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하는 사람들
에베소서 2장 1~10절, 요한복음 3장 14~22절
▪ 미얀마에 평화를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민주화 시위가 세대, 성별, 직업, 종교를 불문하고 전 방위적으로 전 국민이 참여한 가운데 열리고 있습니다. 군부가 비폭력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사상자와 구금자가 급증하고 있지만 시위 현장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비폭력적으로 쿠데타를 규탄하며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있고, 한국의 전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80년 한국의 5월 광주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도 미얀마 군부의 폭력과 살상을 규탄하였고 최루탄 등 시위 용품 수출을 중단하고 경제제제 조치를 단행했고 정치권도 한 목소리로 규탄하였습니다. 5월 광주관련 단체들이 미얀마 민주화 시위 지원을 선언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인상 깊은 것은 현장에서 개신교인들이 대거 민주화시위에 참여하고 찬양과 기도회를 여는 모습과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이 영상으로 공개되고, 천주교 수녀가 경찰에게 자유와 인권을 위해 항의하는 민간인들을 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장면의 사진이 공개되어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회원 교단장과 기관장들은 11일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국민 자유와 인권의 가치가 존중되는 그 날까지 한국교회, 세계종교 시민사회와 함께 기도하고 연대할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비무장·비폭력 시민 행동을 무차별 폭행과 총격으로, 방화와 구금으로 탄압하는 군부의 잔학 행위와 악랄한 인권유린에 대해 세계시민들과 함께 분노하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였습니다. 아울러 “사순절 동안 매일 정오에 미얀마에서 살인적 시위진압이 즉각 중단되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가 건설되도록 1분간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구속자, 난민, 소수민족, 어린아이들을 위해 헌금하는 모금운동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천주교는 미얀마 군부의 폭력 사태를 깊이 우려한다는 서한에서 “군부가 시민들을 무력 진압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서울대교구의 모든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이 미얀마에 참된 민주주의가 회복되기를 온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불교도 사회노동위원회 주관으로 법회를 열고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며 군사정부의 폭력을 규탄하였고 삼보일배 기도회도 열었습니다. 원불교도 성명을 내고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였습니다. 바라기는 모든 종단의 염원이 하늘에 상달되어 미얀마에 민주화의 봄이 오고 군인들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국민이 주인이 되는 평화 세상을 세워가길 기도합니다. 우리교회도 내일부터 정오 기도회에 참여합니다. 다음주일은 미얀마를 위한 기도 주일로 정하고 특별헌금도 봉헌하여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군부의 기총 사격에서도 불구하고 요동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미얀마 국민들은 세계 양심에 호소하며 미얀마의 민주주의 실현을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하느님께서 이들의 희망을 이루어주시길 빕니다.
▪ 사순절
사순절은 회개와 결단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자신의 믿음을 성찰하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결단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인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진정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인가?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있는가? 또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의해 하느님을 위해 예언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고 그 사랑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된 하느님 나라 도래를 희망합니다. 이 거룩한 도전에 함께 합시다.
▪ 하느님의 사랑
오늘 성서일과는 요한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3장의 말씀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가장 사랑받는 성경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교회를 처음 나간 사람부터 가장 오래 믿는 사람까지 가장 많이 듣고 읽고 암송하고 감동받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깊게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 입장에서 읽혀지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성경 전체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전하는 종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지으셨고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지었습니다. 물론 이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습니다. 이집트 노예들의 탄원 앞에서 움직인 것도 하느님의 사랑이었고, 그들에게 율법의 안내자와 약속의 땅을 보장해 주신 것도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후 불평등과 불의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위협할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언자들을 세우셔서 하느님의 긍휼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긍휼은 내부자들만이 아니라 유대 영역 안에 있는 나그네와 이방인에게도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보다 강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기 동안 인도했습니다. 그 사랑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울려 퍼졌고 마침내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게 했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수를 박해하는 자들,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 존귀한 사람만이 아니라 미천한 사람들, 중풍병자들, 절뚝발이들, 시각장애인들,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됨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하느님처럼 대하라고 말씀하셨고 작은 자들의 친구로 사시다가 작은 자들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이후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을 대변하였고 지극히 작은 자들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 밑바탕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 은총과 믿음
오늘 서신서의 성서일과는 에베소서 2장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간 불순종의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나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아갔기에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와 함께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은총과 믿음에 대한 논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특히 예정론을 세운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으며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에게만 제한된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이 구원받은 자를 예정하셨다고 봄으로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편협성에 가두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알미니우스주의자는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것으로 확장되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으며 그의 선택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인간의 응답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고 인간의 응답과 책임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구원을 인간의 성취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는 복음적 신인협동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선행적 은총이 인간이 태어나면서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시어 하느님의 구원을 선택하게 하였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응답을 절묘하게 매칭시켰습니다.
하지만 은총과 믿음은 신비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은 상호관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믿음을 통해 확대되며 생명력을 얻고, 인간의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유용됩니다. 우리가 응답할 필요가 없다는 하느님의 당연한 은혜를 본회퍼는 값싼 은총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하신 하느님의 아낌없는 사랑은 자신을 내어 주는 은총의 행위임을 선언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믿음은 모두 동사입니다. 동사는 반드시 행동을 동반합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합니다.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바람은 인간의 실패로 좌절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말씀은 요한 공동체가 실현된 종말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제한받지 않습니다.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긍휼과 정의를 위한 하느님의 열정은, 하느님의 사랑이 나이와 인종과 국적과 신조와 성별과 성적지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고 선포하도록 촉구하라고 예언자들을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어떤 종교 권력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교리와 신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말씀 그대로 내부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외부자들을 포함한 모든 세상의 존재들에게 열려있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 영생과 심판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 예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무한이 공간 속으로, 영원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어 인간과 똑같은 몸으로 비롯되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사시다가 십자가 처형으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복음은 그 짧은 생애에서 솟아난 샘물이요, 우러나온 음악이거니와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게 그 핵심입니다. 하느님이 지구에 성육하여 오신 것은 신비이며 놀라운 은총이고 그 자체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선언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과 상관없이 하느님이 일방적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맞장구 없이 구원 교향곡은 연주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믿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온 우주에 충만하며 하느님의 사랑은 이미 모든 존재 안에 충만합니다. 그 은총과 사랑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인간의 응답으로 믿음이 요청됩니다. 결국 믿음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짓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지옥에 들어가는 것도 결국 우리의 믿음이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지금 여기에서 말입니다.
▪ 믿음의 신비
유영모 선생은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밑힘입니다. 밑의 힘. 한자로는 저력(底力)이라고 합니다. 저력은 낮은 힘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낮은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낮아지셨지요.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치시고, 가난한 자를 일으켜서 부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니까 으뜸이 되려 하지 말고, 꼴찌가 되고,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고, 으스대는 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믿음(Credo=>Cree/심장+dos/드린다)은 원어적으로 보면 ‘심장을 드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가 믿음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쓴 것은 믿음은 동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인식의 변화가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에 순명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믿음의 반대는 불신앙이 아니고 불순종입니다.

▪ 도둑을 만드는 사회
아주 영리하고 잘 생긴 세퍼트 개가 보신탕집에 팔려가기 위해서 개장수 차에 실렸습니다. 트럭 철망 안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먼저 타고 있던 똥개가 세퍼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영리하고 잘 생긴 세퍼트인데 왜 보신탕집으로 팔려 가냐?” 그랬더니 세퍼트가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아니, 담 넘어오려고 하는 놈도 도둑이고, 집 안에서 자고 있는 우리 주인도 도둑인데, 언제 짖어야 할지 누구를 짖어야 할지 헛갈려서 안 짖었더니, 주인이 집도 못 지킨다고 팔아버렸어. 이거야, 주인하고 말이 통해야 이 억울함을 풀지...”
어느 새 삶은 투기가 되고 있습니다. 자본이 주인이 되니 인간은 자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자본 앞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사족을 못 쓰고 있습니다. 자신의 특권을 이용할 수 있는 자나 고급 정보를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을 우롱하듯 부정을 저지릅니다. 그 길을 거부하는 이들을 무식하다고 바보라고 비난합니다.
이젠 공부도 신앙도 권력도 직업도 투기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천하에 근본을 이룬다는 농사도 이젠 투기가 되었고 집을 짓고 파는 일은 가장 큰 투기장이 되었습니다. 부동산은 최대 투기처가 되었습니다. 이번 LH투기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LH공사만의 일도 아닙니다. 강도 높은 조사와 수사에 고위직 두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두 분은 리스트에 올라온 대상이 아니었다니 앞으로 세밀한 조사가 더 필요합니다. 집이나 음식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땅과 집은 사는 곳이지 사고팔아 이익을 챙기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건 잘 되면 수 년 혹은 수십 년 연봉이 되니 누가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투기는 인간의 도의와 사회의 기본 원칙을 버리고 요행이나 바라는 기회주의자를 양산합니다. 정치와 경제, 특권층이 그렇게 부를 쌓았고 이 사회를 사악하게 움직여왔습니다. 그러니 누가 진실하게 살겠습니까? 하지만 진실이 무너지면 천박한 사회가 되고 순식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느님의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닭이 울면 일어나 알뜰히도 착한 일을 하면 순(舜) 같은 사람들이고, 닭 울면 일어나 살뜰히도 잇속을 챙기면 도적 같은 사람들이다.”(「맹자」 진심 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맹자는 착한 일을 하는 순(舜) 같은 이는 드물고 잇속을 챙기는 도적 같은 이들만 많다며 탄식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은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잇속을 챙겨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 거룩한 도전
누가 새로운 세상에 도전하겠습니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바보 취급받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면 누가 정직하게 살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그대로 살다간 십자가에 처형되는 데 누가 예수를 따라나서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도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 살다가 죽었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도 잔인하게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봤고, 병든 자들을 도와줬으며, 자신의 재산을 공동으로 사용하였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남녀노소 인종민족 혈연지연을 넘어 평등하게 존대하였습니다. 그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고 불이익을 예상해야했지만 그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공동체 안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존엄과 거룩함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처럼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따르다가 불이익을 당하고 고난을 받고 바보로 비난을 받는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비폭력으로 목숨을 내어 놓고 로마제국에 저항했습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저항은 없었습니다. 비폭력이 거대한 폭력을 이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감하게 자본주의에 대항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정체성은 사회민주주의가 맞습니다.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공유해야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저주스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태어난 모든 존재는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 최소한의 안정적 삶을 살게 해야 합니다.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족한 사람은 도우라고 잘 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든 자를 돌봐야합니다. 유식한 자들은 그 지식을 무식한 자들을 돕는데 써야합니다. 집과 먹는 것이 없어 인간 이하로 비참하게 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소박하더라도 안전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집이 있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대우받고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누구라도 무시당하거나 함부로 취급받지 않는 사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우리 이런 세상에 도전하고 희망해야합니다. 우주와 자연, 인간이 그저 이용의 대상이 아니고 함께 살아가는 신비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존중하는 우주관이 요청됩니다. 이런 일은 과학이 제공하지 못합니다. 종교가 감당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의 신비를 자신들의 호주머니에 두고 거짓 복음을 팔고 있는 종교로는 내 인생은 물론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지구 위기도 인간의 탐욕에 의한 자본주의 산업의 횡포와 건강한 우주관의 결핍에서 온 것입니다. 우주가 어떤 곳인지?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리로 가는지? 우주와 인간의 관계는 무엇인지? 그 신비를 알 수 없다면 우린 그저 우주를 소비재로 쓰다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 신앙의 신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자각을 토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나섭시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하느님의 나라 체제를 따라 살기로 길을 나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