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근본 가치인 ‘이웃 사랑’을 생각해보자. 정말 인간의 이웃사랑이 가능한 것인가? 율법학자는 영생을 질문했다. 하나님 법을 잘 지키고 살면서도 영생하고 싶은 모양이다. 듣보잡 같은 예수에게 질문하자,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영생의 길임을 다시 지적했다.
율법사는 이웃이 누구냐고 되 묻는다. 모세 오경이 말하는 이웃은 곧 기본적으로 유대인 자기 동포다. 율법사는 아마도 자기 동포 유대인정도로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했다. 공동번역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로 번역.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자기는 훌륭한 유대인으로 자기 동포 유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대답을 예수가 고백하게 함으로 자기의 올바름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효과였을까?
이런 인식에 기본적으로 문제, 내 이웃은 내 동포 유대인이다. 나는 동포 유대인을 사랑한다. 이 말은 곧 그러므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 속에는 더 많은 사람들은 내 이웃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율법교사는 아주 간절히 사랑할 이웃을 찾는 질문 같지만 사실 진심은 동포 유대인 아닌 많은 사람들은 이웃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것 아닌가? 자기의 배타적 이웃개념의 타당성을 증명받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교사, 그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으려고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셨다. 동포냐 아니냐가 이웃의 기준이 아니다. 제사장은 요새 성직자, 교회로 말하면 목사, 전도사급이다. 레위인은 장로, 집사급이다. 아주 핵심적인 유대인들인데 유대인(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유대인을 말한다) 동포가 강도를 만났지만 버리고 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시체 만지는 것은 부정한 일이라는 핑계를 댔다. 이들은 오경의 율법을 아주 잘 지킨 것처럼 보인다.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옹호법이라고 성경구절 들이대는 사람들하고 다를 게 뭐있나? 아주 성경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굉장히 배타적 이웃사랑이며, 결국 반성경적이다. 트럼프가 이겼다고 아직 주장하는 미국교포 크리스찬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사마리아 인을 등장시킨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적대적 관계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사마리아인을 들어서 강도만난 사람을 돕게 한다. 혁명적, 전복적 사고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웃으로 생각했던 율법교사, 제사장, 레위인들은 ‘~~ 이기 때문에’가 강하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들어서 ‘~~ 임에도 불구하고’를 말씀하신 것. 사고를 뒤집는 발상이다. ~~이기 때문에는 사실 상당히 배타성이 강한 말이며. 조심스럽고 위험한 말이다. ~~이다하고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even though)가 ~ 때문에(because) 보다 훨씬 부드럽다. 포용적이다. 내 이웃은 공부 잘해서, 돈 많아서, 똑똑해서 보다는 공부 못할지라도, 돈 없을지라도, 똑똑하지 않을지라도 내 이웃이다. 예수님이 지금 공부 잘하고 돈 많고, 똑똑한 율법교사에게 이걸 가르쳐주시는 것 아닌가? 원수 같은 사마리아 인을 들어서 말이다. 전태일의 이웃사랑도 그랬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여공들 임에도 불구하고 이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전봉준도 마찬가지다. 김개남등과 달리 그는 양반, 노비 모두에게 포용적이었다. 대화노력을 했다. 그러나 전봉준을 자신으로 이미지화 하려던 전두환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강도만난 사람을 도왔는가 이다. 전태일이나 전봉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33절,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마음이 요동쳤다(was moved with compassion)고 한다.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에서 나온 말로써 그 근원은 스플랑크나라는 희생제물이 되는 동물의 내장을 의미하는 말에서 비롯한다. 희생제물의 내장이 끊어지는 심정이라는 말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서 불쌍해서 자기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가운데 마음이 요동쳤다. 불쌍하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을 움직이게 했다.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마태18장 종의 비유에서도 나온다. 주인은 만달란트 빚 탕감을 간절히 원하는 종을 불쌍히 여겨서 탕감했더니 이 종은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 멱살을 잡고 돈 내놓으라고 했다. 주인은 너도 나처럼 그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냐고 물으신다. 종도 아니고 친군데... 누가 15장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는 돌아오는 둘째아들을 측은히 여겨서 저 멀리까지 뛰어나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고 한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율법교사에게 묻는다, 자 여기 세 사람 가운데 누가 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그리고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동포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웃이 누구냐, 누가 이웃이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 율법교사의 머리에는 엄청난 오경의 율법지식이 있었지만, 정작 그 마음에 있어야 할 측은지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 진정한 하나님의 율법은 없었다는 것 아닌가? 영생에 대해 질문한 율법교사에게 주님은 너는 언제 한번 이 사마리아인처럼 측은지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마음이 요동치고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해본 적 있냐고 도전하시는 것 아닌가? 비록 식었지만 뜨거운 연탄 한번 되 본적 있냐? 그게 영생의 길이고 그게 이웃을 찾는 길이다.
폭력을 당한 팔레스타인 출신 테러리스트를 어떤 유대인 주부가 헌신적으로 일주일 동안 간호해 준 이야기가 있다. 그 후 걱정된 그녀의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훌륭한 일을 했지만 더 이상은 하지 마세요, 엄마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다. 불쌍한 마음 아니었겠는가. “배신자, 아랍남자가 그렇게 좋냐, 다음에 시장에 나오면 죽여 버리겠다.”는 흔한 비난을 받았다.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대인을 돕는다는 것은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치명적인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예수님은 아마도 이런 배경도 다 염두에 두고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때로는 목숨을 거는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요동치면 행동하게 되는 것이 이웃사랑이라는 걸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가르쳐주신다.
렘브란트의 그림 ‘여관 앞의 선한 사마리아인.’ 개 한 마리가 똥누고 있다. 개는 똥 마리면 아무데서나 그냥 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본능으로 움직인다. 사마리아 인의 이웃 사랑은 본능이라는 것,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요동치면 그냥 본능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웃사랑이 별게 아니다. 만달란트 빚진 종도 마음이 요동치면 다 탕감이 된다. 근데 그게 없으면 백 데나리온도 안 된다. 마음이 요동치니까 아버지는 큰아들 눈치 볼 것도 없이 저 멀리 오는 둘째아들을 향해 달려간다. 전태일이도 그랬을 것이다. 노동자들을 향한 불쌍한 마음에 견딜 수 없었다. 형장의 목이 잘려 죽은 전봉준도 동학의 평등사상으로 보면 어찌 이 현실이 이렇게 농민들에게 가혹한가. 탐관오리들은 어찌 이 불쌍한 농민들의 현실을 몰라주는가, 왜구가 판을 치는 세상, 그는 아마도 그런 현실이, 그런 농민들이 불쌍해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아픈 현실을 불쌍히 바라보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러고 보면, 이웃 사랑은 상당히 주체적인 자발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도왔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울 이유는 없었다. 자기 주체적 자발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웃이 되어주는 일은 이런 것이다. 율법학자는 ‘누가 이웃인가’고 물었다. 이웃을 늘 객관화 시킨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이웃이란, 율법학자처럼 내가 어떤 상대방을 내 이웃으로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나 자신이 누구에겐가 이웃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이다. 주체적이고 자발성을 요하는 문제다. 자기의 자유선택의 문제이다. 누구나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다. 오히려 해서는 안되는 일이 될 수 있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도운 유대인 주부처럼 말이다. 때로는 목숨을 거는 일이 될 수 있다. 측은지심에서 나오는 주체적 자발성의 자유로 네가 목숨을 걸고 먼저 이웃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지금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라고 말이다. 영생은 꼭 천국가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오늘 나와 너의 만남에서 내가 먼저 이웃이 되어주는 가운데 누리는 생명의 기쁨과 환희가 영생 아니겠는가.
본 글은 2020.11.29 강남향린교회 하늘 뜻 펴기로 전기호 목사(예장 통합, 예수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