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문(21. 1. 24)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
마가 1:14-20 “곧 그물을 버리다”
미국 바이든이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파리기후협약에 다시 가입하는 행정명령 승인입니다. 자본주의의 끝판왕 미국이 웬만하면 자기들 욕심대로 계속 갈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후문제는 자기들 존립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나 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에너지소비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기후위기에 있어서는 미국을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잘 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바이든이 취임하자마자 안 좋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22일 금요일에 소성리에 경찰들을 풀어서 주민시민들을 억압하고 트럭 삼십 여대를 반입했습니다. 사드기지 공사장비, 자재들입니다. 작년 코로나 발생 이후에만 여섯 차례입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사드배치 안정화를 계속 압박한다고 합니다. 문재인이 바이든에게 바치는 첫 번째 선물입니다.
바이든은 취임식 연설에서 더 이상 우리 끼리 소리치고 싸우지 말자면서 통합을 호소했습니다. “통합없이 평화가 없다. 비통과 분노가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이든이 싸우지 말자고 한 그 화살이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그 날 우리는 하루종일 소리치고 비통하며 분노하고 경찰과 싸워야 했습니다. 제국의 안녕 대신 피식민지 한국 사람이 갖은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미국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제 나라 시민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난과 억압을 계속 당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정부는 코로나 방역차원에서 거리두기하자, 대면모임 자제하자, 5인 이상 모이지 말자 선전합니다. 그래서 소성리도 방역에 협조하는데 정권은 미국사드기지를 위해서는 방역이고 뭐고 다 필요 없습니다. 작전을 행하려면 수십 개 중대 경찰들이 좁은 소성리에 모이고 주민시민들을 들어낼 때 뒤섞여서 아수라장이 되는데 정권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주민시민들은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습니다.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분단이라는 구실 하에 언제까지 이런 모순과 불의를 계속 견뎌야 하는지, 한미동맹이라는 식민지관계를 언제까지 당해야 할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통한 심정입니다. 한미동맹 신주단지가 그렇게 절대적인지, 그걸 끝내고 자주적으로 살면 정말 나라가 안 되는지. 하고자 하는 마음도 실천의지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정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가 바로 이 때라는 심정입니다.
마가복음 별명을 짓는다면, ‘곧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곧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복음서에서 ‘곧’ 의 횟수를 알아봤습니다. 새번역성서에서 마태는 28회, 누가는 24회, 요한은 25회입니다. 반면에 마가는 51회입니다. 개역개정에는 무려 61회가 나옵니다. 마가복음이 다른 복음서에 비래 분량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곧은 다른 복음서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를 볼 때 마가복음서의 성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때가 긴박하다.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곧의 낱말 뜻은 ‘시간적으로 사이를 두지 않고 바로’ 라는 뜻입니다. 즉시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그 긴박함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대목에서 바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거나 배를 남겨두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제자들이 생업현장에 있다가 예수를 따라 나서기까지 중간에 많은 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합니다. 부르자마자 따랐다고 느낄 정도로 아주 속도감있게 부름과 따름을 처리합니다. 부름받은 사람들은 주저함 없이 결단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강력한 암시입니다.
그런데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부름받을 때 삶의 자리가 다릅니다. 같은 어업에 종사하지만 시몬, 안드레와 야고보, 요한이 하는 일이 차이가 좀 있습니다. 시몬, 안드레는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고기잡는 어부입니다.
반면에 야고보,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일에 비해서 노동강도가 조금 덜합니다. 이들에게는 어부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 아버지와 일꾼들을 배에 남겨 두었다는 표현이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아버지 세베대는 일꾼들을 고용한 사업주입니다. 배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야고보와 요한은 큰 배 선주의 아들입니다. 계급으로 따지면 야고보, 요한은 중산층이고 시몬, 안드레는 노동자입니다. 그러나 계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나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어떤 사람이라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암시입니다. 열두 제자 면면을 보면, 더 확실합니다. 예수운동 처음 일꾼들은 인적구성이 매우 다양합니다. 3장에 사도 열둘이 나오는데 그 중 한 사람 시몬은 열혈당원입니다. 또 다른 제자 마태는 세리입니다. 말하자면 두 극단에 있는 자가 한 편이 됐습니다. 마태가 세금징수 사업자라면 열혈당원 시몬에게 진즉에 칼 맞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말단 세리여서 같은 민중이라는 유대감으로 뭉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까지 제자로 삼았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받아준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는 어떤 운동을 했나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복음 내용은 네 가지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입니다.
‘때’와 ‘회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시간에 대해 두 단어를 썼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말 그대로 물리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지금 몇 시에요?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가 타임(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타이밍(때)입니다.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그 타이밍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크로노스에 있지 않고 카이로스에 있습니다. 때를 분별하여서 그 때에 맞게 살 때, 인생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그리스말은 메타노이아입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했는데, 이 말은 ‘생각을 바꾸라’입니다. 생각을 바꾼다는 말은 기존의 자기 관념이나, 고집, 관습, 신념을 허물어뜨린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새 세상 질서이므로 그에 맞게 살기 위해서는 메타노이아를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이 메타노이아를 해야 합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자신들의 생존수단인 그물을 버렸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를 배에 남겨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본 것인가요? 어떤 자극이 있었기에 곧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것인가요? 아무리 예수님이 불러도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자원해야 따를 수 있습니다. 그들을 움직인 강력한 무엇이 있습니다. 성서에는 그물을 버리기까지 제자들이 어떤 마음의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천상 이 부분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결단하나요? 계속 이렇게 살 수 없다고 할 때 결단합니다. 사람을 계속 속박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을 살 때 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메타노이아 합니다. 제 숨 편히 쉬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돌이킵니다. 그러자면 자신이 잡고 있는 그물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버려야 할 그물은 무엇인가요? 짐 되는 것이 있는지 살피고 응시하십시오. 있으면 버리십시오. 무엇보다 내 마음 내면에 엉켜 있는 그물을 걷어내는 일에 진력하십시오. 내가 사용하는 시간, 내가 쓰는 돈, 여가생활, 마음의 생각이 건강한지 검증하십시오. 성령의 감동으로 잘 버리십시오. 곧 결단하고 자유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