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문(20. 10. 18) 성령강림 후 스무 번째 주일
출 33:12-23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은 주님과 모세의 대면장면입니다.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친 다음 일입니다. 앞장 32장에서 그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를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야웨로 모시는 사건입니다. 이 일로 백성은 레위 자손들에게 삼천 명이 학살을 당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야웨와 담판을 벌입니다.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려면 주님 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며 배수진을 쳐서 겨우 백성의 죄를 용서받습니다.

나는 광야에서의 금송아지 사건을 여로보암이 단과 세겔에 금송아지를 설치한 사건을 인용한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금송아지를 만든 후 북왕국 왕 여로보암이 하는 말과 광야백성이 하는 말이 똑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이 여기에 계신다.”(왕상 12:28)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출 32:4)
둘은 금송아지 사건의 당사자인 아론과 여로보암의 두 아들 이름이 똑같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입니다. 셋은 각각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 모두 일찍 죽습니다. 이것은 광야와 여로보암 때의 금송아지 사건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암시입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광야백성의 불신앙을 말하면서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사건을 소환한 것으로 봅니다. 시대 순으로는 광야사건이 먼저 일처럼 보이지만, 성서편집상 여로보암 사건이 먼저 있었고, 광야사건은 훨씬 후대서술입니다. 금송아지 숭배가 여로보암 때는 당연한 신앙행위였습니다. 하지만 후대로 가면서 야웨가 부족신에서 유일신으로 바뀝니다. 지지난주 십계명 해설에서 요시아왕의 종교개혁이 첫째, 둘째 계명이 생기게 된 배경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금송아지가 우상으로 전락한 시대의 변화가 광야백성의 금송아지 서술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는 묻고 주님은 답합니다. 모세는 이 백성을 저 땅으로 이끄는 동행자를 알려달라고 구합니다. 이 대화 과정에서 하나님은 확실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의 표시로 모세는 엄청난 하나님 현존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 큰 약속을 합니다.
첫 번째 약속은 14절입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 처음에는 천사를 보내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당신이 친히 동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두 번째 약속은 17절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 공동번역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너야말로 과연 내 마음에 드는 자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지금 네가 청한 것을 다 들어 주리라.” 하나님은 모세에 대해 각별하고 돈독한 애정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 약속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 하나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완곡어법인데 직설어법으로 바꾸면, “하나님, 당신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 보면 아주 집요합니다. 왜 그런가요? 집요하다는 게 부정적 느낌을 주지만 이들의 상황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이성으로 점잖은 것보다 정서로 절실한 게 더 낫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대신에 내가 손바닥으로 너를 가리워 주겠다. 내 등을 볼 것이다. 내 얼굴은 볼 수 없다’고 답합니다.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얼굴, 손바닥 등, 이건 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도 사람처럼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요? 모두 하나님을 의인화한 어법입니다. 얼굴, 손바닥, 등은 신체의 기능에 따라 하나님 자비의 속성을 설명하는 은유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체를 은유로 보는 까닭은 출 33장에 정반대의 서술이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는 모세의 생명건사를 위해 하나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했지만, 11절에서는 주님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문맥상 필요에 따라 하나님 의인화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실질 면모입니다. 어떤 사람이 누구인가를 표시하는 직접적 증거는 얼굴입니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교도소에서 수감자 사진 찍을 때 얼굴을 찍습니다. 경찰은 손가락 지문은 찍어도 손바닥을 찍지는 않습니다. 손바닥을 찍어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굴만이 그 사람의 결정적 표시입니다.
손바닥은 가리워 준다는 말씀에서 보듯이 보호 속성이 있습니다. 손은 어루만지고 감싸고 토닥이는 기능이 있습니다. 손바닥은 치유기능도 있습니다. 손바닥 안찰로 병자를 치유합니다.
등도 보호 기능입니다. 아기가 엄마 등에 업히듯이, 내 등에 기대라고 하듯이, 힘든 사람은 다른 사람 등에 기대므로 휴식을 얻습니다. 하지만 등은 누구의 등인가를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편적 기능입니다. 즉 얼굴을 보는 건 완전한 하나님 현존 체험이라면 등은 하나님 현존의 부분 체험입니다.
하여튼 모세는 각별한 하나님 현존경험을 합니다. 비록 얼굴이 아니고 등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영성기도에서는 기도 중 이적이나 특이한 현상으로 하나님 체험하는 것을 사모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체험했더라도 그 경험에 매이지 말고 속히 흘려버리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모세가 하나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등을 보는 것은 하나님 현존경험에 좀 부족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하나님 얼굴이 아니고 등인 게 은총입니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더 이상 체험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 체험을 한다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현존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등을 보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현존의 일부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사람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 이상 완벽한 체험을 하는 게 사람에게는 도리어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편을 뛰어넘는 희한한 체험, 이적경험을 하면 그만큼 하나님 신비에 겸손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내세우고 남과 차별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서서히 타락합니다.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모세의 하나님 현존 경험은 우리에게도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현존 경험에서는 모세나 우리나 보편적으로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약속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겠다.” 모세가 백성들과 저 땅으로 나아가는 사명이 있듯이, 우리도 더 나은 세상, 새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직하고 절실하게 담대하게 앞으로 나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