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십자가를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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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고
  • 백창욱
  • 승인 2021.03.07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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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21. 2. 28) 사순절 두 번째 주일
마가 8:31-38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늘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1) 2월 25일 목요일, 소성리에 또 경찰이 침입했습니다. 2017년부터 치면 스무 번째 쯤 됩니다. 이골이 날 법도 한데, 침탈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문재인은 가덕도 공항부지를 둘러보면서 가슴이 뛴다고 했습니다. 똑같이 가슴이 뛰는데 상황은 어찌나 다른지요. 
상황이 발생하면 항상 종교집회를 합니다. 보통 원불교가 먼저 하고 그 다음에는 기독교가 하는데, 이 날은 기독교가 먼저 하게 됐습니다. 저로서는 이 시간이 말할 수 없이 부담스러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피할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대오를 유지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지만 어쨌든 인도하는 사람은 투쟁력을 끌어올려야 하고 내용도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도와주셔서 분위기는 좋았지만, 제 마음은 많이 착잡했습니다. 

6년 동안 소성리를 출입하면서 드는 소회는 사드철거투쟁은 ‘내가 진 십자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대신 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현실적으로 없습니다. 대체가 되지 않고 그냥 빈 자리로 남습니다. 이 일이 명예를 누리고 이익을 얻는 일이 아니기도 하고 또 세월이 어느덧 6년째가 돼서 끈기와 인내력의 시험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어제 대구 MBC 열린TV희망세상에서 시민이 제작한 영상을 방송했습니다. 아사히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일상을 담았습니다. 지난주에 반가운 뉴스가 나왔습니다. 투쟁 6년 만에 아사히 자본이 처음으로 대책을 내 놓았습니다. 
“남은 해고자 고용하고 그동안 일 못한 손실에 대해 보상금 주겠다. 고용 대신 일시금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3억 4천 만원 준다. 단 차헌호지회장은 안 된다”는 내용입니다. 
언뜻 보면 달콤한 제안입니다. 그런데 남은 해고자 22명은 노조를 인정받고 회사에 들어가는 게 우리 입장이라며 회사 제안을 간단하게 거절했습니다. 

아사히투쟁은 한국 노동판의 상징이 됐습니다. 이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 어떻게 끝을 맺느냐가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의 갈 길을 제시하는 전례가 됩니다. 여기서 쉽게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가자는 것이 아사히 해고노동자들의 결의입니다. 이 결의를 끝까지 잘 지고 가는 게 아사히 비정규지회가 진 십자가라는 생각입니다.  

3) 처음 십자가는 인류가 만들어 낸 최악의 처형방식이라고 합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을 지탱해 주는 형벌입니다. 반란자 수천 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전시해 놓은 광경을 보십시오. 그 자체가 제국 전체에 억제효과를 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새들이 맨 살을 쪼아 먹습니다. 썩은 살에서 나오는 악취는 지독하게 역겹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도시 외곽에서 형을 집행했습니다. 십자가형도 다양했습니다. 거꾸로 매달거나 성기를 꼬챙이로 꿰거나 양팔을 멍에에 매거나 했습니다. 
예수는 바로 이 로마의 십자가 처형으로 죽었습니다. 이것이 처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요? 

4) 십자가를 지는 분별기준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처럼 하나님의 일이냐 사람의 일이냐로 분간합니다. 둘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예수가 수난을 말할 때 베드로는 격하게 반대합니다. 왜 그랬나요? 자신이 믿고 있는 그리스도상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수난당하는 그리스도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식 믿음의 표본입니다. 
예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꾸짖습니다. 어째서 베드로는 사탄이라는 말을 듣는 건가요? 베드로의 행위는 자신과 전 인류로부터 영원한 구원을 빼앗아버리는 행위가 돼버렸습니다. 사려분별이 없는 그릇된 열심은 얼마나 위험한가요. 
우리는 베드로의 열심보다 그리스도의 판단을 중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지각에 충실하지 말고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을 순수히 붙잡아야 합니다. 좋은 의도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에 대해 성찰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은 세상의 일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는 세상 일이 무엇인가를 선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15,16)
내 행위가 어디를 지향하는가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게 사람의 일이냐 하나님의 일이냐를 분간합니다.  

5) 십자가는 자기에게 부여된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각자 자신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삽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예를 들면, 이병철님의 경우 성서공단의 작은 사업장에서 전혀 권리투쟁을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성을 뚜렷이 보여주는 산증인입니다. 병철님이 이 노선, 노동자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분에게 주어진 십자가입니다. 
또한 가정은 제 일차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입니다. 가정의 평화는 하나님나라의 축소판입니다. 가정을 소홀히 해서 생기는 부작용, 물질낭비는 실로 엄청납니다. 어째서 중요한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생업도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생업을 감당해야 합니다. 공적영역 활동도 귀중한 십자가입니다. 사적영역에 비해 현저히 무심한 영역이기에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6) 오늘 복음의 결론말씀은 이렇습니다.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절)
주님 말씀이 나의 이해, 이익과 배치되더라도 주님 말씀을 우선시하고 순종할 때 진정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따름의 실천은 자기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는 것입니다. 예수는 열 두 영이나 되는 천사를 부를 수 있지만 무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자기 뜻 대신 아버지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의 일을 이루게 됩니다. 주님의 일은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쁩니다. 기쁨이 십자가 삶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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