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가 살아났다
상태바
죽었다가 살아났다
  • 백창욱
  • 승인 2021.03.07 23: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성리 진밭교 아침기도회(21. 3. 6)     
누가 15:11-32 “죽었다가 살아났다”


“저는 안희정의 비서 김지은입니다. 그동안 안희정에게 수차례 성폭력을 당해 왔습니다.” 2018년 3월 5일, 김지은씨가 jtbc 뉴스시간에 출연하여 그동안 자신이 전 충남지사 안희정으로부터 당한 성폭력을 세상에 폭로했다. 김지은씨는 수행비서라는 명목 하에 성폭력뿐 아니라 노동권과 인권침해에까지 인간의 기본권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뉴스 등장 이후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2차 가해를 당하며 살고 있다. 정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숨죽이며 겨우겨우 연명한다. 살기 위해서 양심고백을 했지만 죽음 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편에 선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음해비방을 받아야 했다. 

김지은씨가 쓴 책, 『김지은입니다』-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을 보면, 피해자 김지은씨가 안희정으로부터 어떤 인간상실을 겪었는지, 그 후 거대권력을 상대로 얼마나 마음 졸이며 힘겨운 싸움을 벌여왔는지가 생생하게 나온다.  

“(성폭력) 범죄가 끝나고,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늦은 시간 안희정은 내게 말했다. 아침에 아내가 오기로 했으니 청소를 하고 나가라. 내가 청소하고 있을 때 골프 채널을 보던 안희정이 빨리 안 나가고 뭐하냐며 재촉했다. 그 격앙된 목소리에 놀란 나는 청소하며 손에 주운 한 줌의 쓰레기들을 어디에 버려야 할지 몰라 가방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밖으로 나왔다. 처참했다. 그날 비참했던 내 심정이 마치 그 꾸겨진 쓰레기와 같았다.”(17-18쪽) 

“삼인성호라 했던가. 그런 식으로 몇몇이 모여 거짓을 말하니 순식간에 나는 세간에서 ‘그런 여자’가 되었다. 사심으로 일을 한, 지사의 사생팬인, 신뢰할 수 없는 이상한 여자, 그리고 나를 향한 그런 프레임화는 이후 이어진 지난한 재판 과정 내내 그들의 집요한, 거의 유일한 전략이었다.”(21쪽) 

“2018년 3월 5일,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기까지 나는 오랜 시간 두려움에 떨었다. 안희정은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였고 미래 권력이었다. 미래 권력은 현재 진행형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청와대부터 정재계에 이르기까지 안희정과 관계를 맺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차기 대통령이라 여겼다. 그런 대상을 향해 미투를 한다는 것, ‘지금 당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안희정 개인만을 향한 한정된 외침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정치적 지위와 그가 관계 맺은 수많은 이에게 맞서는 일이었다. 나에게 미투는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힘과 싸움을 시작하는 일이었다.”(22쪽) 

‘안희정 대통령 만들기’라는 강한 대의명분 아래 다른 모든 사실은 수면 아래 숨기는 거대악 구조에 끝내 눌리지 않고 주체선언을 한 김지은씨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안희정 성폭력 고발기록을 읽으면서, 내가 크게 안도한 것은 다음 대목이다. “어느 친구가 내게 말했다.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영부인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시 한번 고마워.”(279쪽) 정말이지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면 어떡할 뻔 했을까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다. 
하지만 이 친구의 말은 또 다른 씁쓸함을 준다. 정치인 안희정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유력 정치인들에 대해, 참 인간상은 사라지고 정치와 매체가 가공, 포장한 허상의 인간상을 그 사람으로 알고 장단 맞추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다.   

오늘 복음은 ‘돌아온 탕자 비유’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비유 중 가장 많이 회자하는 이야기이다. 비유의 교훈은 명백하다.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다.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 나간 작은 아들은 가진 것을 모두 허랑방탕으로 없애고 거지꼴로 연명하다가 크게 뉘우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아버지는 빈털터리로 돌아온 아들을 나무라기는커녕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면서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연다. 그런데 큰 아들은 아우의 귀환에 대해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되레 아우를 환영하는 아버지의 처사를 매우 못마땅해 한다. 

이 비유에서 작은 아들, 큰 아들은 누구를 암시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작은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큰 아들은 바리새, 율법학자들을 암시한다. 예수가 세리들, 죄인들과 흉허물없이 어울리고 음식까지 나누자, 바리새, 율법학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몹시 못마땅해 하기에 그들 들으라고 비유말씀이 나온 것이다. 비유의 대상이 바리새, 율법학자들인 것을 감안하면, 비유제목도 ‘탕자의 귀환’보다는 ‘큰 아들의 질투’가 더 적절할 것 같다. 

한국 사회는 이상하게도 약자들의 호소에 대해 말할 수 없이 인색하다.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 도지사에게 희생당한 한 여성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호소하는데 그 호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고, 성자 수준의 도덕성 잣대로 검열하려 든다. 상대적으로 가해권력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다. 그런 위선적 태도는 자신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을 은폐하는 심리다. 그런 가혹한 처사는 최근 두 명의 성소수자를 벼랑으로 내밀고 말았다. 약자에게는 한없이 가혹하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강퍅하고 무덤덤한 세태에 뭐라 할 말이 없다.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한국사회가 통탄스럽다. 하늘도 우리에게 우리가 한 데로 갚을 것이 두려울 뿐이다. 아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