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과 바닥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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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과 바닥정신
  • 양재성
  • 승인 2020.11.1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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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울녹색교회 하늘의 소리

전태일과 바닥정신
마태복음 25장 14절 30절

▪ 봄길의 바닥정신
  지난 13일은 전태일 열사의 서거 50주기였고 제 친구 채희동 목사의 16주기 추모일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채희동 목사의 산소를 찾았고 그의 아내 이진영 목사를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목사는 16년 동안 기일을 잊지 않고 찾아와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16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한 그의 죽음은 저에겐 정말 큰 충격이었고 제 운명을 상당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깨끗하고 착하게 살던 채 목사는 누구보다도 민중들의 아픔에 공감한 참 목자였기에 친구이지만 존경하였습니다.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삶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했고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도 소중히 여겼던 그였습니다. 
  채희동 목사의 정신은 걸레 정신입니다. 상대방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더러워지는 걸레는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이 걸레 정신이야말로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바닥정신이요, 민중의 영성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바닥정신인 걸레정신은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다른 모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바닥 정신을 회복하는 길에서 오늘날 교회의 살 길도 보입니다. 

사진제공 : 한현실님
사진제공 : 한현실님

▪ 전태일 정신
  전태일 열사 서거 50주기를 맞아, 여기저기서 전태일 정신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여야는 오랜만에 한 목소리로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자고 말했습니다. “전태일 정신을 기억하고 노동존중 의지를 확인하자”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자 인권 정신을 본받자” “전태일 3법을 통과시키자” “전태일의 외침에 정부와 국회가 화답 할 차례”라고 각각 강조했습니다. 시민사회종교 진영에서도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자고 다양한 행사를 열었습니다. 
  전태일 정신을 이어간 노동열사를 비롯해 구의역 김군과 김용균 씨 그리고 한 해 2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하는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존중해 달라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는 전태일 열사에게 노동계 최초로 무궁화 훈장을 추서했습니다. 반세기 만에 전태일 열사의 희생과 그 뜻을 정부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입니다. 이제 훈장 추서와 더불어 전태일 열사가 그토록 바랐던, 죽지 않고 일할 권리, 노동자의 권리가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전태일 열사 서거 50주년을 맞아 <전태일 정신은 00다>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전태일 정신은 <사랑>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전태일 정신은 <이끌어 주는 힘이며 인간선언>입니다. 전태일은 <우리 노동자도 사람이다>라고 외치고 분신했습니다. 죽음으로 노동자가 인간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전태일 정신은 <공감과 연대>입니다. 누구보다도 힘들고 어린 시다들의 삶에 애린을 느꼈고 고난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일어선 것입니다. 전태일 정신은 <소수자의 권리, 인권 찾기>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용기 있는 실천>입니다. 전태일 정신은 차별을 철패하고 진정한 노동자의 권리를 회복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정의로운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저항할 수 있는 <용기>라고 했습니다. 

  전태일의 주장은 한마디로 인간주의, 인간해방의 사상에 입각한 것이지 결코 누구를 증오하거나 타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만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동등하게 보장되며,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인간적인 정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사회였습니다. 전태일은 죽어가면서 어머니한테도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요! 가냘픈 생명체가 계속 병들어 가니까, 하루하루 병들어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단단한 벽에 작은 구멍을 내기 위해 목숨을 버린 다고 했습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어린 시다여공들을 사랑하고 연민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전태일의 사상은 "인간화요 바닥살이"입니다.
  
  전태일 정신은 고통당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노동자도 인간임을 선언하고 그에 준한 존경과 처우를 받아야한다는 요구합니다. 그 정신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노동 현실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국가는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경제발전을 도모하였고 기업은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경제 위기를 빌미로 유보시켰습니다. 이미 그 후유증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택배 노동자들이 과로로 인해 13명 사망했고 산재로 해마다 2000여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살기 위한 노동이어야 할 노동이 아직도 죽음으로 모는 노동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공감하기
  전태일의 삶에서 예수의 삶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두 분의 삶이 너무나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민중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아주 작은 신음 소리에도 귀를 기우리셨고 그 아픔을 지나치지 못하고 찾아가 손잡아 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전 생은 민중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질병을 치유하고자 하셨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마저 민중들의 참 된 구원을 위해 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전태일은 누구보다도 신심이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예수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고 그 정신을 받들어 살고자 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 정신입니다. 자신이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여공들이 굶으면서 일하는 것을 보면서 버스비를 아껴 풀빵을 사주고 그 먼 거리를 걸어 다닌 일, 그러다가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밤을 세운 일, 며칠 상간으로 각혈을 하면 죽어나가는 어린 소녀들을 보면서 이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며 노동자도 인간이라며 인간해방을 선언한 사건이 그의 분신사건입니다.  

▪ 종말론적 신앙
  오늘 성서일과는 마태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25장의 말씀입니다. 천국에 대한 비유 중 하나인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타국으로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은 종을 불러 한 명에겐 금 한 달란트를 다른 종에겐 금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종에겐 금 다섯 달란트를 각각 맡기고 길을 떠났습니다. 시간이 흘러 주인은 여행에서 돌아왔고 종들을 불러 회계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고 두 달란트를 맡은 사람도 장사하여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주인은 흡족하여 그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였고 주인의 즐거움에 동참하라고 천국에 초대하였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맡은 사람은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주인은 그를 무익한 종으로 책망하였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아내라고 하시고선 그 한 달란트를 많이 가진 종들에게 주라고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설명이 난해한 비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해석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예측하지 않은 때에 주인이 올 것이니 일상에서 성심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이 비록 먼 나라에 가셨지만 주인이 늘 계신 것처럼 아울러 주인이 언제 오시더라도 늘 깨어 주인이 맡긴 소임에 성심을 다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기쁨으로 주인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주인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종말 신앙이란 오늘 하루를 살아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하고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내 생에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만나고 내가 부르는 노래가 마지막 노래라고 생각하고 부르고 이 예배가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하고 예배한다면 우리네 삶이 어떨까요? 정말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천국은 종말론적으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사람들이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믿고 살아가는 삶이 종말론적 삶이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셨는데 언제 오시더라도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신앙이 종말 신앙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입니다. 건강이든 돈이든 실력이든 재능이든 가난이든 심지어는 무능력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세워져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것이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하나님 앞에서는 종으로 살아가는 삶이요, 주인이 전적으로 맡겼으니 주체적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닥살이입니다. 

사진제공 : 한현실님
사진제공 : 한현실님

▪ 바닥살이
  이민숙 시인의 <바닥>이란 시를 생각합시다. 

벌떡 일어선 바닥이 말한다 / 네 등에 쓰레기 버리면 좋으냐
네 머리통에 껌 딱지 붙이면 좋으냐 / 네 얼굴에 침 뱉으면 좋으냐
갑자기 일어선 바닥에 놀라 / 소스라쳐서 
전단지 한 장 버렸을 뿐인데요 / 똑같은 말에 지친다면서 말한다
바닥을 보시오 / 버려진 제각각인 양심들 널브러져 있다
부끄러운 양심 / 바닥을 향해 조용히 고개 숙인다

  다 받아 주어 바다랍니다. 바닥도 다 받아냅니다. 모든 존재는 바닥을 딛고 살아갑니다. 바닥을 딛지 않고 설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바닥의 힘을 모릅니다. 바닥이 되어 살아간 하늘의 사람, 그 하늘의 사람오신 예수의 삶을 보고서야 비로소 바닥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침 함부로 뱉지 마십시오. 바닥은 우리 시대의 양심입니다. 바닥의 힘을 믿고 바닥의 영성을 소중히 여기는 바닥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를 좋아하고 그들이 제일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한 예수그리스도, 노동자들을 사랑함으로 그들을 위해 희생한 전태일 열사, 생명을 노래한 봄길 채희동 목사, 그들은 죽었지만 다시 일어나 바닥살이로 삽니다. 아니 마침내 우리들의 바닥이 되어 살아갑니다. 

▪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는 창녀였다가 새 삶을 살기로 결단한 40개국에서 모인 100여명의 여인들에게 ‘은혜’에 대하여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거절할 수 없다고 여겨져서 주최 측에 요청했습니다. “은혜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만 먼저 그들의 말을 듣게 해주세요.” 그래서 며칠을 100여명의 여인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이 얼마나 조롱과 학대를 받으며 살았는지를 들었습니다. 필립 얀시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아 하는 그들에게 마태복음 21:31을 읽어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필립 얀시는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하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하필 여러분이 가장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오랜 시간 침묵이 흐른 뒤 불가리아에서 온 창녀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쁨으로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에겐 내려다 볼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밑바닥에 있으니까요! 가족도 친척도 친구들도 다들 나를 창피해 합니다. 사람이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진정으로 은혜를 갈망하게 되지 않을까요?” 필립 얀시는 그것이 가장 정확한 은혜에 대한 정의였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느끼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지만 손을 내밀어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절망은 영적 교만이나 안일함 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그 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 함석헌의 바닥정신
  함석헌은 바닥을 딛고 선 바닥의 사람들이 즉 씨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조그만 시골학교에서 한국역사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내가 실제로 교실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한국사를 있는 그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천년의 한국역사는 굴욕과 좌절 그리고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것은 마치 버림받은 길거리의 거지 처녀아이처럼 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넝마를 입은 처녀아이는 동네 건달들로부터 능욕을 당하고, 쫓겨다니고, 숨어다니다가, 결국에는 길거리 바닥에 지쳐 쓰러져서 힘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녀의 젖은 눈물을 닦아주고, 더러운 먼지를 털어주며, 그녀의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가 더듬거리며 얘기하는 중얼거림을 들었습니다. 나는 점차 한 형상을 내 눈앞에 떠올렸습니다. 그 형상은 희미하게 그녀의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수난의 역사, 고난의 여왕이었습니다."

  함석헌은 바닥을 살아온 한반도의 고난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역사에서 인류의 구원도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역사는 자각된 민중들에 의해 이어져왔습니다. 그 시원을 찾아가보면 로마 제국에 저항한 예수에게서 찾았고 예수 운동인 하나님의 나라 운동의 기반으로 세운 출애굽의 역사에서 찾았습니다. 제국의 노예로 살던 바닥살이들이 자유를 보고 해방의 길로 나아갈 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전태일은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불의한 세상에 뛰어들어 인간 해방의 춤을 춘 사람들, 바닥정신을 오롯이 살아온 바닥살이들에 의해 새로운 세상은 오고 있습니다. 교회의 구원도 그 바닥정신에서 시작해야합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바닥살이가 될 때 교회는 다시 신뢰를 얻을 것입니다. 그 거룩한 길에 저와 여러분, 우리교회도 동참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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