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抵抗의 복음福音
마가복음 1장 1~11절
▪ 순명順命과 기다림
기다림의 절기인 대강절을 걷고 있습니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께는 순명의 길이었지만 그것이 세상에 대해선 저항의 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 사셨고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 길은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하나님의 복음으로 가득 채운 삶이었고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의 사랑에 헌신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동일시했으니 그의 헌신과 사랑은 지극히 작은 자들,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늙은이 어린아이 여성들 병자들을 역사의 주체로, 정치와 경제 사회의 중심부에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 속사람은 완전히 성화되어 하나님을 품었지만 겉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저항가가 되셨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목표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룬 예수나 불성이 온전히 농익어 깨우친 부처나 하늘의 도를 깨달아 성인이 된 노자, 공자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회구조를 변혁하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회구조변혁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과 하나님에의 귀의歸意, 그리고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저항과 가짜와 위선에 대한 거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완성되어갑니다. 기독교가 어떤 종교보다도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종교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피안彼岸의 종교로 둔갑하여 현실을 부정하면서 더 현세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비이성적이고 몰상식적인 집단으로 전락하였고 굴절된 역사를 지지하고 불의한 기득권을 옹호하는 극우집단에 동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기가차서 개탄慨歎할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대강절에 하나님께는 완전히 순명하시고 세상 권력엔 단호하게 맞서 변혁을 요구하셨던 예수가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기다림은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예수의 삶을 이어서 살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 권력자들에겐 단호하게 맞서고 가난한 자들을 역사의 중심에 세워 민중의 정치를 실현하는 삶을 결단하도록 이끕니다. 우린 지금 그 기로에 서 있고 그 길을 걷도록 요청 받고 있습니다.
▪ 기독교와 종교宗敎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자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종교宗敎란 ‘가장 높은 가르침,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란 말로 기독교를 종교라 함은 ‘예수의 가르침이 가장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려면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아야하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실제 예수는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 되고 가르쳐지지만 실제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왜곡되고 잘 못 가르쳐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지나치리만큼 성경공부가 성행되고 다양한 방식의 가르침들이 있지만 성경의 진실과 그 가르침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며 생명生命 그 자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들어보면 기독교를 절대화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성경을 과장하거나 신비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거나 근본주의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알고 보면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여 던져주신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의 고백록입니다. 각 자 자신이 처한 입장과 위치에서 당시 역사를 통해서 본 예수를 그려내거나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서 차이도 있고 어느 부분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죽음과 박해의 고난상황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고자하는 절박한 가운데 기록한 책입니다.
▪ 마가와 복음福音
1800년대까지만 해도 복음서 중에 마태복음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이 순서상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서학자들에 의해 역사비평과 문헌비평을 통해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그리고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마가복음이 절대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은 처음으로 ‘복음福音gospel’이란 말을 받아들여 사용한 복음서입니다. 아예 책의 제목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붙였습니다.
당시 ‘복음’福音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은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기쁜 소식으로 승전가를 동반하였습니다. 반면에 피지배국민으로서는 패배하여 노예로 전락한다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은 제국이 심판을 받고 가난한 자들이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행복한 소식입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는 로마 제국에 의해 종교적 정치적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되고 이스라엘이 망하고 제자들은 순교당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모진 박해를 받았고 초대교회 내부의 분열 등 총체적으로 힘든 시절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신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 편이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를 역사의 중심부에 세울 것이란 소망이었습니다. 마가공동체는 노예적 삶을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역사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 요한과 예수
오늘 성서일과는 마가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1장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제목을 달았고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정치범으로 처형된 세례자 요한, 역시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두 사형수의 운명이 마가복음의 서두와 결말을 장식합니다. 예수는 요한의 제자입니다. 예수는 당시 영성공동체에도 함께 했었고 혁명당에도 가입하셨을 겁니다. 헌데 당시 여러 종파가 있었을 텐데 예수는 마지막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핵심은 회개悔改입니다. 하나님께 회개 없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릴 수 없고 그렇다면 저항도 불가능하고 역사의 변혁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첫 복음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외침이었듯이 예수도 그 외침을 그대로 자신의 첫 복음 선포로 사용합니다. 예수는 요한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요한의 뒤를 이어 저항抵抗의 길을 걸으라고 부르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 거친 세상에 나아가 예언자가 되어 살아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결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 길은 부정한 권력에 항거하고 제국에 저항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매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혀 감시요원들의 사찰을 받아야 했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체포하여 감금당할 수 있는 길입니다. 요한은 제사 드리는 일보다 예언자로 민중들을 일깨우고 하늘의 길을 제시하는 일이 어느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요한이 고난의 길인 예언자의 길에 나선 이유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위험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신앙의 길이란 이렇게 안정적인 길을 버리고 위험하고 흔들리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길은 풍요로운 길을 버리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존경을 받는 길이 아니요 가난하고 지극히 작은이들을 존중하고 늘 겸손하게 섬기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요한의 삶은 오롯이 하나님의 뜻에 순명한 삶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삶에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본 것은 이러한 이유입니다. 자신의 전 소유를 버리고도 목숨을 버리고서도 기쁨으로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그런 길입니다. 마가공동체는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놀라운 시각입니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집중 없이 신앙信仰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마가공동체의 메시지입니다. 마가공동체는 철저하게 가난한자들의 공동체로 그들의 상황에서 본 예수를 그들의 입으로 전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세상의 중심부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가난한 사람이 차지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복음을 먼저 가난한 자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고 가난한 자를 단 한 번도 책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본래 성서의 중심이 가난한 자들임을 각성시켰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가난한 자를 편애偏愛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의 눈에 비쳐진 예수로 기독교는 새롭게 세워졌고 예수는 부활하십니다. 그것이 마가복음의 위대성입니다. 마가복음이 없었다면 마태복음도 누가복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도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위대성입니다.
▪ ‘예수의 복음’과 ‘예수에 대한 복음’
마가공동체는 ‘예수의 복음’과 ‘예수에 대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가공동체는 바울사도의 예수에 대한 복음을 예수의 복음으로 전환시킵니다. 우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예수에 대한 복음에 앞서 예수의 복음에 관심해야 합니다.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예수에 대한 복음도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한 복음에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협의의 의미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의미이고 광의의 의미로는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린 ‘예수에 대한 복음’ 이전에 ‘예수의 복음’을 관찰해봐야 합니다. ‘예수의 복음’ 없는 ‘예수에 대한 복음’은 예수를 이용하여 나의 부와 출세 그리고 천당에 입성하고자 함입니다. 이런 종교는 기독교를 가장 크게 왜곡시킨 나쁜 종교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의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라기 보단 예수를 수단으로 전락시킨 예수에 대한 복음일 뿐입니다. 이런 종교로는 자신의 구원은 물론 사회변혁社會變革도 불가능하며 새로운 세계를 지어갈 수 없습니다.
▪ 초대하기
코로나 19가 제 철을 만나 더욱 기승氣勝을 부리고 있습니다. 조신하시고 코로나의 기세가 꺾이도록 기도합시다. 어려운 시절을 걸으며 어려움 당하는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합시다. 그리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일에 힘을 보탭시다.
검찰개혁을 위한 정부의 방안들에 검사들의 반란으로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검찰개혁에 힘을 보테야 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나온 종교인 100인 선언에 이어 각 종단별로 대중 선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1000인 선언이 나왔고 개신교에서도 이미 천명이 훌쩍 넘은 분들이 선언에 동참하였습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집단이 된 검찰의 개혁 없이 언론 개혁도 쉽지 않고 검찰과 언론의 개혁 없이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검찰개혁에 힘을 보태야할 이유입니다.
몇몇 특권층이 지배하는 제국으로는 행복한 세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역사의 중심부에 세우고자 목숨을 바친 예수의 길에서 구원을 본 사람들이 마가공동체입니다. 그 눈은 정직하며 그 길에서 기독교의 미래가 있습니다. 이 정체성identity을 회복하는 길에서 우린 자주적 기독교, 자주적 신앙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일어나 이 거룩한 일에 동참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