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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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 백창욱
  • 승인 2020.11.1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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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문(20. 11. 15) 성령강림 후 스물네 번째 주일, 추수감사주일
마태 25:14-30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전태일 열사 분신한 날 앞뒤로 많은 노동자민중집회를 했습니다. 이번 전태일 기념행사 구호는 “우리가 전태일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입니다. 최진웅교우가 가져 온 전태일 신문 일면 머리기사 큰 제목도 “아직 우린 ‘시다’다 ‘기계’다.” 입니다. 저도 이 구호가 실감납니다. 노동자는 기계와 동체라는 사실을 매일 실감합니다. 컨베어 기계가 돌면 노동자도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그 소리에 따라 몸이 자동으로 반응합니다. 컨베어가 노동자에게 끼치는 정신적 육체적 영향이라는 논문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다가 쉬는 시간이 돼서 컨베어 스위치를 끄면 동시에 우리도 일손을 놓습니다. 쉬는 시간이 끝나서 컨베어 스위치를 올리면 노동자도 다시 기계가 됩니다. 하루 네 시간 일할 때는 여유도 있고 공익에 기여한다는 보람도 느꼈는데 하루 여덟 시간 일하면서 그런 낭만 정서는 싹 사라졌습니다. 

16-14-13-12-10-8 이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는지요? 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의 변화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10시간 이상 일하는 현장이 많습니다. 최저임금을 장시간 노동으로 보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노동 시간도 저절로 단축된 게 아닙니다. 각성한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노동조건을 조금씩 좋게 만들었습니다. 절대로 자본이나 권력이 노동자를 챙겨줘서가 아닙니다. 더 나은 노동세상을 위해 투쟁한 많은 노동자가 감옥가고 테러당하고 살해당했습니다. 전태일 분신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전태일의 꿈과 희망은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직장갑질119>가 의뢰한 ‘전태일 50주기 직장인 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나 영세사업장 노동자에게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진단입니다. 전태일 시대에 비해서 현재의 노동현실이 나아졌는지를 묻는 설문에서 정규직 노동자는 51.5%가 좋아졌다고 답한 반면 오늘의 전태일인 비정규직 노동자는 37.8%만이 좋아졌다고 답했습니다. 대한민국 정치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친 전태일의 유언을 실천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66%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2/3가 오늘의 노동현실을 비관적으로 봅니다. 이 설문조사처럼 노동자들에게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누가 대신 해 주겠지’가 아니고 노동자시민들이 스스로 열어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달란트비유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유명하다고 해서 뜻도 다 아는 건 아닙니다.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달란트 비유의 교훈은 무엇인가요? 장사를 잘 해서 이문을 남기라는 말인지, 장사하기가 곤란하면 예금을 해서 이자라도 벌라는 말인지, 아니면 경쟁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라는 말인지... 결과물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경고인지... 아니면 모름지기 장사를 하려면 적어도 한 달란트 이상 밑천은 장만해야 한다는 말인지... 

우리는 달란트를 은사, 재능 정도로 이해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달란트는 돈 단위입니다. 고대시대는 돈을 무게로 달았습니다. 한 달란트는 금이나 은으로 35킬로그램 가량입니다. 다윗이 암몬 성을 정복하여 암몬 왕의 금관을 전리품으로 약탈했는데 금관의 무게가 금 한 달란트라고 했습니다.(삼하 12:30) 어떻게 그 무거운 왕관을 머리에 쓸 수 있는지 의아하지만 과시용으로 화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또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 왕이 사마리아 산지에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성을 건설했는데 사마리아산지를 구입한 땅값이 은 두 달란트입니다.(왕상 16:24) 달란트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 품삯입니다. 한마디로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오늘 말씀인 달란트 비유의 요지를 보겠습니다.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장사를 해서 두 배를 남겼습니다.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20절)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22절) 주인이 종들에게 하는 말도 똑같습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21절, 23절)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는 이야기 구조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종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주인의 심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 숨겼다고 합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의 귀책사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는데 오늘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수고도 안 한즉 손해를 보든지 이익을 남기든지 어떤 결과도 볼 수 없었습니다. 주인이 문책하는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마태 25장의 세 가지 천국비유에서 핵심입니다. 첫 번째 열 처녀 이야기와 오늘 두 번째 이야기처럼 세 번째 이야기에서도 임금은 심판받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지 않은 일을 문책합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42,43절) 문제는 염소 무리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정치현실도 그렇고 열악한 노동자 현실도 그렇고 가만히 있으면 변하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라도 사용해야 합니다. 다 탕진하든, 좋은 결과를 얻든, 이자만 받든 묵혀서는 안 됩니다. 문제의식이 있으면 그 문제의식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재능을 잘 사용하도록 기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꼭 결과가 좋아서만 감사할 게 아닙니다. 결과의 잘됨 못됨은 판단하기 힘듭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묵히지 않고 사용하는 그 자체가 감사한 일입니다. 

또 하나, 뜻밖의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은 두 종을 칭찬하면서 “네가 적은 일에 신실했으니 많은 일을 맡기겠다”라고 합니다. 거액의 돈을 장사해서 이익을 남긴 것을 적은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일이 가장 크고 중한 일일 텐데 말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말하는 많은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요? 

우리의 노선은 항상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새롭게 귀 기울이고 이 땅에 평화가 임하도록 하는 일이고 진리의 길에 서는 일입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일이고, 나에게 있는 달란트를 최선을 다해 쓰는 일입니다.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갇힌 자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국가폭력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같이 애통하는 일입니다. 권력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비록 그 일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신상이 크게 변하는 일이 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게 옳습니다. 교회 역시 안전을 도모하는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 속에서라도 안주하지 않고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그래서 가장 안전하게 하는 일이 불우이웃돕기다.) 그렇게 각각 삶의 자리에서 애를 쓰는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 나라가 당장 코앞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길에 서십시오. 감사는 저항투쟁을 견디게 해 주는 덕목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삶의 자리를 굳게 지키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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