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마태복음 22장 15~22절, 데살로니가 전서 1장 1~10절
▪ 열매와 심판
오늘은 창조절 일곱 번째 주일입니다. 한 해 중 가장 아름답다는 계절인 시월입니다. 저마다 수고한 이들이 소중한 땀의 결실을 얻는 고마운 계절이기도 합니다. 혹 여러분은 지난 시간에 어떤 열매를 키워 왔습니까? 주인께서 여러분에게 찾아와 열매를 찾으시면 무슨 열매를 내어 놓을 수 있습니까? 그런 의미로 보면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심판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 두 사건
지난 한 주간 동안 감리회엔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감독, 감독회장 선거였고 다른 하나는 성소수자들을 축복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된 이동환 목사의 판결 사건이었습니다. 두 사건 모두 감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암울한 사건이었습니다.
▪ 감독회장 선거
먼저 감독회장 선거는 최악의 상황이 빚어졌습니다. 오늘날 감리회 위기를 조장한 이철 목사의 당선입니다. 물론 선거무효소송과 당선 무효소송이 걸려 있어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상황은 압도적 승리였습니다.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다시 심판자인 교권을 주는 어리석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지한 대중들이 얼마나 위험한 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미 진실과 정의로운 판단이 불가능해진 감리회의 참담한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향후 4년이 걱정되는 이유입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저는 몸에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감리회의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목회 31년 동안 처음 참여한 선거였습니다. 괜히 되지도 않을 거 마음의 상처만 받을 것이니 나서지 말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돼서는 안 된 사람이 되는 것을 구경만 하고 볼 수 없다며 가보지 않은 길을 성심으로 걸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결과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희망은 만나는 사람들의 눈빛, 변화를 갈망하는 염원, 그 타오르는 목마름에 있었습니다. 낙선과 상관없이 희망을 찾아 새로운 길에 나섭니다.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으니 운명처럼 주어진 길을 다시 걸어보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리회 개혁을 향한 걸음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 진감모(진정한 감리교회를 실현하는 모임)
지난 금요일, 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분들 30여명이 안산화정교회에서 모였습니다. 선거운동의 소회를 밝히면서 마음을 모으는 유의미한 시간이었습니다. 선거운동에 대한 평가서를 제출하고 향후 감리회 개혁 운동에 대한 제안문을 제시하였습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감리회 개혁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며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토로했습니다.
진정한 감리교회의 실현은 하나님의 뜻이며 감리교도들의 염원입니다. 지금은 시민사회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복음이 선포된 이후 감리교회는 여러 분야에서 선한 역사를 이끌어냈습니다. 교육, 병원, 복지, 정치, 경제, 독립, 통일, 민주화 등 계몽과 진보를 이뤄냈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그대로 사회의 변혁을 이루었고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감리교회는 사회적 지탄은 물론 교회 내부에서조차 불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35만 명이 감리회를 떠났습니다. 교회 내 물신주의와 기복신앙이 증대하였고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과 교회의 사유화와 공교회성의 상실 등으로 감리회는 그 위상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선거문화로 정직한 지도자를 뽑지 못하여 소송정국으로 이어졌고 지도력 공백을 초래하였으며 이에 휘둘려 합리적인 교단 운영이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리회 정체성을 갖고 진솔하게 목회하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곳곳에 있기에 그나마 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는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내용이 없어진 감리교회를 걱정하며 한탄해 하셨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한국 감리교회가 그 상황을 맞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감리회는 생존의 위기 앞에 개혁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에 이번 선거를 통해 감리회의 개혁을 염원한 분들, 감리교회를 걱정하는 분들이 진정한 감리교회 실현의 길에 나서고자 중지를 모았습니다. 향후 지속적인 장정개혁을 요구할 것이며 감리회의 위상을 세워 신뢰도를 높일 것입니다. 이로 보아 선거에 패한 것이 오히려 감리회 개혁의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갈 것입니다. 저희가 교권을 가지려고 한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감리회 개혁이었으니까요.

▪ 소신과 정죄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동환 목사는 인천 퀴어축제에 참석하여 성소수자들(동성애자들)을 축복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발되었고, 10월 15일, 경기연회 재판부 최종심에서 정직 2년에 재판비용 전액을(700여만원) 지급하라고 선고받았습니다. 연회 재판부는 ‘퀴어 축제에 참석하여 동성애자들을 축복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동성애를 지지한다고 아니 볼 수 없기에 이는 감리회 교리와 장정 “동성애를 지지할 경우에 정직, 면직 출교에 처할 수 있다”는 법조항에 따라 정직 2년 판결을 내린다고 주문했습니다.
▪ 정죄와 용서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예수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셨습니다. 단 한 사람도 돌로 치는 자가 없이 모두 돌아가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환대와 혐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요? 예수는 독선과 정죄의 종교를 용서와 사랑의 종교로 전환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감리회는 환대와 섬김의 종교를 다시 혐오와 정죄의 종교로 바꾸려하고 있습니다. 예수도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았는데 누가 누구를 정죄한단 말인가요? 더욱이 축복권은 하나님이 성직자에게 주신 고유의 권한 아닌가요? 하나님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그리하였다는 한 목회자의 고백을 믿지 않고 추측성 정황만 보고 동성애를 찬성한다고 판단한 재판부의 판결은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 부당한 판결
감리회의 위상을 추락시킨 서울남연회 전준구 목사의 성범죄 사건은 관대하게 처벌하는 재판부가 성소수자(동성애) 지지를 선언한 것도 아니고, 다만 자신의 교우 중에 동성애자가 있고, 그러기에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약자들 편에 서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올곧게 목회자의 길을 걸어온 목사를 이토록 엄하게 처벌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이는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소신 있게 펼치는 모든 목회자에게 타격을 줄 것입니다.
▪ 미연합감리교회와 성소수자
미연합감리교회(UMC)는 지난 20여년동안 동성애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회를 열어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높였으나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자 교단을 분리하기로 결정할 만큼 이 문제는 만만치 않습니다. 이는 동성애 찬성이 그르고 반대가 옳다는 입장이 아닙니다. 찬성도 반대도 자신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라면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보수근본주의 신앙인들은 동성애를 반대하고 진보개혁주의 신앙인들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동성애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인식과 성향의 문제인 셈입니다.
▪ 새물결과 성소수자
새물결은 아직 동성애에 대해 논의한 바가 없으니 동성애를 지지한다거나 반대한다고 결의한 바가 없습니다. 다만 동성애 문제가 마녀사냥으로 치닫는 것은 위험하며 감리회 선교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되기에 지혜로운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가 의학적으로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도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기독교국가인 선진국들이 동성 결혼을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고 동성애 문제를 논의의 장을 통해 연구과제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 과학과 종교
갈릴레오가 천동설이 부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지동설을 주장하였다가 재판부에 불려가 사형 선고를 받을 상황에서 이를 부인하고 나오면서 “지금도 지구는 돈다”고 흥얼거린 사건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지금은 어느 종교도 지동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잘 못된 신념이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알아야합니다.
▪ 법과 법정신
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법조문만 남아 사회적 약자를 정죄하는 도구로 전락한 율법을 폐하시고 그 정신을 일깨우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예수의 별명은 율법파괴자였습니다. 당시 종교가 신성시 하였던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는 용서 받지 못할 행위였습니다. 율법은 당시 사회의 체제를 유지하고 언약을 실현하는 핵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신을 상실한 교리와 장정은 반드시 개정해야합니다. 악법은 법이 아닙니다. 악법엔 저항하고 악법은 빨리 바꿔야 합니다.
▪ 목회자의 길
지극히 작은이들의 권익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 주님이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성직자들은 목숨을 걸고 목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 목회자의 숭고한 결단을 폄훼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이 설령 감리회 실정법을 어긴다 하여도 신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동환 목사는 실정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처벌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요? 무슨 근거로 이동환 목사를 동성애 지지자라고 확증하는가요? 그 논지가 궁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차별은 금지하고, 심지어는 선한이나 악한 자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구원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이 없고 백인과 흑인, 여자와 남자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물론 비장애자나 장애자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소신껏 판단하여 길을 가는 이동환 목사의 선택은 존중받아야지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 하나님의 것
오늘 성서일과는 마태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22장의 말씀입니다.
하루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찾아와서 다짜고짜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께서는 동전 하나를 달라고 하시더니 “이 형상이 누구의 형상이냐”고 물고 황제의 것이라 대답하니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은 누구의 소유입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고 선포하심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임을 증언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실재 우리 안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과 영이 계시며 그 창조의 영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그분의 뜻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힘을 주십니다. 이 진리를 인식하고 그 인식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며 우리는 그분의 일을 하려고 온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요한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6장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 예수를 믿고 그분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예수 사건은 우주 역사의 유일회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지으신 피조 세계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주로 통하는 문이 되셨습니다. 예수를 통해 우린 하나님을 알아보았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았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창조의 영을 깨워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참 신앙인입니다.
▪ 앎과 믿음
오늘 성경에 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지성인들은 예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진실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도를 참으로 잘 가르치는 분이요, 아무에게나 매이지 않는 분이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잘 알고 있었지 예수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가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올무를 놓았습니다. 그들은 고정관념으로 전락한 신념체제로 인하여 진리를 거역하였고 부당한 방식으로 역사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이 일은 지금도 기독교회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백주 대낮에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정확히 알아도 신념체제가 잘 못 되었으며 엉뚱한 길로 가고 신념체가가 잘 되어 있어도 잘 알지 못하면 이 또한 엉뚱한 길로 가게 됩니다.
앎과 믿음이 따로 갈 때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신앙을 배반하는 행위가 일어나고 이제 그 일은 일상이 되는 불행한 현실입니다.
▪ 믿음, 사랑, 소망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멋진 교회임을 소개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으로 세워진 교회이며 바울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자 바울 일행을 죽이려고 하였던 곳입니다. 그런데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복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으로 전하고 있고, 환란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교회였습니다. 주변에 좋은 소문이 난 아름다운 교회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믿음은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황제 치하에서는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통인 시절에 영원으로 통하는 문을 얻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믿음의 행위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믿음은 날마다 사건이 되어야합니다.
사랑은 삶의 내용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사랑을 두셨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셨고 사랑 때문에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출발은 믿음이지만 교회의 모든 행위는 사랑입니다. 그 대가와 상관없이 사랑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인들입니다.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이 없습니다. 사랑하십시다.
소망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래서 소망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하면 언젠가는 실현된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갈 용기를 얻는 것은 소망 때문입니다.
▪ 당신은 하나님의 소유
우리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우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구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 우리 시간과 우리 소유가 어디로 흐르는 가를 보면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이 누구에게 돌려지고 있는 지를 보면 우리 주인이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의 소유이며 누구의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삶을 살아오셨지만 앞으로도 더욱 그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일은 이 땅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며,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얻는 길입니다. 이 은총을 누리는 삶을 이어가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