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는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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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는 한 사람
  • 백창욱
  • 승인 2020.11.0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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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리 진밭 아침기도회(누가 15:1-7, 20. 11. 5)

오늘 복음은 잃은 양 비유다. 성서를 모르는 사람도 알 만큼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잃은 양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있다. 마태에도 있긴 하지만 누가는 훨씬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마태나 누가는 마가자료를 깊이 참고했다. 자기 복음서를 쓸 때, 원자료인 마가복음을 보태거나 빼거나 하면서 자기네 공동체 사정의 필요에 맞춰서 썼다. 그러나 마가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다. 마가에는 없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도 다수 있다. 오늘 잃은 양 이야기가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오늘 복음은 누가이므로 누가중심으로 자료배경에 대해 생각해보자.

소성리 진밭 아침기도회(20. 11. 5) 현장
소성리 진밭 아침기도회(20. 11. 5) 현장

누가는 잃은 양 비유 이야기를 어디서 가져왔을까? 마가가 모르는 역사예수 말씀을 새로 발굴한 것인가? 저술연대를 보자. 누가 저술 시기는 80년대 후반이다. 즉 역사예수 시대에서 오십년이 훌쩍 지난 시점이다. 두 세대가 지난 시점에서 역사예수의 생전 말씀을 발굴한 것인가? 후세대는 예수는 그리스도로 충분했다. 누가의 고유자료는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저자의 창작물로 본다. 어째서 그렇게 보는가?

오늘 본문 안에서 저자의 창작성을 찾아보자. 잃은 양 이야기의 시작은 식사자리다.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그 모습을 본 바리새와 율법학자들이 몹시 못마땅해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새는 정결례법을 끔찍이 여긴다. 그래서 자신들을 부정하게 하는 자리는 극도로 삼간다. 그들은 너무도 거룩해서 세리와 죄인같은 부정한 사람들과 밥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시대 반상차별 생각하면 딱 맞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구분이나 차별없이 세리죄인들과 기쁘게 어울린다. 예수는 세리죄인들과 자주 파티를 즐겼다. 정결례 때문에 늘 주눅들어 있던 세리죄인들이 예수를 통해 해방감을 만끽하니 그 기쁨을 어떻게 표출하랴? 잔치다. 바리새는 세리죄인들이 늘 자신들의 통제아래 있어야 하는데 주눅은커녕 해방감을 누리니 시기질투로 못 견디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잃은 양 이야기를 한다. 아흔아홉 마리는 그대로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다 찾아서 크게 기뻐한다는 내용이다. 여기까지는 이상 없다. 그런데 비유의 마지막 말씀이 아리송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회개한 사람은 세리죄인이다. 그런데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은 누구인가? 문맥상 바리새와 율법학자들은 아흔아홉에 해당하는 것처럼 읽힌다. 예수는 바리새율법학자들을 의인의 범주에 넣은 것인가? 그렇다면 더 이상하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와 바리새율법학자들 간 무수한 충돌을 볼 때, 이들을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의인 아흔아홉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누가복음을 쓴 80년대 후반에는 사실상 세리죄인 대 바리새율법학자들 간의 구도는 사라졌다. 예루살렘성과 성전 멸망 후 그리고 예수무리들이 회당에서 출교당한 이후 예수후예들과 바리새들은 완전히 결별한다. 이미 남남이 된 바리새 집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시의에 맞지 않다.

나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리죄인 대 바리새율법학자들의 구도는 누가저자의 설정이라고 본다. 사실은 내부자 무리에게 하는 말이다. 복음으로 해방의 삶을 살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의 관습 아래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직접 말할 수 없어서 바리새를 도구로 쓰는 것이다. 그들은 의인 아흔아홉으로 통칭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길을 잃은 한 사람이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아흔아홉은 허수다. 누가는 예수의 입을 빌어서 길을 잃은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잃은 양 비유의 핵심이다.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들, 예를 들면 여인이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해 온갖 수고를 하고 찾은 후 크게 기뻐하는 이야기나 집 떠나서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한 아들을 따뜻이 맞이하는 아버지의 사랑이야기를 볼 때 확실히 그렇다. 누가는 예수의 입을 빌어 잃은 양 비유라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노력은 무엇일까? 그들 모두가 이탈자없이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복음의 은총을 누리는 일이다.

우리는 사드를 철거시키기 위해 오늘도 분투한다. 상당수 사람이 75년 세월동안 미국종속에 세뇌되어 또 문재인정권의 친미사대노선에 부화뇌동하여 각성없이 한미관계를 묵인, 방관한다. 회개할 게 없는 아흔아홉이다. 그러나 성서는 말하기를, 하늘에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 뭐라 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절된 한미관계에서 종내는 미국무기 사드까지 안방에 고이 모셔 들이는 현실을 각성 못하고 계속 이대로 살 수는 없다. 각성 회개하는 한 사람이 되어 역사를 바꾸자. 하늘도 기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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