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린 돌을 머릿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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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돌을 머릿돌로
  • 양재성
  • 승인 2020.10.0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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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울녹색교회 가정예배(마태복음 21장 33~46절)

▪ 가정 예배

우린 시방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찬미하는 창조절기를 걷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자연을 완성된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신성시하였고 존중하였습니다. 참으로 자연세계는 신비로 가득합니다. 자연이 신비한 것은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저마다 길을 목숨을 걸고 걷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순명의 길입니다. 자연은 순명을 통해 창조주의 뜻을 실현해가고 있습니다. 순명은 거대한 자연이 살아가는 존재 방식이기도 합니다. 창조주는 순명의 도를 통해 자연을 유지보전하십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누구든지 오만방자하게 살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자신을 굴복하여 겸손하게 길을 걸을 겁니다. 그러기에 최고의 미덕은 겸손입니다.

한가위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올해는 저도 처음으로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처가에 가서 지냈습니다. 일전에 아내가 왜 명절엔 본가만 가냐며 한 해는 본가에 한 해는 친정에 가서 지내든지 아니면 당신은 본가에 자신은 친정에 가서 지내면 안 되느냐고 묻던 적이 있었는데 안 된다고 고집스럽게 지켜온 법이었는데 코로나 19가 상황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향은 자신의 시원과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고향을 찾는 것은 일종의 순례이며 정화의식과도 같습니다. 그 시점과 만나 다시 길을 떠나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오는 거룩한 환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고향을 찾는 것은 흥분과 설레임이 있습니다.

처가에 가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유의미한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가정예배를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교회당 예배가 강화되면서 가정 예배가 무너졌는데 오히려 코로나 19가 소규모 모임을 강화하면서 가정예배에 주목하게 하였습니다. 실제 저는 어린 시절 속회 등 가정예배가 신앙체험의 중요한 단초였습니다. 이번 차에 가정예배를 온전히 정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가정예배 지침서를 놓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순서를 정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합니다. 가정 제단을 만들고 둘러 앉아 예배합니다. 가정예배를 잘 정착하면 기도훈련과 말씀 훈련, 고백과 결단도 주체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미래 위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내는 일이 될 겁니다.

▪ 주님의 방식

오늘 성서일과는 마태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21장의 말씀입니다. 일명 포도원 주인과 소작 농부들의 비유입니다.

큰 포도원을 가진 주인이 있었고 주인은 포도원 소작 농부들을 뽑아 포도원을 맡기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돌아온 주인은 포도원 세를 받으려고 자신의 종 셋을 포도원에 보냈더니 포도원 소작 농부들이 주인의 종인 줄 알고는 한 명은 때리고 한 명은 죽이고 한 명은 돌로 쳤습니다. 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더 많이 보냈습니다. 소작 농부들은 그들에게 똑 같이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소작 농부들이 아들은 존중하겠지 하고 아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소작 농부들은 아들이 상속자임을 알고는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유산을 자신이 차지하자고 하며 아들을 죽였습니다.

이 사실을 안 포도원 주인은 가차 없이 소작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소작 농부들에게 맡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며 이 민족의 운명을 예시하고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하고 그 능력을 독점하는 종교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종교를 자신들의 권익을 얻기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되며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됩니다. 주인의 뜻을 버리고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킨 종교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는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포도원은 교회이며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소작 농부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 이스라엘을 의미하였습니다. 버린 돌은 이방인들이요 당시 유대 민중들을 의미했습니다. 머릿돌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입니다. 건축의 시작점이며 중심입니다. 하지만 결국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세상에서 별 볼일 없다고 버린 돌들을 주어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삼으시는 게 주님의 방식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처음부터 다르게 시작됩니다. 잘 난 사람들이 시작한 나라가 아닙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더 이상 출구가 안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몇 번이고 생명줄을 놓고 싶었던 사람들, 그들이 시작한 나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서러움을 다 당하고 고난의 짐을 다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는 오는 법입니다.

▪ 시인의 노래

복효근 시인은 <강은 말랐을 때 비로소 깊어진다>는 시에서 고난이 어떻게 깊이를 만들고 삶을 강직하게 만드는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뭄이 계속 되고 / 뛰놀던 물고기와 물새가 떠나버리자

강은 /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 처음으로 자신의 바닥을 보았다

한때 / 넘실대던 홍수의 물높이가 / 저의 깊이인줄 알았으나

그 물고기와 물새를 / 제가 기르는 줄 알았으나

그들의 춤과 노래가 / 저의 깊이를 지켜왔었구나

강은 자갈밭을 울며 간다 / 기슭 어딘가에 물새알 하나 남아 있을지

바위틈 마르지 않은 수초 사이에 치어 / 몇 마리는 남아 있을지......

야윈 몸을 뒤틀어 / 가슴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강은 / 제 깊이가 파고 들어간 / 바닥의 아래쪽에 있음을 / 비로소 알았다

가문 강에 / 물길 하나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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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인은 상처도 잘 익으면 향기가 된다고 노래합니다.

나무는 가뭄에 깊게 뿌리를 내려 태풍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가문 강은 가장 낮은 자세로 깁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다 드러내고서야

자신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강은 제 길을 알게 됩니다.

가문 강에 물줄기 하나 바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강은 바다를 지향하고 있을 때 가장 순수하고 거룩해 집니다.

우리도 하늘을 향할 때 비로소 신성한 존재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 변방과 중심

신영복 선생은 "변화는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는 ‘인류사는 언제나 변방이 역사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왔다’고 지적했고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변방은 창조의 공간입니다. 이유는 변방이야 말로 기존의 틀 속에 갇히지 않고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변방’은 콤플렉스가 없는 진정한 창조 공간입니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이분법적 사고는 바로 우리가 떨쳐내지 못하는 콤플렉스일지도 모릅니다. 동남아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의식, 백인과 그들이 쓰는 영어에 대한 열등감도 우리가 떨쳐내지 못하는 콤플렉스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떨쳐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진정한 ‘변방’으로 거듭나기를 당부했습니다.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닙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한 결정적 전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합니다.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새로운 창조 공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적인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헌신성, 중앙에 비해 주변이라는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지역성을 세우기 위한 열정적 운동이 필요합니다. 지역의 필요에 기초한 창조적인 의제와 방법을 창출하기 위한 혁신의 과정, 변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도전 정신이 요청됩니다. 그 도전 정신이 창조로 이어지고 비로소 새로운 역사를 지어가게 됩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은 바로 그 피 흘리는 저항이 없이는 기존의 질서를 깰 수 없고 두터운 질서를 깨지 않는 한 조금도 진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변방과 예수

예수는 자신도 변방인 갈릴리 주민이었고 그것도 갈릴리에서도 더 변방인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직업적으로도 그는 가장 천한 직업인 목수였습니다. 이래저래 예수는 변방 중에 변방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들의 삶에 주목하지 않는 마이너리티였습니다. 거기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냐며 비아냥거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이 관심을 거두고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됩니다.

물론 변방은 지리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리는 때로 정신성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심부였습니다. 출세하려고 하는 자들, 학문의 전당, 정치의 요람 등, 거기엔 성전이 있었고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중심부라고 생각하였고 자신들을 통해 역사가 움직여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당신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계셨습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숨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사는 목자들, 민중들만이 예수 속에 감추어진 그 빛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는 동방의 박사들, 깨어 있는 지성인들이 그 빛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공생애는 중심과 변방의 싸움이었습니다. 변방을 자처하는 예수는 늘 중심부라고 자처한 율법학자들과 대치하였습니다. 예수는 당시 중심부를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율법학자들에 비해 그저 조금 나은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질적으로 다른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새로운 권세를 가졌고 민중들은 그 가르침에 경도되었습니다.

▪ 버린돌이 머릿돌로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듯 멋집니다. 하나님은 쓸모없다고 버린 돌을 건축의 시작점이과 중심으로 세우십니다. 이것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기독교는 이 일에 충실할 때 세상의 빛이 되었고 소금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만들었습니다.

버린돌을 머릿돌로 세우셨다는 선언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질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 중심의 종교가 가정에서 마을에서 펼쳐지는 삶의 종교로, 율법 중심적인 종교가 사랑의 종교로, 이스라엘의 중심의 민족 종교가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인을 포함한 인류의 보편적 종교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서 기다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분노로 침노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여기서 침노란 무기를 가지고 빼앗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열정적으로 나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존 질서에 대한 분노로 이어집니다. <분노하라>는 책의 저자 스테반 에셀은 “우리는 저항할 때만이 창조하게 되고 창조할 때만이 저항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선포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이 거룩한 선포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은 버린 돌을 거두어 머릿돌이 되게 하신다는 주님의 선포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정체성이 분명하면서도 바람이 어디서 불어 어디로 흘러가는 지 알 수 없듯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가르침과 선포에 충실하며 길을 가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을 걷고자 길을 나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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