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 진밭교 아침기도회(21. 2. 6)
마가 6:30-34 “그들을 앞질러 갔다”
한국교회는 70년대부터 98년 IMF가 터지기 전까지, 대략 한 세대 가량 수적 부흥기였다. 한국 경제가 산업화로 질주할 때, 한국 교회도 보조를 맞추듯 함께 물리적으로 성장했다. 코로나 직전까지 잘 나가던 교회나 단체 모두 이 때 자리를 잡고 번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부독재가 민중들의 숨통을 틀어쥐고 경제발전 역시 양극화로 가는 길이었지만 당장 먹고사는 게 급해서 민주화든 평등경제는 모두 뒷전이었다.
농촌에서 겨우겨우 먹고 살던 민중들은 도시로 도시로 밀려들었다. 대중의 최대 화두는 생존이었다. 도시로 밀려난 그들에게 교회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안식처였다. 세상은 먹고사는 일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지만 그래도 교회에 가면 편안했다. 자신들을 위로하며 삶의 동기를 격려해 주었다.

통성기도, 방언, 신유집회 같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영성은 자연스런 열매였다. 민중에게는 이러한 영성이 딱 맞았다. 어디 가서 자신들의 한 맺힌 가슴을 털어놓으랴.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누구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랴. 그들에게 마음껏 소리 지르는 통성기도는 카타르시스(정화)였고 삶의 탈출구였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방언이라도 해야 진정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려주신다는 존재감을 맛볼 수 있었다. 또 그때도 정신이 아프든 몸이 아프든 아픈 사람이 참 많았다. 지금이야 전국민 의료보험 시대이므로 병원 가는 길이 자연스럽지만 그때는 아프면 그냥 생으로 앓았다. 진짜 죽을병 정도 돼야 병원을 갈 수 있을 뿐, 저절로 나면 다행이었다. 죽을 병이라도 병원에 갈 수 없는 민중은 어떻게 하랴. 갈 데 없는 민중에게 신유집회는 고침 받든 못 받든 간절한 동아줄이었다. 다른 병자는 죽어나가도 내가, 내 자식이 고침 받으면 충분했다. 고침받는 확률이 1%라도 그게 나면 상관없었다. 이처럼 그 시대 민중에게 여하튼 교회는 실질적이든 정신의 마취든 삶의 시름을 어루만져주는 의지처였다.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대중의 과도한 몰입과 동일시는 교회를 타락시키는 자양분이 되고 말았다. 교회지도자들은 대중의 헌신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쌓았다. 급기야 교회는 종교사업체가 되고 말았다. 튼실하게 불어난 교회재산은 이판사판 싸움의 진원지가 되고 말았다. 어제의 형제자매가 남남보다 못한 원수가 됐다. 지금 교회대중이 이단사이비, 비주류로 몰리는 이유에는 주류교회의 타락이 가장 크게 기여했다. 도긴개긴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 부흥기에는 주류교회에 목을 매었던 대중이 이제는 주류에서 빗겨난 종파들로 이동했다. 희한하게도 코로나 덕에 그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이만희의 신천지 사이비집단,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같은 극우반공신앙주의자, 극단적인 정복선교를 주창하는 BTJ, 영어매력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사설단체인 IEM 국제학교같이 족보도 불투명한 근본주의 종파들에 사람이 몰려서 교회의 가치가 엉뚱하게 발산하는 것을 목도한다. 주류교회든 비주류교회든 대중의 몰입과 동일시가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말이다. 대개는 지도자의 사심에 이용당하고 대상화된다.
오늘 복음을 보면 민중들의 행보가 간절하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듯이,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바삐 움직인다. 그도 그럴 것이 기댈 데가 없는 민중들에게 예수 소식은 가뭄에 단비다. 병자들을 가리지 않고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말씀이 종교업자와 다르다. 민중의 행보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고픈 갈망도 작용한다. 그래서 그가 있는 곳이면 언제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그런데 예수는 막무가내로 다가오는 무리들을 내치지 않는다. 그대로 수용한다. 밥도 먹지 못할 정도로, 쉬지도 못할 정도로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짜증이 날 법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그저 방해받지 않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일행의 동선까지 미리 파악하고 앞질러 그곳에 간다. 그들도 그만큼 간절한 것이다. 진정 고침 받고 싶고, 심령을 울리는 말씀을 듣고 싶은 거다. 예수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사 계획을 바꾼다. 쉼을 미루고 거기서도 하나님나라 도를 편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은 단 한 번도 민중을 배신하거나 수단화하거나 이용하지 않아서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드철거투쟁을 하는 우리도 간절하다. 사드를 철거시킬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다. 6년이 지나는 동안 기고 구르고 매달리고 달려가고 소리쳤다. 몸으로 마음으로 온전히 투신했다. 한적한 곳으로 쉬러 가던 예수는 민중의 갈망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하나님나라 도를 전했다. 그처럼 전쟁무기 사드 없는 한반도, 일상의 평화를 누리기를 갈망하는 소성리 민중의 염원도 기어이 성취될 것이다. 정권은 걸핏하면 소성리를 학대하지만 그 학대는 된서리를 맞고 말 것이다. 사드철거는 평화, 자주, 독립, 정의를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권이 순리를 이길 수는 없다. 일세기 갈릴리 민중이 앞질러 갔듯이 우리도 사드없는 평화의 길을 앞질러 내달리자. 예수가 동행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