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했습니다. 일반달력은 1월에 시작해서 12월에 한 해가 끝납니다. 반면에 교회달력은 대림절부터 시작합니다. 대림절 첫 주가 오늘처럼 11월 마지막 주나 12월 첫 주입니다. 이 때부터 한 해를 시작해서 다음해 11월에 끝납니다. 대림(待臨)은 ‘임하기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오늘 본문 표현대로 하면 ‘인자의 오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별 고민없이 매우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은 기독교 교리의 완전체입니다. 그런데 이 완전체 교리도 곰곰이 생각하면 간단하지 않다.
오늘은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니 인자의 오심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중, 인자의 오심을 직접 말씀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26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어떤가요. 여러분도 인자가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온다고 믿습니까? 자연세계에서 구름은 공기 중의 수증기가 미세한 물방울이 되어 떠있는 것입니다. 지표면과 닿으면 안개, 지표면과 떨어져 있으면 구름입니다. 안개나 구름이나 같은 성분입니다. 높은 산이나 비행기에서 구름을 접하면 구름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압니다. 우주선처럼 무엇을 태울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구름의 성질을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성질로 바꾼다면 몰라도 이 말씀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말씀조차도 실현성이 사라졌습니다.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30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즉 예수를 처음 믿은 일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인자의 오심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인자의 오심이 있기 전 전조현상, 오늘 본문대로 하자면 천체의 대격변같은 종말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각 시대마다 이게 세상의 끝인가 싶은 말세현상은 있었습니다. 중세시대 때는 흑사병으로 천만 명이 죽었고, 지금은 코로나 19가 사람들을 덮쳤습니다. 전쟁만한 말세현상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세계는 세계대로 흘러왔고 인자의 오심은 여전히 기다림의 영역으로만 있습니다.
과연 인자의 오심은 무엇인가요? 좀 더 질문을 계속 해 보죠. 다시 오시는 인자는 누구인가요? 자연스럽게 이해하기는 일세기를 살았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연세계에서 죽은 후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 지구세계로 다시 귀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전제가 맞다면,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역사 예수는 우주 어느 공간에 있다는 말인지, 사람이 지구 외 다른 우주공간에 육체를 유지하고 사는 게 가능한지, 얼마 전 유인우주선이 사람들을 태우고 국제우주정류장에서 육 개월 산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주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인지, 그곳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 지구와 같은지, 그것을 밝히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도 우주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하는지 등 끝없는 궁금증이 이어집니다.
또 이런 의문들을 차치하고라도 다시 오시는 분이 일세기 역사 예수인지는 어떻게 판별하나요? 우리는 역사 예수의 얼굴도 모르고 사진도 없고 DNA도 모르는 데 인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 막상 이 일이 닥치면 막연합니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천년 역사를 통틀어서 전 세계 전 세대 사람들에게 인간의 이성과 지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심지어 무덤에 있는 사람도 다시 살아나게 해서(이미 시신이 먼지가 돼서 공기에 흩어지고 전 지구에 순환이 되고 있을 텐데 그 물질을 어떻게 원래 사람에게로 돌아오게 할지 난감하지만) 동시에 인자의 오심에 대한 어떤 증거를 준다는 것인지 등 의문이 많습니다. 인자의 오심을 믿고 싶어도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토대가 의외로 별로 없습니다. 이상의 논거만 보더라도 성서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많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종말징조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우선 24절, 25절에 나오는 천체의 이상징후, 해 달 별 하늘의 세력들의 변동은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는 서술이 아닙니다. 본문 각주에도 나와 있듯이 복음저자의 창작이 아니라 구약 예언서의 말씀을 자기 필요에 맞게 가져다 인용한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나 복음저자나 천체물리학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 수준에서 그들의 지각으로 세상이 평탄하지 못할 것이라는 변증을 천체현상의 이상징후로 말할 뿐입니다. 인자의 오심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합니다. 고대인들은 특별한 신적인 사건 앞에는 꼭 자연세계도 요동치는 서술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를테면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현현할 때, 산에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나며 짙은 구름이 산을 덮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 하늘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는 서술도 같은 방식입니다. 신적인 사건 앞에서 자연세계도 더불어 반응한다는 표현방식입니다. 인자가 구름타고 오신다는 서술도 그런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천체나 우주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는 일세기 사람들로서는 구름도 신화적인 표현 수단입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위대한 인물의 도래에 대해 구름타고 오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세기 사람들로서는 그들의 지각수준에서 최선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읽는 오늘 우리입니다. 우리는 일세기 사람들의 시각을 현 시대에 맞게 다시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어제 진밭교 아침기도회 말씀(누가 21장의 종말예언)에서 인자의 오심의 뜻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저자는 예루살렘 멸망사건을 완전 새롭게 창조했다. 세상 끝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지만, 종말 뒤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그것은 인자의 오심이다. 세상 종말을 인자의 오심과 연관지음으로 다가오는 종말을 두려워하며 허무하게 보낼 것이 아니라 인자를 맞이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일은 새로운 구원으로 들어가는 기회이니 그 때를 맞이하는 태도로 살아가자는 권면이다. 저자와 일차독자들은 그렇게 예루살렘성 멸망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인자의 오심인 새로운 해방세상을 맞이하는 기회로 만들었다.”
인자의 오심이라는 새로운 구원사건을 맞이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종말이라는 특별한 사건을 열거하는 저자의 결론은 의외로 평상적입니다.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종말장 마지막 단락에 깨어 있으라는 단어가 연속해서 네 번 나옵니다.(33, 34, 35, 37절)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고, 집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문지기처럼 깨어 있으라고 했다가 끝에는 모든 사람에게 깨어 있으라고 확대합니다. 마지막 말씀은 군더더기 없이 “깨어 있어라”고 끝냅니다. 강조어법입니다.
무엇에 깨어 있으라는 말인가요? 인자의 오심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을 양가적인 뜻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인자의 오심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인자의 오심은 새로운 해방세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다리는 보람이 있을 터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 날을 고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장 기득권집단인 사두개가 다른 세상인 부활을 믿지 않았듯이, 지금 이 세상에 대만족인 사람들이 뭐 하러 인자의 오심을 갈망하겠습니까? 그들은 인자의 오심이 전혀 반갑지 않습니다. 평화와 자주가 간절한 사람들은 온 몸을 다해 사드를 반대하지만, 미국종속, 군사주의, 긴장대결이 좋은 한미동맹주의자들은 사드를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듯이, 인자의 오심도 갈망하는 사람, 반갑지 않은 사람이 각각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인자의 오심에 대해 간절하여 그에 맞춰서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여행간 집주인은 돌아옵니다. 우리는 집주인을 깨어서 맞이해야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깨어 있는 게 있습니다. 부동산하는 사람은 아파트 값에 민감하고, 주식하는 사람은 주가변동에 촉각이 곤두서 있습니다. 사드철거투쟁을 하는 사람들은 소성리 상황에 항상 깨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엇에든 깨어있기 마련입니다. 인자의 오심과 해방세상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살면 자연히 그쪽으로 깨어 있게 될 것이고, 깨어 있는 삶은 구원으로 인도됩니다.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는 깨어있음입니다. 그렇게 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