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므온의 성탄절
누가복음 2장 26-35절
▪ 기다림
오랜 기다림 끝에 성탄절을 맞았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드님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심으로 모든 존재를 존귀하게 만든 사건이며, 무지렁이와도 같은 비천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드님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랑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으로 세워지는 지를 확연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코로나 19, 검찰개혁, 세월호의 진상규명, 중대재해법 제정, 홍천 양수발전댐 반대, 송전탑 반대, 설악산 케이불카 설치 반대 등 많은 과제 해결을 위해 빌고 또 빌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성탄절을 맞았습니다. 청와대 앞과 국회 앞엔 여전히 이 문제를 놓고 단식하며 시위하는 작은 예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들이라도 없었다면 예수 없는 성탄절이 될 뻔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실 때 이 땅에는 예수님을 맞이할만한 빈방이 없었습니다. 정말 빈방이 없었을까요? 이기적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곳에서도 산모를 위한 방 하나쯤은 마련할 수 있는 게 세상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태어날 빈방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구간 밖에 달리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구간의 성탄절이 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마구간에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수치요 기독교의 수치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론 놀라운 축복입니다. 수치를 축복으로 바꾼 하나님의 반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이요,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지금은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 교회를 가보면 바닥은 대리석으로 주변은 성화로 도구들은 모두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리고 자본에 무릎 꿇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예수 정신을 버린 채 자신들의 수치를 치유하기에 급급한 결과입니다.

▪ 기다림의 사람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무려 25년을 기다려 100세에 아들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모세는 민족의 해방을 간절히 기다리다가 정치적 혁명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내몹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매일 같이 하나님의 산을 바라보며 이상한 징조를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떨기나무에서 불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모세는 달려갑니다. 결국 하나님은 기다리는 모세의 눈을 열어 출애굽의 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은 소년시절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지만 수 없는 죽음의 터널을 지나 오랜 기다림 끝에 나이 삼십이 넘어서야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 밖에도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립니다. 그들의 일은 숙명처럼 기다리는 일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매년 성탄절마다 우린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억울한 자들의 한을 풀어주시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할 주님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시므온이라는 예언자였습니다. 오늘은 시므온 예언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 시므온의 혜안과 비전
오늘 성서일과는 누가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2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을 전심으로 기다렸던 한 예언자를 만나게 됩니다.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사셨던 나이 많은 예언자 시므온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늙었기 때문에 어쩌면 메시야를 보지 못하고 죽을 지도 모를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이미 세례요한의 출생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엘리세벳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혹시 그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메시야인 주님의 길을 닦는 선지자로 요한을 소개합니다. 그 후에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던 성탄절이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지고 있었습니다. 시므온도 누군가를 통하여 예수의 성탄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성령을 통하여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감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성전에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지켜보는 것이 그의 일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성전에 나아와 정결예식을 거행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정결예식을 하려고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가 하나님이 보낸 사람임을 알아챘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받아 안고 기쁨에 차서 노래합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명 시므온의 찬가입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의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계시하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참 감동적인 만남입니다.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이 오시는 주님을 만난다는 사실이 진리임을 확증했습니다. 전심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성탄절은 만남으로 응답합니다. 이미 나이 많아 죽어가는 한 예언자와 이제 막 태어나 당차게 살 한 아이와의 만남이 이토록 감동적인 것은 시므온이라는 예언자의 고백 때문입니다.
오늘 시므온의 비전은 한 아기를 통해 이루어질 민족의 구원입니다. 예수 속에 숨겨져 있는 빛을 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기위해서는 메시야가 와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메시야를 누구 보다고 전심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메시야를 만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 이웃종교의 성탄절
조계사에 걸려있는 <아기 예수님 탄신을 축하드립니다>란 현수막이 고맙고 교무님이 보내온 성탄카드에 아기 예수 탄신을 기뻐하는 교무님들 그림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 너무 좋아보였습니다. 구원의 유무를 떠나서 스님들과 불도들이, 교무님들과 교도들이 함께 성탄절 현수막을 문 앞에 내다 걸고 성탄 카드를 나누는 일은 반갑고 소중한 일입니다. 서로 비방만 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서로를 지지하고 인정하자는 화해의 손짓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막힌 담을 허시고 화해시키려고 오셨는데 이미 그 화해의 주님은 스님들과 교무님들 속에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친구 강해윤 교무가 사진을 한 장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직접 쓴 성탄 카드가 한가득 든 상자입니다. 30여통의 성탄카드가 들어있다는 글과 함께 올렸습니다. 제가 답문에 “아기 예수님이 이젠 원불교로 가셨나보네요”라며 글을 올렸더니 다들 웃더군요.
하지만 극우 기독교도에 의해 불상이 훼손되고 방화로 절간이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이 사건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 서울기독대학교 손원영 교수는 이단 교수로 제명 처분을 당하고 사회법에서 승소하였지만 이사회가 거부하여 아직도 복직을 못하고 1인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하여 새로운 눈이 열리고 화해의 주님을 만나시고 모셔 들여서 그간에 담을 쌓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과 화해하시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조소했던 모든 분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 참회하십시다. 진정한 참회가 없이 성탄절은 불가능합니다. 빈방에만 예수님의 성탄이 가능합니다. 이미 종교 간의 담을 헐고자 하는 스님 교무님 마음이 성탄절 현수막을 집 앞에 걸게 하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 기다림
오늘 우리는 한 늙은 예언자의 기다림 속에서 신앙의 길을 봅니다. 한평생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는 삶으로 점철한 그의 운명도 기고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리고 마침내 그 기다림의 종착역에서 메시야를 보았을 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의 앞길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되 전심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내 만나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린 인스턴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을 주셨고 기다리라십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하고 진심을 담아 고대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게 성탄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반드시 정의가 불의를 이길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이길 것입니다. 선이 악을 이길 것입니다. 더디지만 그러리라고 확신합니다. 세상은 믿음의 분량만큼만 성취됩니다.
▪ 인간화
유교에서 사람됨의 조건으로 사단을 말합니다.
사단(四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감정)으로서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착한 본성[德]에서 발로되어 나오는 감정입니다. 단(端)이라 함은 선(善)이 발생할 가능성을 가진 시초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자의 용어로서 『맹자』 공손추편(公孫丑篇)에 나옵니다.
측은지심은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는 마음, 수오지심은 부끄럽게 여기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 사양지심은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은 선악시비를 판별하는 마음입니다. 맹자에 의하면 이 사단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종의 선천적인 도덕적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이것을 확충함으로써 인·의·예·지의 덕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측은지심의 경우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그 아이를 끌어안고 구하려는 마음이 순수하게 발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소박한 자발적인 행위를 보면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고 태어난 사단은 인간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면 이는 사람이 아니든지 덜떨어진 인간이라고 보았습니다.
▪ 검찰은 왜 반성하지 않나
연민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집단이 있습니다. 검찰입니다. 권력의 개가 되기를 자처해던 그들은 정의의 사도인양 정권을 조롱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성탄절에 발표한 신연수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글이 검찰의 비리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위원은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적시하며 이 조작사건으로 강기훈은 실형을 살았고 정신적 충격과 암까지 걸려 고생하고 있습니다. 당시 시민사회진영은 상당한 도덕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24년 만에 2015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검찰은 한 사람을 반인륜적 범죄를 뒤집어씌웠고 그 후로도 진실 규명을 방해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노태우 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검찰의 조작 수사였음이 밝혀졌고 정치적 효과를 다 누렸으며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 받고 있으며 조작 검사들은 승승장구하며 출세하였습니다.
2013년 간첩으로 구속된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 사건 역시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합작품임이 드러났습니다. 국정원이 증거를 위조하고 검찰은 적극적으로 채택했습니다. 증거가 위조임이 드러나자 오히려 검찰은 다른 혐의를 찾아내 보복 기소를 했습니다. 지난달 국가가 유 씨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법원은 “현시대에 일어나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검찰과 국정원을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사건뇌물수수혐의도 검찰의 전방위적인 조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총리는 실형을 언도 받아 2년을 다 살고 나왔지만 그 진상은 아직도 오리무종입니다. 공수처가 출범해야만 조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 보위부 직파 간첩 조작 사건도 대법원에서 무죄로 선고 되어 홍강철씨는 7년 만에 누명을 벗었습니다. 연쇄 살인범 이춘재 대신 20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윤성여 씨 사건은 시국 사건뿐 아니라 형사 사건에서도 숱하게 조작이 이뤄졌음을 방증합니다.
놀라운 일은 사건 조작에 관여한 검찰들이 책임지기는커녕 아무도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검찰이 불리한 증거는 숨기고 유리한 증거만 내놓아 사건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진실보다 성공에 집착하고, 잘못이 드러나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을 부당하게 썼다면 그것은 큰 범죄입니다. 그런데 조작 사건들에 대해 누가 왜 어떻게 조작했는지 진실을 밝히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일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사건에 대해 배상 판결이 나고, 40년 지난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도 다시 조명되는 요즘입니다. 공권력을 남용해 인권을 짓밟은 범죄에 대해서는 왜 수사하고 단죄하지 않는가요. 그러니까 검찰의 오만한 수사와 선택적 정의가 계속 재생산되는 겁니다. 검찰의 ‘자기 식구 봐주기’는 더 이상 놔둘 수 없는 수준입니다. 임은정 서지현 검사가 그렇게 외쳐도 검찰 내부 비리는 제대로 수사하지 않습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뇌물과 성접대 의혹은 경찰 수사를 검찰이 사사건건 방해했고, 최근 룸살롱에서 접대 받은 검사들도 희한한 셈법으로 3명 중 1명만 기소했습니다.
수십 년간 검찰은 자정능력이 없음을 증명해왔습니다. 검찰은 강하게 장악하는 정부에는 앞장서 충성하고, 검찰의 자율성을 존중해주는 정부에는 오히려 달려들었습니다. ‘검사와의 대화’를 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면전에서 조롱했고, 검찰 출신 민정수석과 법무장관으로 검찰을 장악한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PD수첩 수사와 미네르바 사건을 만들어 정권 안보에 앞장섰습니다.
요즘 나경원 전 의원의 자녀 입시 비리 문제는 불기소하고 정경심씨의 자녀 표창장 위조로 4년 중형을 언도함으로 재판부가 미쳤음을 드러냈습니다.
검찰은 사법부가 아니라 행정부입니다. 독립권을 보장한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분리해서 지나친 힘을 빼고, 검찰도 잘못하면 수사 기소할 수 있는 별도 기관을 만들어 견제했어야 합니다. 검찰개혁은 이제 첫발을 뗐습니다. 민주적이고 균형 잡힌 검찰로 다시 태어나도록 국민들이 끝까지 감시해야 합니다.
▪ 예수의 사명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는 이 아이가 장차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예언합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에게 걸려 넘어질 것이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로 세움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는 어떤 사람들에겐 걸림돌이 되어 넘어질 존재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겐 디딤돌이 되어 일어서게 할 것이란 예언입니다. 이는 예수의 사역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실제 지난 2천년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걸려 넘어졌습니다. 대체적으로 권세가들입니다. 부자들, 특권층입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예수로 인하여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이방인으로 의사이며 전문가인 누가는 생전에 예수를 만난 적은 없지만 누구보다도 예수의 가르침과 비전을 잘 이해한 분이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에게서 은혜를 입었고 바울의 주치의로 자처하여 순례에 동행하였고 이방인으로는 처음으로 복음서를 집필하게 됩니다. 놀라운 시도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의 주님으로 예수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시려고 이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메시야로 소개합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는 희년에 심취하였고 3년의 공생애를 통해 경제평등공동체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2장은 초대교회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이 희년 공동체였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희년은 예수가 복음을 선포하며 선언한 최초의 예수 복음이기도 합니다. 희년 정신에 기반 한 경제 공동체가 아니고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누가의 혜안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 신성한 빛
사랑하는 가재울녹색교회 성도 여러분,
2020년 성탄 절기를 지내면서 시므온의 예언이 우리의 영혼을 깨웁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혼에 주목합시다. 영혼의 신성한 기운을 따라 우리의 삶을 전개합시다. 우린 그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 안엔 영원하신 하나님의 신성인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린 그저 인간이 아닙니다. 신성한 빛을 품고 있는 인간입니다. 충분히 존경받고 그 권리를 보장 받아야 합니다. 이는 재산의 많고 적음으로 차별이 없습니다. 지식의 유무로 사회적 직위의 차이로 차별이 없습니다. 피부 색깔에 의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빼앗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악에서 난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라도, 아니 교회라 할지라도 그건 악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충분히 대접받고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건설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우린 그저 자신의 배만을 만족시키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길을 걷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성심을 다해 살아온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새해에도 예수의 길을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