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문(20. 12. 20) 대림절 네 번째 주일
누가 1:26-38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지난주에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었습니다. 성서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독교고전인데, 이제사 읽었습니다.
존 번연은 17세기 인물입니다. 영국 청교도 복음전도자로 유명합니다. 천로역정은 구원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풍부한 은유와 상징으로 서술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천은 무거운 짐을 지고 성서를 읽다가 크게 낙심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며 절망합니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전도자를 만납니다. 전도자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는 길을 알려줍니다. 좁은 문을 지나 천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크리스천은 전도자의 말을 따라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와 가족을 떠나 순례를 떠나는 게 천로역정의 시작입니다.

굉장히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방대한 작품이어서 일일이 소개하는 건 어렵습니다. 등장인물 대개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성격과 역할이 분명해서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굉장히 교묘하고 헷갈리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시대를 불문하고 어디에나 있구나 느끼게 합니다. 그 사람의 특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크리스천이 소망씨와 함께 허영의 도시를 겨우 벗어나서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합니다.
“선생님, 고향은 어디이며 어디까지 가시는 길입니까?” 그는 미사여구라는 도시에서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는 길이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미사여구라는 도시는 굉장히 부유한 동네라고 하던데요.” “네, 그렇습니다. 제 친척들 중에도 큰 부자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실례입니다만, 그곳에 사는 친척들이 누구누구입니까?” “마을 주민들 전체가 제 친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변절 경, 기회주의자 경, 미사여구 경과는 특히 가깝습니다. 뿐만 아니라 능글능글 씨 양다리 씨, 무관심씨도 저의 친척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구의 목사로 일하는 두 말씨(two-tongue)는 제 외삼촌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종교관을 피력합니다.
“사실상 우리는 종교에 지나치게 엄격한 신자들과 다소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 두 가지의 매우 사소한 차이입니다. 첫째, 우리는 시대적인 사조와 흐름에 결코 역행하려는 법이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종교가 순탄한 길을 가며 명예롭게 빛날 때에는 늘 열심히 종교를 믿곤 합니다.”
그러자 크리스천은 동행인 소망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 저 사람이 바로 미사여구의 사심인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부근에 사는 사람들 중 가장 악한 자와 동행하게 되었군요.” 그러자 소망이 말했습니다. “그자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제 생각에는 자신의 이름을 부끄러워할 자가 아닐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은 다시 사심에게로 다가가 함께 거닐면서 말을 건넸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마치 이 세상 모든 일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제 추측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선생님이 누구인지 짐작이 갑니다. 혹 미사여구 마을에서 오신 사심선생이 아니신지요?”
사심: “사실 그것은 제 이름이 아니고 저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게 붙여놓은 별명입니다. 저보다 앞서 살다가 사람들도 이런 몰지각한 일들을 묵묵히 참고 견딘 것처럼 저도 그것을 하나의 질책으로 알고 달게 참을 뿐입니다.”
크리스천: “남들이 그런 별명을 지어 부르게끔 선생님께서 뭔가 근거를 만들어 주신 게 아닐까요?” “절대로,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제가 그런 이름을 얻을만한 일을 한 게 있다면, 항상 시대의 흐름을 빠르게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사용해 이익을 얻었다는 것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신의 축복입니다. 그러니 누구든 악의를 가지고 저를 비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 “만일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가고자 하신다면 당신은 당신의 시대사조와 경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당신은 종교가 비단옷을 입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누더기를 걸치고 있을 때라도 변함없이 믿고 따라야 하며, 주님께서 갈채와 환호를 받으며 거리를 걸어가실 때나 쇠고랑을 차고 경멸의 대상이 될 때나 변함없이 주님을 의지하고 믿어야 합니다.”
사심: “당신이 제 신앙에 대해서 강요하려 한다거나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제 자유에 맡기시고 함께 길이나 갑시다.”
크리스천: “당신이 제가 제안한대로 하지 않으신다면 한 발자국도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책 이부에서 사심씨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부는 크리스천의 아내인 크리스티아나의 순례이야기입니다. 크리스티아나를 안내하는 담대씨와 정직씨의 대화에서 사심이 나옵니다.
담대: 허영의 시장을 통과한 크리스천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사심이 가장 능글맞은 자였지요.
정직: 사심이라!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담대: “그 친구는 아주 고약한 위선자였습니다. 그는 세상풍조에 따라 종교를 믿는 자인데, 어찌나 교활한지 신앙으로 인해 손해 보거나 고생하는 일은 절대 안 하려 했지요. 경우에 따라 신앙 방식을 바꾸는 데 능했고, 그의 아내도 남편 못지않게 그 일에 능숙했습니다. 그는 자기 견해를 이리저리 바꾸고 변화시켰으며, 그런 자기 태도를 옹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빗나간 목적으로 인해 그릇된 종말을 맞았다고 하더군요. 그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는 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심씨의 오류는 무엇인가요? 담대씨의 평가에 사심씨의 일생이 잘 담겨 있습니다. 사심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게 처신하는 줄 알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가장 어리석은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섬뜩한 것은 그 사실을 자신만 모를 뿐,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식이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통해서 일하시는가? 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여성이 나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특징을 말하자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조건입니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어린 여성이고 엘리사벳은 임신하지 못하는 여성입니다. 남성중심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최고역할은 아이를 낳는 일입니다. 세상은 아이를 낳는 여자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마리아, 엘리사벳 두 여성 모두 이 사회적 조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비주류 중 비주류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두 여성을 통해 일합니다. 이 두 여성이 세상을 구원할 사람을 낳게 합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두 아이를 점지하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먼저 요한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요한의 부친 사가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3절,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31절,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요한과 예수 이름을 예고하는 말이 똑같습니다. 글자 수까지 같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서술입니다. 두 아이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 하에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처럼,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나란히 아이 예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여섯 달 간격으로 요한과 예수가 차례로 잉태되고 탄생합니다.
오늘 탄생예고는 무엇을 암시하나요? 하나님나라 서막이 열립니다. 그 나라가 저 멀리서 조금씩 동터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 일이 정말 보잘 것 없는 두 여성에게서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받는 약속은 엄청납니다. 가브리엘이 하는 말을 보면, 마리아가 잉태할 아기는 하나님과 다윗의 영광을 고스란히 이어받습니다.(32,33절) 급기야 태어날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고 합니다.(35절)
이 엄청난 약속은 무슨 뜻인가요? 마리아와 엘리사벳같은 작은 자들이 역설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여는 씨앗임을 말합니다. 우리는 진실로 사람을 외모로만 보면 안 됩니다. 외모로 보지 않으려면 우리 관점, 철학, 사고방식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 다른 말로 민중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생일대의 모험과 도전도 따라옵니다. 처녀가 아이를 잉태해야 하는 위험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위험을 기꺼이 수용합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작은 자들이 기득권 세상에서는 존재감이 약하고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늘 권력자들의 희생제물이 되지만, 깨친 작은 자들은 스스로 자기 세상을 열어가겠다는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바뀝니다.
금요일 소성리에 갔을 때, <사드철회 성주대책위원회>로부터 감사편지를 받았습니다.
“만 4년 동안 13번의 전투와 4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침탈을 당한 이 곳 소성리에도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험난한 시간을 버티고 여기까지 온 것이 기적과도 같습니다. 모두 여러분 덕입니다.
아주 작은 마을 소성리처럼 함께하는 우리의 힘도 작습니다. 그러나 달마산의 철조망을 걷어내고 사드가 뽑혀나갈 때 까지, 전쟁동맹을 해체하고 내 땅에서 외국군대를 몰아낼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한반도 최전선 소성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기지 앞에 섭니다. 그 곁을 함께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짧고 간결한 문장에 담대함이 넘칩니다.
우리가 작은 자들 편에 서 있음을 기뻐하십시오. 담대한 믿음으로 지지 하십시오. 함께 새 세상을 열어 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