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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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 묻혔다
  • 백창욱
  • 승인 2020.10.2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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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철회를 위한 소성리 평화 현장 연합예배(신 34:1-12)

소성리는 지난 주 목요일에 또 한번 공권력 폭력을 겪었습니다. 대규모 경찰병력이 침입한 게 이번이 열 한 번째입니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긴장이 엄습하고, 상황이 벌어질 때는 정신없고 끝나고 하면 차라리 홀가분합니다. 이번에는 우리도 2018년 4월 격자투쟁 때처럼, 사다리 여러 개를 겹치고 해체 못하도록 쇠사슬로 묶고 사다리 칸에 몸을 집어넣고 버텼습니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었는데 워낙 중과부적이라 실패했습니다. 열한번의 공권력 폭력 중 일차 때만 박근혜 탄핵 때고 나머지는 모두 문재인이 했습니다. 사드무기가 들어가면 충돌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 후에도 공사장비 들어간다, 시설공사 한다는 구실로 계속 짓밟혔습니다.

열 번이 넘게 같은 일을 겪으니까 저들의 속셈이 이제 훤히 읽힙니다. 국방부는 늘 장병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시설공사를 해야 한다는 구실을 붙입니다. 그러나 사드장비 들어가는 것이나 시설개선공사나 모두 사드기지 고정화입니다. 그리고  각종 차량들을 집어넣는데 차량행렬 중에는 꼭 정체불명의 차량이 함께 섞여서 들어갑니다. 5월 29일에는 사드무기 운영을 업그레이드 하는 전자제어기능 신형 장비가 들어갔습니다. 10월 22일 목요일의 경우에는 엄청나게 큰 무진동화물차가 들어갔습니다. 무진동차에 실을 물건이 무엇일까요? 공사장비인가? 사드관련 초정밀기계라는 짐작입니다. 이처럼 매사에 거짓과 비밀작전 수행하듯이 합니다.

이렇게 공권력 폭력을 계속 겪을수록 문재인대통령의 실체를 경험합니다.
그는 박근혜 적폐청산 촛불이 한창일 때, 또 대통령 후보시절에 사드에 대해 여러 번 반대 입장을 말했습니다.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소개하자면,
민중의 소리 자료 화면에는 “졸속으로 밀실에서 진행된 사드배치 결정 철회하고 공론화 과정 거쳐야 한다. 이참에 불공정한 소파도 개정하고 그 다음에 국회의 동의절차 거쳐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오마이tv에서는 정말 주옥같은 말을 했습니다.
“정부가 정했으니 ‘꼼짝마라’ 딴소리 하지 말라 하면 안 되는 것이죠.”
“사드배치를 정부가 결정하면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말하면 마치 안보관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마치 불온하기라도 한 것처럼, 뭐 종북이라고 비난할 근거라도 되는 것처럼. 이런 척박한 토론문화 벗어나야 합니다.”
“지역 주민들도 당연히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서 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이렇게 말한 사람이 막상 대통령이 된 후에는 사드에 대해 박근혜보다 더 충실한 미국의 종이 되었습니다. 목요일 또 한번 짓밟히고 나서는 문재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소회를 남겼습니다. “하나님, 문재인대통령은 참 나쁜 사람입니다. 너무도 거짓말을 잘 하고 이중플레이에 능합니다. 오늘도 소성리에 대거 경찰을 풀어서 주민과 시민들을 짓밟고 사드장비를 집어넣었습니다. 열 번이 넘습니다. 미제놈들 밑 닦아 주느라 제 나라 시민들 학대하는 일에 재미 붙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제가 그동안 살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보니까 민중을 학대한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제 명에 못 살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일찍 죽거나 감옥에 가거나 이름이 심히 더렵혀졌습니다. 제가 볼 때는 전 대통령들이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민중을 학대한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봅니다. 문재인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재인대통령이 늦기 전에 회개하고 사드기지 물리게 해 주소서.”

오늘 성서본문은 오경의 마지막 서술입니다. 광야백성이 40년 대장정을 마치는 시점입니다. 이제 강만 건너면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을 코 앞에 두고 모세는 여리고 맞은쪽에 있는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오릅니다. 지도를 보면, 여리고는 사해바다 위쪽입니다. 모세와 광야백성이 여리고 맞은쪽에 있다는 말은 광야를 완전히 지나서 가나안땅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제 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입니다. 모세는 전망이 좋은 봉우리에서 가나안 땅 전체를 살핍니다. 그리고 모세는 비스가 봉우리에서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가나안 진입을 스스로 단념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렇게 하라고 서술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많은 말씀이 당사자의 고백측면이 있다고 볼 때, 자신의 결단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어법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사람이 순종할 때라야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므로 가나안 땅 진입을 단념하는 건 모세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세의 위대함이 가장 절정으로 드러난 대목이 여기라고 봅니다. 자신이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새 세상은 오직 새 인물이 이어받게 합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해방군 지도자입니다. 성서에는 율법의 창시자로 나오지만 원래 출발은 해방군지도자입니다. 말하자면 건국의 아버지입니다. 모세의 말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도 지도력을 발휘해 줄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모세도 그런 백성의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접습니다.
“내가 너에게 이 땅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네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말씀을 나누는 둘 사이에 이심전심의 교감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10절)
결과적으로 말하면 참 잘한 결정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수십 년 권좌에 있는 독재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유럽으로부터 조국을 독립시킨 지도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변해서 나라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그런 불우한 사례를 볼 때, 모세의 결정은 얼마나 탁월한가요.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모세의 죽음을 마주하는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죽음에 어떻게 반응했나요? 여기서 또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설교제목을 여기서 얻었습니다.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서, 모압 땅 벳브올 맞은쪽에 있는 골짜기에 묻혔는데, 오늘날까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5,6절) 묻혔다는 말은 누가 묻었다는 뜻입니다. 누가 묻었나요? 백성이 묻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그 누구도 모세의 무덤을 찾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어찌하여 백성들은 모세의 죽음을 이렇게 처리하는 건가요? 저는 광야백성이 모세의 죽음을 장례하는 방식을 볼 때, 그들이 애굽의 노예근성, 생활습성을 완전히 떨치고 가나안에 들어갈 만큼 의식화가 성숙했다는 징표로 봅니다. 그 징표는 무엇인가요? 모세를 골짜기에 묻은 것입니다. 무덤 자리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비석도 없고 아무 표시도 없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새와 짐승 밥이 되라고 그냥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흔적도 없어서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어째서 이게 의식화의 성숙이라는 것인가요? 광야백성의 선조는 애굽에서 왕과 왕족의 무덤인 피라미드 건설에 이골이 난 사람들입니다. 권력자의 무덤은 피라미드처럼 기념비적이어야 합니다. 애굽 때뿐 아니라 오늘날도 권력자들의 무덤은 시신을 방부제로 바르고 기념합니다. 선거 때만 되면 박정희무덤, 노무현무덤이 얼마나 문전성시를 이룹니까. 정치인들이 출사표를 던질 때마다 권력자의 무덤을 찾습니다. 정치인이 그렇게 하는 건 세상이 그런 모습을 환영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관습에 따르면 모세의 장례도 충분히 그렇게 할 만합니다. 그러나 광야백성의 선조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들의 이세는 광야에서 애굽의 때를 다 벗었습니다. 저절로 벗어졌을까요? 아닙니다. 모세의 지도아래 끊임없는 교양훈련이 있었다고 봅니다. 가나안 땅 새 세상에 대한 구상을 백성과 함께 나누고 가다듬었습니다. 평등세상에 대한 예비교육입니다. 그 예비교육은 당장 모세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돋보이게 나타났습니다. 애굽의 바로처럼 하지 않았습니다. 최고권력자의 시신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삼십일 동안 정신적으로 깊이 애도하고 그의 시신은 땅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하나님 창조질서에 가장 합당하게 애도하고 시신을 장례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해방군 정신만 고스란히 간직하고 가나안 땅으로 전진했습니다. 

우리는 정권이 사드를 철거하는 용단을 내려주기를 간절히 고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민중이 사드철거의 염원이 얼마나 강력한지, 간절한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소원인지를 먼저 나타내야 합니다. 아무리 공권력폭력으로 짓밟고 눌러도 굴하지 않는, 다시 일어서는 의지로 입증해야 합니다. 또한 지상권력은 그 권력이 미제국이든 미제에 종속된 식민권력이든 진실로 하나님 주권 아래 있다는 의지도 필요합니다. 광야백성이 건국의 아버지, 해방군 지도자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십시오. 권력은 하나님께 종속돼 있다는 표시입니다. 결국 사드철거도 다른 누가 아닌 우리의 의지와 신념, 실천에 달렸습니다. 광야백성이 모세에게 목매지 않고 새로운 결의로 가나안 땅으로 전진하듯이, 우리도 주체적으로 사드 없는 평화세상을 향해 전진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글쓴이 백창욱님의 주일설교문(20. 10. 2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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