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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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시오
  • 백창욱
  • 승인 2021.01.1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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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21. 1. 17) 주현절 후 두 번째 주일
요한 1:43-51 “와서 보시오”


존 쉘비 스퐁감독이 쓴 『요한복음』에 대해 작년 5월 10일 주일설교 때 일부를 소개했었습니다. 스퐁감독은 요한복음을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직접 말한 단어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세미나 회원들이 만든 책 『오복음서』(네 복음서에 도마복음)를 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오복음서는 본문을 색상별로 분류했습니다. 빨강색은 역사예수가 한 말씀, 분홍색은 예수의 말씀과 비슷한 말씀, 회색은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이라는 증거가 부족한 말씀들, 검정색은 역사 예수가 결코 한 말씀들이 아닌 것을 가리킵니다. 이 분류에서 요한복음은 전체 중 오직 한 구절만 분홍색으로 표시했습니다. 그 말씀은 요 4:44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밝히시기를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가 자기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요한의 핵심 주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오복음서는 그 외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모든 발언들은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표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옵니다.  

또 스퐁감독은 요한복음에서 문자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범위는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 인물들 중 누구도 역사적 인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스퐁감독은 요한 첫 장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에 대해 이렇게 해석합니다. 
“나는 나다나엘이 요한복음의 등장인물들을 문자적으로 읽는 것에 도전하는 인물, 즉 모든 인물들을 이해하는 열쇠로 1장에 소개된 것으로 믿는다. 나는 그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며, 초기 그리스도교를 요한공동체와 연결하는 상징이라고 확신한다.”라고 합니다.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지 보겠습니다. 나다나엘의 등장부터 예수님과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특징들을 보겠습니다.
1) 안드레가 베드로를 예수께 데리고 왔듯이,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 데려옵니다.
2) “46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는 말에서 보듯이, 나다나엘은 갈릴리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집니다.  
3)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극찬합니다. “47절,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4) 예수께서 전지적 관점에서 나다나엘을 봅니다. “48절,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여기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구절은 랍비들이 토라를 연구하는 장소를 뜻합니다. 
5) 예수는 나다나엘에게 한 예언을 합니다. “51절,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환상을 연상시킵니다. 
“창 28:12, (야곱이)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다섯 개 특징 대목들은 다 복선이 있다는 것이 곧 밝혀집니다.

나다나엘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면 요한저자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이런 소개를 하는 것인가요? 그는 누구인가요? 지금까지 파악한 나다나엘의 정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분명 열두 제자와 같은 등급입니다. 그는 분명히 가장 먼저 부름받은 제자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예수가 직접 개인적으로 제자로 부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복음서들의 열두 제자 명단에 결코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또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다른 말로 율법의 그늘에 숨어 매우 깊이 토라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미리 그리스도인으로 예정된 것처럼 묘사됩니다. 또 그는 ‘거짓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습니다. 

우리가 아는 성서 인물 중 위에 말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있나요? 나다나엘은 누구를 말하나요? 이 사람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어떤 인물로서 요한이 자신의 선구자로 인정하고 싶어 할 만 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바울입니다. 이제 바울이 나다나엘과 얼마나 유사한지 바울 소개를 보겠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열심에 사로잡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빌 3:6) 다른 어느 누가 ‘거짓 없는 이스라엘 사람’일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에서 예수가 바울에게 나타났을 때, 바울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행 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요한저자는 바울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선택했다고 봅니다. 동시에 그의 독자들에게 요한복음과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비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의도를 1장의 나다나엘에서부터 드러냈다고 봅니다. 이처럼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역사적인 인물들이 아니라 문학적인 인물들로 채웠고 또한 그 인물들을 중심으로 예수이야기를 구성해 나갈 것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이상은 스퐁감독의 저서 『요한복음』의 7장, <비문자주의자 요한>에 대한 압축설명입니다. 

스퐁감독이 이토록 성서를 비문자적으로 읽도록 치열하게 안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는 말하기를 “하느님의 실재 속으로 향하는 예수의 여행은 단지 문자주의 너머로 가는 여행일 뿐만 아니라 성서와 신조, 교리 너머를 향한, 그리고 종교 자체를 넘어가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접하니, 제가 성서를 너무 좁게 봐 왔다는 인식을 합니다. 

나다나엘을 예수께 인도한 빌립은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깨달은 게 틀림없습니다. 예수를 확신있게 소개합니다. “45절,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와서 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말투는 자신이 경험한 게 있으니 나를 믿으라는 자신있는 음성이기도 합니다. 스퐁이 성서를 비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하느님의 실재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이라고 말한 것처럼, 빌립 역시 예수님의 실재 속으로 들어가서 인격의 합일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친구에게 자신있게 예수를 권합니다.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예수의 실재로 충만한 신앙이기를 빕니다. 충만한 것은 자연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나의 내면을 예수의 실재로 가득 채우십시오. 그래서 이웃에게도 자연히 드러나도록 하십시오. 사랑이 충만하고 거짓 없는 진리의 세계를 ‘와서 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기를 빕니다. 항상 예수의 실재로 충만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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