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명順命과 저항抵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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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順命과 저항抵抗
  • 양재성
  • 승인 2020.12.2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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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順命과 저항抵抗
누가복음 1장 26~38절. 

▪ 대림절
  이제 기다림이 그 종착점에 가까이 왔습니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그분이 오셔야 끝이 납니다. 성탄절을 간절히 고대한 분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성탄절을 가능하게 하신 것은 가난한 여인 마리아의 순명順命, 천사장 가브리엘의 순명,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순명입니다. 목숨을 건 기다림이 있었기에 그분이 오셨습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지요. 우리가 고대하는 예수는 어디쯤 오고 계신지? 아니 이미 와 계시진 않는지?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는 자만이 눈이 열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信仰의 신비神秘는 기도의 신비를 아는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인 셈입니다. 기다림이 더 간절한 사람은 그 만남의 감격도 더 큰 것입니다. 이것이 기다림의 법칙이며 대림절의 은총입니다. 바라기는 2020년 더 나은 세상을 간절히 염원하며 기다린 사람들이 평화의 주님을 만나 그 평화平和의 나라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게 되길 기도합니다. 

▪ 18 불짜리 예수님
  해마다 크리스마스 절기가 되면 우리 “아틀란타 한인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담장 벽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는 플라스틱 인형들을 진열해 놓습니다. 약간 어설프기는 하지만, 이웃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마구간 전경을 그대로 재현해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한번은 부목사님들 몇 사람과 함께 마구간을 제작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결코 작지 않은 여러 종류의 인형들이 다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마구간 정 중앙에 구유를 놓고, 마리아, 요셉, 천사들, 동방박사들 그리고 소, 양, 염소 같은 동물들 순으로 인형들을 배치해 보았습니다. 지푸라기도 바닥에 잔뜩 깔고, 마구간 안에 조명까지 달아 놓으니 꽤 근사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구유 안에 누워 있어야 할 아기 예수님 인형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옆에 있던 부목사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정 목사, 아기 예수님은 어디 있어?” 그러자 정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작년에 어떤 멕시칸 청년이 술 먹고 지나가다가 훔쳐 갔습니다.” 
저도 어떨 결에 정 목사에게 질문을 계속하면서 이상한 대화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럼, 빨리 예수님을 새로 사와야지?” 
“네, 아마존(amazon)에 이미 오더(order) 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야?”, / “예수님, 텍스(tax)까지 쳐서 18 불입니다.”
“싸네!” / “예, 예수님 쌉니다”
“그럼 예수님은 언제 오나?” / “예수님은 이번 주 수요일에 옵니다” 
며칠 후, 정 목사와 심방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담장에 세워진 멋진 마구간을 보면서 아기 예수님 생각이 나서 물었습니다.
“정 목사, 아기 예수님 왔나?” / “예, 예수님 왔습니다”
“예수님 어딨어?” / “예수님, 사무실에 있습니다”
“아따, 예수님 빨리도 왔네!” / “네, 요즘에는 주문하면 빨리 옵니다”
문득, 여태까지 나누었던 우리들의 대화 내용을 생각해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자초지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언뜻 우리들의 대화를 듣는다면, 영락없는 신성모독죄에 걸릴 만한 대화였습니다. 겸연쩍은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무실에 가보니 책상 위에 “아기 예수님” 인형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주 허접스러운 비닐 “봉다리”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아기 인형을 두 손으로 잡아들었는데, 아기 예수님 등에 큰 글자가 흐릿하게 번져 있었습니다. 마치 조직폭력배들의 문신 같았습니다. 너무 가격이 싸서 그랬는지 정교함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안경을 벗고 무슨 글자인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Made in China”였습니다. 중국산 예수님이었습니다. “Made in Israel”이나 “Jerusalem” 같으면 가격이 좀 나아갔을텐데, 안스럽게도 “Made in China”라서 그런지 가격이 아주 쌌습니다.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예수님이 참 쌉니다. 교회도 많고, 목사들도 많고, 성경책도 많고, 기독교인들도 많아서 그런가봅니다. 온라인을 열면 설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너무도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고 보니 예수님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목사들을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개독교”라는 말을 들을 만큼 비행의 주인공들이 되면서부터 예수님의 가치가 더욱 더 밑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요즘은 예수님이 쉽게 도난당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때는 저도 제 마음의 구유 안에 “예수님이 계신지” 확인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내 안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욕심, 미움, 질투, 정욕, 근심과 걱정이 “내 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훔쳐간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수님이 내 인생의 최고 가치였습니다. 가장 귀한 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다른 것들이 부유해지면서 갑자기 소중한 예수님을 무관심 속에 방치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쉽게 도둑을 맞은 것입니다. 깊은 반성과 새로운 마음 다짐을 하게 됩니다. “텍스 포함 18 불”이라는 문구는 분명히 씁쓸한 여운을 남겨 주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천하디 천한 짐승의 여물통 속으로 강림하신 아기 예수님의 현주소를 잘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과 감동을 선사하시려고 자신을 그토록 무가치하게 낮추셨습니다. 당신보다 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가장 낮은 자리로 화육하셨습니다. “삶이 너무 고달프고 피곤해서 위에 계신 예수님을 쳐다 볼 수 없었다”고 핑계 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밑바닥으로 내려 앉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자리는 언제나 “텍스 포함 18 불짜리 자리”입니다. 18 불짜리 아기 예수님 인형은 정말 못 생겼습니다. 눈도 “툭” 튀어나오고, 입술도 두껍습니다. 페인트칠도 조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쩌면 가장 예수님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밖에 나가 평상 위에 진열된 다른 인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소와 양은 아기 예수님보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30 불 이상 더 비쌌습니다. 플라스틱 소재가 더 많이 들어가서 그랬나 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은 들러리에 불과한 짐승들보다 훨씬 쌉니다. 
  성탄聖誕의 생명生命은 “자기 낮춤”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마음이 성탄의 기본 자리입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쉽게 잃어버릴 것입니다. 항상 귀하고 가치있는 것으로만 대접받으려고 하는 우리들! 조금만 자존심 상하고, 권리를 침해당하면, 격분해서 참지 못하는 우리들의 오만한 모습 앞에서 기꺼이 “18 불짜리 인형이 되어 주신 아기 예수님”은 겸손하다 못해 사무치도록 거룩해 보였습니다.
  이제 가장 염려와 한숨이 많았던 2020 년도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그 중국산 아기 예수님을 다시 창고에서 꺼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이 텍스 포함 18 불이 넘지 않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위 이야기는 미국 아틀란타에서 목회하는 친구 김세한 목사가 내년에 코로나가 잦아들면 미국에 초대하고 싶다는 말과 한국에 나오면 제일 먼저 양목사를 꼭 만나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보내온 글입니다. 18불짜리 예수에 마음이 쓰렸는데 자기 삶 값이 18불이 넘지 않게 지켜달라는 김 목사의 말에 깊이 공감共感했습니다.  

▪ 순명의 신앙
  순명順命을 한자 그대로 풀이해 보면 ‘천명天命에 순종順宗함’입니다. 순명(Obedience)은 종교적 의미에서 ‘스스로의 자유의사를 끊어 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우리 존재存在의 뿌리인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모든 존재를 존재케 하는 존재자체(Being-Self)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없으면 그 어떤 존재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모든 존재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 붙어 있고 붙어 있어야만 살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다는 사실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은 그런 의미로 보면 옳은 말씀입니다. 우린 믿음으로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고 하나님이 섭리하고 계시며 끊임없이 진화해 간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울러 육肉은 소멸되고 영靈은 하나님께 돌아감을 압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뿌리 없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우린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지어졌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는 길이 하나님의 뜻이며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그분의 뜻에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自由가 찾아옵니다. 하나님 당신이 나를 통해 능력을 펴시도록 우리는 고개만 숙이면 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분의 뜻에 깊게 침잠해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나를 포함해 나의 모든 이웃들이 그분의 뜻대로 존재하도록, 그분의 뜻대로 피어나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도록 협력하는 것, 모든 사건, 세상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것, 이것이 순명順命입니다. 

▪ 마리아의 순명
  오늘 성서일과는 누가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1장의 말씀입니다. 누가 공동체는 성탄의 주인공主人公으로 가난한 백성들을 설정합니다. 성탄의 징조를 알아본 사람들은 성전의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아니었고 목동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구주탄생 소식을 전하니 그들이 달려가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를 보고 제일 먼저 절하며 경배합니다. 이렇게 성탄절은 기존 질서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가 별 볼 일없는 사람 마리아와 목수 요셉에게서 태어납니다. 이 일은 앞으로 예수가 어떤 사람들의 구주가 될 것인지 암시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자들을 당신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어느 날 마리아는 신비체험을 통해 자신이 잉태한 사실을 알았고 그 아이는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지告知 받습니다. 두렵고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자신의 천한 몸을 빌어서 태어난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일이 곧 돌이킬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임을 인지認知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게 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님의 뜻이 자신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처녀가 아이를 밴 사건으로 율법에선 돌 맞아 죽을 짓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순명은 온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신앙적 고백입니다. 순명이란 늘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그 순교적 결단에서 맛볼 수 있는 선물입니다. 

▪ 예수의 순명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도 사람의 순명이 없이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도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예수에게 알린 마리아의 요청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거기에 물동이에 물을 부어 잔치자리에 퍼다 준 시종들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기적은 이렇게 하나님도 예수도 혼자 일으킬 수 없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고백과 결단이 합해져 기적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명하는 길이 참 사람의 길이며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십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실 수 없습니까? 하지만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곤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습니다. 그건 죽음입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순종이 순명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바쳐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온전히 순명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드님이 되셨습니다. 그 순명의 길은 사랑의 길과 맞물려 있습니다. 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길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이르게 됩니다. 구원은 이렇게 오고 있습니다. 

▪ 우리의 순명
  예수의 길이 마리아의 순명에서 시작되었고 마리아의 순명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은 그 뜻에 온전히 순명한 사람들에 의해 알려지고 성취되었습니다. 지금 우린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20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은 우리 모두가 예수로 태어나는 날이요. 예수께서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셨고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순명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의 길을 걸어가고자 결단하는 날입니다. 다시 말래 2020년 성탄절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생명이 제 숨을 쉬는 평화로운 세상을 지어가고자 모두 예수로 태어나는 날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태어날 때만이 성탄절은 그 의미를 얻고 새로운 역사를 세워가게 될 것입니다. 

▪ 순명과 저항의 길
  사랑하는 가재울녹색교회 성도 여러분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백신 접종이 임박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방역당국의 지침을 준수하고 조신하며 지냅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오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인식과 삶의 방식의 전환을 이루어갑시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은 마지막까지 한 영혼을 사랑하며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사랑의 길을 나선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무게입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이 시대의 노동자들, 가난한 사람들, 정의롭게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사랑이지만 그 외형은 저항抵抗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저항抵抗을 동반합니다. 십자가가 사랑의 상징象徵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저항抵抗의 상징이 되었던 것처럼 예수의 삶도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사랑과 저항抵抗의 삶이어야합니다. 

자,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명하려면 세상의 통치엔 저항抵抗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좌절할 수 없는 진정한 환희歡喜가 있습니다. 이 길로 여러분을 초대招待합니다. 우리 함께 걸어보실까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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