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召命과 사명使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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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召命과 사명使命
  • 양재성
  • 승인 2021.01.1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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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召命과 사명使命
사무엘상 3장 1~11절, 요한복음 1장 43~51절

▪ 주현절(主顯節, Epiphany "주님이 나타난 날") 
  오늘은 새해 들어 세 번째 맞이하는 주일로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의미를 담아 예수가 공적으로 대중 앞에 나타난 때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대체적으로 30세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의 소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공현절(公現節 "공식적으로 나타난 날")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시대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실지 알 수 없지만 각 자 처한 상황에 따라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오셨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중에 계시는지 알아야 하고 예수를 만나야 하며 우린 그 예수를 신뢰하고 섬기고 사랑해야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예전이나 지금도 언제나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 프란치스코의 영성靈性
  빈자의 성인이요 생태 성인으로 알려진 프란치스코가 ‘죄 중의 삶’에서 벗어나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방황과 내적 갈등, 그리고 십자가군의 기사가 되어 전쟁에서 공을 세우겠다는 꿈의 좌절, 포로 생활과 열병으로 인한 병고로 인간 육신의 나약함과 한계 등을 체험하는 가운데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고집과 욕망이 점차로 무너지는 과정을 거친 후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유독 문둥병자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자와 함께 동굴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일 해가 떠오르면 길을 가다가 종소리를 들을 터인데 문둥병자를 만나게 될 것이니. 그 문둥이에게 입을 맞추”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곳이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잠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은 프란치스코는 그의 제자와 함께 동굴 밖으로 나오자 얼마 안 가서 종소리와 함께 문둥병자가 다가왔고 그 흉측한 모습에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코는 반쯤 없는데다 삐뚤어졌고 입술은 부어 골음이 났고 손가락도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떤 힘에 의해 문둥병자에게 자신을 내던져 그를 껴안은 다음 머리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고는 문둥병자를 팔로 안아 올려 자신의 옷으로 감싸고선 천천히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도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틀림없이 그를 맡길 수 있는 병원이 근처에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도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품에 안고 있던 문둥병자가 사라진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돌아서서 그의 제자를 쳐다보았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다 닫았다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눈부시게 환했습니다. 불타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의 콧수염, 구레나룻, 코, 입, 모든 것이 불타서 없어져 버린 듯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그가 땅에 엎드려 흙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보자기에 싸서 안고 가던 문둥병자는 그냥 문둥병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프란치스코를 시험하기 위해 문둥병자 형상으로 이 세상에 내려온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같이 가던 그의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이렇게 이해했어요. 만일 우리가 모든 문둥병자들, 불구자들, 죄인들의 입에 입을 맞춘다면 ……” “이런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입을 맞춘다면, 오, 하나님, 이런 말을 하는 저를 용서하시길 …….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성자 프란체스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傾聽과 召命
  오늘 제1성서의 말씀은 사무엘상 3장의 말씀입니다.
  당시 제자장인 엘리와 어린 사무엘에게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길을 제시했던 분은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께서도 엘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를 통해 당신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엘리가 아닌 어린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저버린 엘리에게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떠난 엘리는 허깨비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유약하기 짝이 없는 어린 사무엘, 한 번도 하나님과 대면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적이 없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총애를 입고 영도자가 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선 말하는 자가 아닌 “주님 말씀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가 이렇게 거대한 집단이 되었음에도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은 잘 듣는 데서 즉 경청에서 시작됩니다. 기독교는 경청하는 신앙입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소리에 경청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당신의 소리를 경청하자 사무엘과 함께 하셨고 사무엘의 예언을 다 이루셨습니다. 사무엘의 예언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은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하시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그의 믿음은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 더 잘 압니다. 

▪ 예수의 권위
  오늘 복음서의 성서일과는 요한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1장의 말씀입니다.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인류의 시원을 우주의 시원으로까지 올라갑니다. 생태신학자 토마스 베리는 우주이야기에서 인간의 유전자는 빅뱅에서 시작되었으니 137억년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나이는 137억 살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놀라운 신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시원을 통해 기독교 복음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주의 근본 원리로 말씀, 즉 로고스로 존재하셨습니다. 로고스는 말씀이며 이는 하나님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상징은 율법과 예언서입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 모세요. 예언서를 상징하는 것이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 권위는 가히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의 권위를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 모세보다 더 큰 이로 소개하고 엘리야보다 더 큰 이로 소개합니다. 엘리야의 권위를 부여받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의 신발 끈도 풀고 맬 자격조차 없다는 표현에서는 상대적으로 예수의 권위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려내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드님으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 성육신(Incarnation)의 神秘
  모든 종교는 자신의 죄를 씻고 한계를 넘어 신에게 이르기를 원합니다. 대부분의 이단들과 초대형 교회들은 이 상황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온갖 추한 몰골로 혹세무민하고 있습니다. 사기꾼들입니다. 그 끝은 정말 불행합니다. 
  신에게 이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온전히 신에게 귀의해야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일반 소시민들은 결국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신앙 혹은 영성 귀족들이 나타나 종교의 지배구조를 만들어 종교적 불평등이 강화되면 또 다른 소외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은 당신의 권위를 벗어놓고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인간이 당신처럼 되는 것이 불가능하자 당신이 낮고 천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성육신, 이는 인간을 어여삐 여기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입니다. 성육신은 독특한 교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하나님이 되게 하는 사건이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는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안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배우고 기도하며 점점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아갔습니다. 마침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는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 놓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 것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의 길, 즉 스스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성육신의 길, 그 길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움으로 충만해지는 길이요,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길입니다. 이 길이 예수의 길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얻습니다. 그 믿음엔 예수의 길을 걷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비천한 곳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는 제자를 부르는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제자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 예수를 소개합니다. 
  “와 보시오. 율법과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가 바로 나사렛 요셉의 예수요”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있었고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냐며 별 기대없이 빌립을 따라갑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태어나지 않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예언된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사렛은 비천한 곳이었습니다. 누구도 관심 갖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을 접은 곳이요, 기대가 사라진 곳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저주하고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곳에서 인간의 희망이 멈춘 그곳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태동하였습니다. 화려한 왕궁이 아니고 마구간에서 하나님의 아드님이 태어나듯이 베테랑 엘리가 아닌 어린 사무엘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듯이 율법사들과 선지자들이 아닌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민중 예수에게서 그리스도가 오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놀랍고 신비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예수는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보자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저에겐 거짓이 없다고 말하자 나다나엘이 자신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을 건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예수에게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거기서 보았다고 하자 나다나엘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을까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추측하건데 나다나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누구보다도 기다린 듯합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일은 율법을 읽는 일인데 아마도 나다나엘은 율법을 읽으면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 로마 제국에서 해방시킬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을 예수께서 알아보셨던 것입니다. 
  이토록 위대한 만남은 우연히 이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대면이 없었다면 나다나엘이 예수를 메시야로 알아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어”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금방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길을 걷는 제자가 됩니다. 

▪ 부르심의 미학

김춘수의 <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좋아하는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름을 부르기 전엔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부르는 순간 놀라운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부여해준 권한이 모든 생명에게 이름을 부여해주고 그 이름을 부르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일은 새로운 관계 맺음을 의미합니다. 

▪ 호명신학呼名神學
  기독교는 호명신학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의 의해 세워진 게 기독교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방주를 지어 다음 세상을 준비하였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을 믿고 길을 감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출애굽의 역사를 만들었으며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부르심을 듣고 가나안을 정복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부정한 자들을 심판하였고 이사야,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일일이 제자들을 다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절 아침에 당신의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을 때서야 마리아는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름을 부르기 전엔 동산지기로 알았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이 부활했음을 드러냈고 제자들에게도 알리라고 당부합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베드로의 위치는 확고부동한 일인지하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부활을 가장 먼저 경험한 자를 베드로가 아닌 보잘 것 없는 여인, 막달라 마리아로 증언합니다. 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렇게 기독교는 가장 작은 자들을 그 중심부에 둔 종교입니다. 

▪ 선교적 사명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각 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요 우리들의 주님이라는 진리입니다. 예수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신비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청년에게 자신을 투여했고 예수의 신앙과 삶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예수 자체가 구원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삶과 예수의 길 걷기가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이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 길이 기독교의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회 선교사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때로는 입으로 때로는 몸으로 때로는 삶으로 증거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각 자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십시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 지를 보여주십시오. 이 일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궁극적 목적입니다. 

 “와서 보십시오. 
  이분은 하나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승리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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