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벌레의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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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벌레의 알
  • 박성율
  • 승인 2021.01.3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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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벌레의 알>

사진: 대벌레의 알- 출처: 생태학(2018) 책 중에서
사진: 대벌레의 알- 출처: 생태학(2018) 책 중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조리할 재료를 찾아 본다. 심중에 있는 말 끝내 못하고 넣어 두었던 후회가 꽁꽁 언채로 켜켜이 쌓여있다. 날카로운 발톱을 품은 분노가 냄새를 풍기면서 너 자칫하면 썩는다고 흘러내린다. 달 빛소리 내려와 앉은 이야기거리들은 시들어서 뭉개져 있다.

 밤이면 밤마다 꺼내서 먹을까 하다가 망설이던 게으름도 이젠 유통기한을 넘긴채 뒷켠에서 나온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저장해둔 냉장고는 ‘냉창고’로 변해있다. 별빛 우수수 떨어져 담긴 붉은고추, 빛소리를 저장하겠다고 넣어둔 호박, 아직 피지못한 봄향기를 담은 취나물까지 꾸역꾸역 나온다. 피곤한 삶, 후회로 가득한 삶이 무리지어 모여든 항구처럼 냉장고엔 공허한 바람마저 차갑게 분다. 

  자랑거리도 찬란함도 없는 내 삶이 드러나는 냉장고다. 그때 한쪽에서 지난 여름 ‘돌발해충’ 조사하다 모아둔 대벌레 알이 든 비닐봉지가 나왔다. 물끄러미 들여다 본다.

 대벌레는 배 마디가 대나무 마디같아 대벌레로 부른다. 포식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식물의 일부처럼 위장하고 산다. 날개가 발달하지 못해 막대기처럼 걸어다녀서 ‘걸어다니는 막대’라고 부른다. 대벌레는 번식이 특이하다. 평소엔 천적을 피하다가 번식기가 되면 스스로 노출해서 잡아먹힌다. 직박구리,어치 같은 새가 먹는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날아간 새는 3시간 정도후 배설한다. 뱃속에 들어간 대벌레의 몸속의 알들은 뱃속의 강한 산성위액으로 식물의 씨앗처럼 단단한 알껍데기가 벗겨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화한다. 어미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신비다. 새에게 먹히냐 아니냐가 대벌레 알의 부화를 결정짓는다. 먹혀야 부화하는 알이다. 달팽이가 멀리 퍼지기 위해 일부러 새에게 먹히는 것처럼 대벌레도 그렇다. 찬란함도 자랑거리도 없으면 어떠랴.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먹힘으로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살만하지 않겠는가? 자랑거리 하나 없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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