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0년 탄소 중립 선언

문재인 대통령이 11월 28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2050년 ‘탄소 중립’을 목표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럽연합을 포함해 70여 국가가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최근에는 중국(2060년)과 일본까지 동참하였고 한국 정부가 선언함으로 유럽과 아시아가 공동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게 되었습니다. 탄소중립은 온실가스 배출량과 제거량이 상쇄돼 순배출량이 ‘0’이 되는 상태입니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만큼 이를 줄일 수 있는 숲을 조성하거나, 재생에너지 개발에 투자하거나, 탄소배출권을 구매하는 등의 실천을 통해 도달하는 목표치입니다. 인류가 2050년 탄소중립에 도달하면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오른 데서 온난화를 멈출 수 있습니다. 결국 지구를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치밀하면서도 구체적 실천 계획이 요청됩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석탄발전을 재생에너지로 대체하겠다”고도 선언했습니다. 지난 5월 정부가 발표한 9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은 2030년까지 석탄발전 비중을 30% 넘게 잡고 있어 환경단체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2050년 탄소중립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현재 공사 중인 강릉 안인 1·2호기와 삼척 1·2호기의 전면 재검토를 포함한 석탄발전 감축안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정부는 구체적인 정책과 법제화, 예산 투자를 포함하는 탄소중립 로드맵을 서둘러 만들어야 합니다. 무늬만 ‘그린’이라고 비판받았던 그린뉴딜에 에너지 전환을 실현할 수 있는 세부적인 전략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그린 뉴딜에 농업정책을 포함시키고 농업을 혁신해야 합니다. 또한 파리협정에 따라 올해 말까지 유엔에 제출해야 하는 ‘2030년 온실가스 국가 감축 계획’에도 2050년 탄소중립이 가능하도록 목표치를 수정해야 합니다. 탄소중립은 이상이 아니라, 지구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미래세대의 절박한 요구입니다.
이제 기후변화는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세계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시급하게 결단해야합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시간이 10년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문제보다 더 심도 있게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이제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정부가 하겠다고 선언하였으니 민관이 힘을 합하여 국가 중심사업으로 추진해야하고 국민적 운동으로 전개해야합니다.

▪ 감리회 기후비상행동
감리교회 총회가 지난 29일 대면 및 비대면 영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게 교회냐며 비난하는 회원들이 많았습니다. 참담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총회였습니다. 참관한 친구 목사는 더 이상 감리교회에 기대를 걸지 않기로 작정했다며 씁쓸해 했고 새로운 방안을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감리교회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가려면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리회 기후비상행동을 조직하여 기후비상선언을 해야 합니다. 각 연회별로 각 지방별로 각 교회별로 기후비상행동을 꾸려 기후붕괴를 막고 지구 생태계를 살리는 길에 적극 나선다면 행동지침을 만들어 공동으로 실천하면 지구도 살리고 교회도 살리고 세상에서도 그 신뢰를 회복할 것입니다.
아울러 대안연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감리회 안에 대안연회를 구성하여 이번 선거에서 내세운 공약을 실현한다면 놀라운 결실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각 연회별로 대안연회에 참여할 만한 교회들의 동참을 끌어내고 연대하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친구 목사는 미국으로 가면서 저를 믿는다며 함께 대안을 찾자고 합니다. 저를 믿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고 제안하고 주님의 허락하시면 가능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갈 길을 잃고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이런 때가 길을 찾고 개혁하기에 좋은 기회입니다. 길을 함께 찾아봅시다.

▪ 추수감사절
오늘은 11월 첫 주일이며 창조절 아홉 번째 주일이며 추수감사절입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등불 삼아 길을 새롭게 나서는 절기입니다. 한 해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수고하고 땀 흘린 결실을 얻는 고마운 절기입니다. 별로 한 것 도 없는데 너무 많은 열매를 얻을 분들도 있고, 사실 열심히 일했는데도 기대보다 열매가 적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세상은 공평한 듯도 하고 불공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을 갖고 살아가지만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에 걸맞게 하나님은 늘 기대 이상의 값진 열매로 선물해 주십니다. 창조의 신비를 찬미하고 주님의 주신 선물에 깊이 감사드립시다.
오늘 어떤 고백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누가 한 번 이야기해보시렵니까?
▪ 저주와 감사
일본에 우찌무라 간죠는 저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에 저주가 있다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어보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버림받은 심령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을 읽어도, 요절을 외워도 성경은 많이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려야 합니다. 이것이 안 들리면 그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입니다. 세 번째 저주 받은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원망과 불평뿐이라면 그는 저주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을 만한 힘을 사람에게 심어주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었습니다. 아울러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위 세 가지가 없다고 그것이 저주는 아닙니다.
▪ 오대산 비로봉
지난 월요일 오대산 비로봉에 올랐습니다. 비로봉 오르는 길에 상원사 지나 적멸보궁이 있었습니다. 적멸보궁의 ‘적멸(寂滅)’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존상의 명호나 별칭이 아니라 범어의 니르바나(nirvna)를 의역한 말입니다. 니르바나를 음역한 것이 열반(涅槃)이고, 의역한 것이 원적(圓寂)이며, 원적의 다른 말이 적멸인 것입니다. 니르바나의 본래 뜻은 ‘소멸’ 또는 ‘불어 끈다’는 뜻인데, 이것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꺼 없애고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적멸보궁의 법당엔 부처님상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그렇다고 적어놓았습니다. 달리 생각해보니 적멸은 적요로 이어지고 그 적요에 들면 모든 존재가 부처가 되니 따로 부처상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대산 상봉인 비로봉에 올랐습니다. 불교에도 그 의미에 따라 다양한 부처님이 계십니다. 모든 존재를 존재 가능케 하는 부처, 창조주 격인 부처님이 비로자나불이라고 하는 법신불이 있고 비로자나불은 광명불로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존재이며 존재 그 자체입니다. 비로자나불과 한 몸이 되어 그 존재가 그대로 육신으로 드러난 분이 석가모니불입니다. 석가모니불은 기독교로 말하면 하나님이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종교는 그 벽을 넘어 유사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를 통해 기독교의 의미를 새기며 이웃 종교에 대한 이해를 높였습니다. 기독교가 절대적으로 옳으니 다른 종교는 그르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소중한 길임을 새삼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 자신을 낮추고 더 많이 섬기는 자
오늘 성서일과는 마태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23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의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시길 좋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말하니 그 말은 옳으나 그 말 대로 행하지 않으니 그들의 말은 듣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고자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고 랍비나 지도자라는 호칭 듣기를 좋아한다만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정말 큰 자는 더 많이 섬기는 자이어야 하고 높은 자는 자신을 낮추는 자라고 말씀하심으로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전중심주의 시절엔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유대교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시 성전은 지를 씻고 정화하는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전쟁과 로마의 박해 이후 성전이 훼파되면서 성전중심주의가 힘을 잃고 율법중심주의가 대두됩니다. 결국 거룩하게 정화하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 때 율법주의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지도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율법주의를 가지고는 인간을 거룩하게 할 수 없다고 본 분이 예수님입니다. 율법은 듣고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치면서 율법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킵니다. 오히려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 거룩한 삶
오늘 서신서의 성서일과는 데살로니가 전서 4장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 보냄 받은 자들은 거룩하게 살 것을 당부합니다. 결국 거룩하게 살도록 지음 받았고 보냄 받은 존재들입니다. 바울은 만물 안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과 신성을 두셨다고 보았습니다. 만물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거룩한 존재입니다. 인권도 동물권도 생명권도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는 인간만이 아닙니다. 성육신은 예수에게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 받은 거룩한 존재로 성육신 사건입니다. 이는 예수를 우리의 자리로 끌어 내림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긴 것이 아니고 우리를 예수의 거룩한 수준까지 끌어 올려놓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보다도 더 위대한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심지어 하나님을 따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거룩한 영이 거하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이 교회가 거룩한 것은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은 우리의 지혜, 경험, 소유, 미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거룩하신 분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아보게 하는 것이 종교의 책무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볼 수 있게 한 것이 거룩한 일입니다. 저도 제 일이 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러한 신비를 발견하고 거룩함을 느낄 수 있다면 결코 초라하거나 허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의 삶은 환희와 경탄이 될 것입니다.
이문재 시인의 시 <오늘 하루도 거룩하다>란 시입니다.
오늘도 지구를 일용했다 / 아침에 지구를 먹고
낮에 지구를 많이 사용하고 / 새벽까지 지구 위에 누워 있었다
내가 버린 것들은 모두 / 지구로 돌아갔다
오늘 하루도 지구에게 미안했다
나는 이 지구 위에서 / 자력 신앙이 아니다 / 자력은 나의 힘이 아니다
▪ 감사하는 마음
김현승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이란 시에서 감사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감사하는 마음 ―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主人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시인의 생각이 정말 놀랍습니다. 절묘한 표현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나와 만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이랍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이를 안다면 어떠한 불평과 불만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겁니다.
▪ 품위 있는 삶
김응호 장로님이 엊그제 교회 톡방에 옮겨 올린 글에 스콧 니어링의 삶에서 거룩함이 보입니다. 한 영혼이 거룩함에 경도되면 이렇게 위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경제학자라는 지위를 내려놓고, 땅을 일구며 소박한 삶을 살았던 미국의 자연주의자, 스콧 니어링. 그가 평생 지킨 원칙은 "덜 소유하고, 더 많이 존재하라." 였습니다. 한번은 일류 재단사인 친구가 그에게 양복 한 벌을 선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나는 대체로 옷 잘 입는 사람들이 남보다 우월해 보이도록 몸과 마음을 가꾸는 습관을 받아들이지 않네. 덧붙이자면, 구두 한 켤레, 모자 하나, 외투 한 벌, 넥타이 한 두 개, 허리띠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하네."
어느 날 그가 강연하기 위해 허름한 옷을 입고 강연장에 들어서는데 입장권을 받는 이가 막아섰습니다.
"입장료를 내지 않으면 못 들어갑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강연자라고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결정짓는다" 라는 신념을 삶 속에 실천했던 스콧 니어링입니다.
그는 백 번째 생일날 이웃들로부터 이런 글귀를 선물 받았습니다.
"당신 덕분에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 거창고교 직업 십계명
기독교 신앙의 길이란 세상과 다른 길이요, 세상과는 반대되는 길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길로 가라고 당부하셨고 바울은 세상을 본받지 말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이는 꼴지가 되고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과 지나치게 결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과 거꾸로 가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세상보다 더 세속주의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 십계명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서야 할 자리를 제시합니다.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청년들에게 이런 결단을 요구하였다는 것은 지나치다 싶으면서도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함이란 이런 것입니다.
▪ 거룩한 동행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터기 그리스 국경지대에서 진도 7도 규모의 큰 지진이 일어나 30여명이 사망하고 800여명이 상해를 입는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생명과 삶이 거룩하듯 이웃의 생명과 삶도 거룩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불의한 세력엔 맞서고 사랑으로 길을 가십시다. 설령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거부하지 마십시다.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는 좁은 길일지도 모르니까요.
우리는 거룩한 존재로 지음 받은 자들이며 거룩하게 살아갈 소명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으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거룩하게 만드는 일에 동참합시다. 2020년 추수감사절에 받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거룩한 행렬에 여러분과 동행이 되어 기쁩니다. 한 시절 잘 걸어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