구원할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처럼 말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유다제국을 회복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 말입니다.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다는 소문이 일자 군중들은 동요하게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예수 일행을 보고자 모여들었습니다.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예수는 정치적 메시아로 호출됩니다. 예수는 당신의 때를 준비해 왔기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아시곤 자신의 혁명을 공개하고 나섭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자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 일행을 환영합니다. 

▪ 예수의 비전
  사순절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자리에서 이 땅에 내려와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가난한 삶을 사셨고 마침내 더 낮아질 수 없을 만큼 낮아져 죽음의 자리까지 이르셨습니다. 인간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마지막 자리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해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전부를 버리고 얻고자 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한 인간의 해방, 구원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재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을 추구해야하는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몸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 작은 인간이 이토록 위대하게 살 수 있는 놀라운 존재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에겐 하느님의 형상이 있고 그 하느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존엄한 존재이며, 그 존엄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 마침내 하느님에게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도록 지어졌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정의를 실천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잃지 않고 비천한 자들과 같이 비천하게 됨으로 비천한 자들의 존재감을 세워주었고 이들을 억압하는 이들의 폭력에 저항했습니다. 비폭력으로 폭력을, 중무장한 사람들에게 무장 해제된 모습으로 저항하였습니다. 어린 나귀는 비폭력의 상징입니다. 

  예수의 고난은 오늘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고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생태계는 무참히 파괴되고 있으며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와 차별,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고통은 커지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본 증식의 도구로 전락되어 노예적 삶을 살고 있으며 특권층은 경쟁을 부추겨 이익을 독점하고 있고 그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로 양극화는 가중되고 있습니다.  

▪ 예루살렘 입성
  오늘 예수 일행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이는 일종의 퍼포먼스입니다. 예수는 더 이상 당신의 혁명을 말로 담을 수 없음을 아시곤 퍼포먼스로 알리고자 하십니다. 사복음서가 이 사실을 다 기록하고 있은 것을 보면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이 사건은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담고 있으며 이는 예수는 폭압적인 왕이 아니고 평화의 왕임을 선포함으로 로마제국과 헤롯 정권, 종교권력까지 비판하며 심판을 선언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권능을 가지고 계신지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지만 오늘 사건으로 자신을 만천하에 공개하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당시 권력자들과 전면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에 군중은 열광하며 예수 행렬을 환영합니다. 어린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 일행을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고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며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영원하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실로 예루살렘에선 로마 제국을 타파하고 종교 권력자들을 끌어내릴 듯 강렬했고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요동쳤습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희열이었습니다. 
  군마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오는 모습에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스가랴 선지자가 말한 대로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는 예언을 상기하였습니다. 메시아는 예언의 성취자로 오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로 예수를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중들에겐 목마른 기다림 끝에 오시는 메시아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환영인파는 쇄도합니다. 물론 이 인파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예수의 정치적 메시아로서의 허구를 알아차리고 위선적 종교지도자들에게 매수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 어린 나귀를 타다
  예수는 군말이 아니라 나귀를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혁명을 정치적으로 풍자하신 퍼포먼스입니다. 얼핏 보면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처럼 보이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유월절에 순례자들 가운데 가끔 있었던 퍼포먼스입니다. 물론 그 규모로 보아 마카비 혁명군이 예수살렘을 탈환할 때 이후 가장 큰 행렬입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긴장하게 한 것을 보면 짐작됩니다. 예수는 개선장군처럼 정복자의 모습이 아닌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이 사건은 세상의 나라와 예수의 나라가 공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고 두 나라는 완전히 다름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당신 몸짓으로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왕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도 군중이 생각하고 바라는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백성 위에 군림하여 다스리는 왕이 아니고 만물을 섬김으로 다스리는 왕입니다. 이 퍼포먼스로 예수는 당신이 메시아임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평화의 왕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군중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대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자기를 바꿈으로 세계를 바꿔 놓는 그런 왕이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예수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하느님이 세상에 대하여 완전한 관심을 가지신다는 기적입니다. 나귀는 전쟁에 필요한 동물이 아닙니다. 나귀는 짐을 실어 나르는 일에 필요한 동물입니다. 예수가 원하신 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경쟁과 전쟁으로 강해지는 특권층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의 나라는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응당한 대가를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의 나라입니다. 예수 안에서 세상은 자기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되고 예수 안에서 이런 깨달음으로 우리는 모든 수단과 합법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하느님과 씨름하던 존재에서 실재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피조물로 변모합니다. 

▪ 정치적 메시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행렬은 극적이며 정치적이었습니다. 예수의 행동은 체제 전복적이었습니다. 예수의 입성 행렬은 기존 질서를 폭로하고 당시 정치체제에 저항한 것입니다. 세상을 전복하고 정치적 해방을 구했던 군중들은 끝내 정치권력 앞에 맥없이 당하는 예수의 나약한 행동에 실망하고 돌아서지만 끝까지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에 경도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저항의 종교와 희망의 종교입니다. 이 말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은 정치 행위이어야 하며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정치적 행위입니다. 먹을거리를 사고 어떤 식당에서 어떤 음식을 사 먹느냐와 어떤 옷을 사느냐는 모두 정치적 행위입니다. 어떤 종교, 어느 교회를 나가냐 어떤 책을 읽느냐 어떤 사람들과 만나냐가 다 정치적입니다. 나는 정치적이지 않아 난 중립이야 하는 모든 행위도 정치적입니다. 

  십자가의 최종적 의미는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지속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어떤 악의 세력도 이겨낼 수 있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하느님은 고통과 죽음의 값을 요구하는 독단적인 군주가 아니고 우리 모두가 악에 대한 저항과 사랑을 행할 수 있게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하느님이 불의와 공포를 정복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시며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는 약속의 복음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십자가의 의미
  우린 지난 주에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생각, 신념, 신앙, 희망 등을 접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육체가 파괴되고 마음이 황폐해지고 영혼이 깨지는 곳입니다. 관계의 어그러짐에서 오는 고통과 굴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각각의 사명을 주었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할 하느님의 심부름입니다. 모든 존재는 제 사명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예수는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사셨고 고난 받으시고 처형되셨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삶이 부른 결과입니다. 마치 예수는 인류의 십자가를 자신의 십자가인 양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신 분처럼 사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당시 민중들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정치적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민중들에게 공포요 절망이었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이었고 구원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잘 못된 세상을 심판하고 사악한 세상 통치자들을 쫓아내고자 함입니다. 결국 힘의 나라, 자본의 나라가 아닌 정의의 나라 평화의 나라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독점과 특권층의 나라가 아닌 연약한 사람들, 변두리 사람들, 노동자들의 나라를 세우고 혐오와 차별의 나라가 아닌 존중과 배려의 나라를 세우려 함입니다. 하느님을 적대시하고 생명을 죽음으로 내 모는 체제와 시스템을 거부하고 심판함은 물론 생명살림의 체제와 시스템 즉 생명평화의 나라를 구축하려는 의도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는 그저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는 세상 체제에 대한 철저한 거부이며 세상 통치에 대한 심판입니다. 세상의 위계질서와 신화적 삶에 대한 부정입니다. 예수의 비폭력 행진은 폭력으로 움직이는 세상 시스템에 도전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소비 중심적 삶을 거부하고 단순 소박한 삶으로 안내했습니다. 십자가는 생명을 해하고 죽이는 삶을 거부합니다. 십자가는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구온난화를 가속화하는 모든 행위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는 평화로운 세상을 깨뜨리고 평화주의자들을 감금하고 죽이는 독재 권력을 거부하고 이에 맞서 투쟁합니다. 십자가는 독선과 아집, 배타성을 거부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이나 생명을 수단화하는 일체의 행위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는 자유를 빼앗고 노예화하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며 오히려 불의와 위선에 맞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나누고 사랑하라는 독려입니다. 

  기독교는 너무나 쉽게 십자가를 비정치화했고 신앙의례의 도구로 전환시켰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영적으로 환원시켜버림으로 신비화해버렸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질서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며, 하느님의 뜻을 올곧게 따르려는 예수의 길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걸어 가야할 신앙의 길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죽어야 역사의 심판과 변혁을 이루고 새로운 세상을 불러올 수 있다며 당신을 따라오려는 자들도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겐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을 등지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일체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며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삶이 행복이며 예수처럼 하느님의 뜻을 믿고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를 지극한 행복이라 가르칩니다. 

▪ 나의 십자가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시는 주님을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하느님의 아들, 평화의 왕, 호산나 하며 환영하는 대중들의 퍼포먼스를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동시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는 고난주일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삶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숨길 수 없음을 아시고 드러내십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 처형입니다. 이 한 주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시대의 고난 받는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손을 잡아줍시다.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생각합시다. 거대한 권력, 불의한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은 더 큰 폭력이 아닙니다. 그건 평화요 사랑입니다. 비폭력 저항입니다. 우리의 삶은 저항의 퍼포먼스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과 삶을 분명히 하며 살아갑시다. 억울하고 고통 당하는 이웃들은 늘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셨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이렇게 세상의 변혁은 가장 작은 자들 일하는 사람들 통해 옵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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