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십자가를 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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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십자가를 지라
  • 백창욱
  • 승인 2020.12.2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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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리 진밭교 아침기도회(20. 12. 19)      
마태 16:24-25 “제 십자가를 지라”


17일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피고인이었던 윤성여씨가 재심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어제 한겨레신문에서 무죄선고 받고 활짝 웃는 모습을 봤다. 활짝 웃는 모습에서 30년 억울한 세월의 짐이 조금이라도 벗겨지기를 바랐다. 유퀴즈온더블록에 재심재판 전문변호사인 박준영변호사가 출연했을 때 함께 나온 윤성여씨를 처음 봤는데 인상이 참 순박했다. “앞으로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공정한 재판만 이뤄지는 게 바람”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이춘재 8차 연쇄살인사건은 1988년에 일어났고 윤성여씨는 89년에 살인자로 찍혀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한 후 2009년에 가석방됐다. 작년 11월에 재심을 청구했고 올해 1월에 재심결정이 난 후, 13차례 공판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어제 무죄선고를 받은 것이다. 무려 32년 만에 살인자의 누명을 벗었다. 무죄선고 받은 배경에는 진범인 이춘재의 자백이 결정적이었다. 이춘재가 법정에서 8차 사건도 자신이 했다고 증언함으로 윤성여씨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주장이 사실로 밝혀졌다. 그리고 재심 재판과정에서 당시 경찰이 불법체포, 감금, 폭행·가혹행위를 한 게 밝혀졌다. 삼일 간 잠도 재우지 않고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자신에게 쪼그려 뛰기를 시키고 못 하면 때리는 등 고문을 했다. 윤성여씨는 살기 위해서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 윤씨의 유죄 증거로 쓰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서를 조작한 사실도 드러났다. 국과수 감정서 발급(1989년 7월24일)부터 일심 무기징역 선고(10월20일)까지 형사사법시스템이 윤씨를 무기수로 결론짓는 데는 채 석 달도 걸리지 않았다. 

비록 무죄선고 후에 경찰도 검사도 판사도 윤성여씨에게 사과를 했지만, 처음 그를 고문했던 경찰(한 사람은 미국거주, 한 사람은 교통사고사), 감정서를 조작한 국과수 직원(뇌경색환자), 증거조작을 묵인, 방조한 검사(지금 변호사, 인터뷰 피함), 일심부터 대법원까지 완벽하게 엉터리판결을 한 판사들은 사법시스템 뒤에 숨어서 자기 죄를 숨기고 있다. 윤성여씨는 기피인물이었다가 이제는 사회관계망에 복귀할 수 있는 법적토대가 열렸다. 정상인간이 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예수가 민중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매우 대중친화적이다. 오죽하면 기득권 적대세력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든지, ‘먹고 마시기를 탐한다’고 손가락질을 했을까. 민중과 허물없이 어울리다보니 그런 별명이 생겼다. 그런데 제자들을 향해서는 그 반대다. 완전 비친화적이다. 오늘 말씀도 그런 사례다. 어서 오라고 손을 잡아 끌어도 될까 말까 할 텐데, 따르겠다는 사람한테도 오지 말라고 내치는 쪽에 가깝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라는 말이다. 일세기 로마시대 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 것이다. 은유나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다. 로마는 반체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극형을 지웠다. 예수도 정치범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예수가 십자가 진 사건을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죽을 때까지 겪는 육체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십자가처형은 사회적으로 완전 매장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도 윤성여처럼 세상에 홀로 된다. 누구도 십자가 진 사람과 가까우면 안 된다. 걸리면 똑같이 된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여성제자만 멀리서 지켜볼 뿐 나머지는 모두 도망갔다. 길 가는 사람도 자기 머리를 흔들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모욕했다. 로마병 앞에서 자기는 무관하다는 의식적인 동작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이라고 했다.(고전 1:23) 

그런데 예수는 그런 모욕과 부끄러움, 죽음의 십자가를 제자들도 똑같이 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를 끝까지 따른 사람은 별로 없다. 너도 나처럼 죽으라고 하는데 누가 좋다고 따르겠는가. 그러나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역설로 가득 찬 세상사 신비처럼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이 거꾸로 자기 목숨을 얻는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온전한 생명을 누린다.

사드철거투쟁도 비슷하다. 이 추운 영하의 날씨, 강풍에 몸이 휘청거려도 현장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스스로 정한 투쟁일과를 수행한다. 수행자가 진리를 깨치기 위해 고행을 자처하듯이, 사드철거투쟁의 일과도 날마다 수행이다. 그렇게 한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다. 기득권세상에서 상 받는 일은 권력이 수긍하는 일일 때만 그렇다. 우리나라 권력은 한미동맹 신주단지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사드빼라는 외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십자가가 죽음이듯이 미국예속 정권에서 사드철거투쟁은 고난이다. 그러나 사드는 뺄 수밖에 없다. 나라가 자주독립하고 한반도평화의 길을 찾으려면 그 길이 답이기 때문이다. 사드철거투쟁은 평화와 진리로 가는 길이다. 그 날을 맞이할 때까지 즐거이 사드철거투쟁을 수행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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