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위를 쳐라
상태바
그 바위를 쳐라
  • 백창욱
  • 승인 2020.09.28 2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일설교문(20. 9. 27) 성령강림 후 열일곱 번째 주일(출 17:1-7)

오늘 성서말씀은 민 20장에도 있습니다. 일명 ‘므리바사건’입니다. 그런데 두 본문을 비교해보면, 바위를 쳐서 물을 얻는 이야기는 같지만, 내용과 과정이 많이 다릅니다.
크게 다른 점 세 가지만 말하자면, 

첫째, 출애굽기 17장 므리바사건은 광야생활 초기에 일어난 일로 나옵니다. 출애굽해서 연속해서 일어나는 이야기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에는 광야생활이 오래 지난 뒤에 일어난 사건으로 나옵니다.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은 미리암의 죽음입니다. “백성은 가데스에 머물렀다. 미리암이 거기서 죽어 그 곳에 묻혔다. 회중에게는 마실 물이 없었다.”(민 20:1,2) 출애굽기에서는 므리바 사건 전에 미리암이 죽기는커녕 왕성한 활동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 한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너자 미리암이 여인들을 데리고 나와 소구를 들고 춤을 추며 주님을 찬양합니다.(출 15:20)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출 16장) 다음에 므리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민수기 므리바 사건에서는 미리암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같은 사건인데 시간적으로 많이 차이가 납니다.
 
둘째,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얻을 때 입회한 사람이 다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 장로들 보는 앞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제 내가 저기 호렙 산 바위 위에서 너의 앞에 서겠으니, 너는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하였다.”(출 17:6)
그런데 민수기에서는 모든 백성 앞에서 바위를 칩니다. “모세와 아론은 총회를 바위 앞에 불러 모았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반역자들은 들으시오. 우리가 이 바위에서, 당신들이 마실 물을 나오게 하리오? 모세는 팔을 높이 들고, 그의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다.”(민 20:10,11)

세 번째는 바위에서 물이 나온 방식에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주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바위를 치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했습니다.(출 17:6) 그렇게 해서 물을 얻습니다. 그러나 민수기에서는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친 게 큰 사달입니다. 야웨가 말씀하기를, “너는 지팡이를 잡아라. 너와 너의 형 아론은 회중을 불러 모아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에게 명령하여라. 그러면 그 바위가 그 속에 있는 물을 밖으로 흘릴 것이다.”(민 20:8)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위를 두 번 칩니다. 바위를 쳐서 물을 얻기는 했지만 그 일이 빌미가 돼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민 20:12) 분명한 이유가 나오지는 않지만, 모세의 결함을 찾자면, 하나님은 바위에게 명령하라고 했는데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같은 므리바사건을 취급했지만 세부과정이나 결말은 크게 다릅니다.

그렇다면 출 17장과 민 20장의 므리바 사건 중, 어느 말씀이 사실을 말하나요? 이제는 이런 질문이 좋은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기원전 15세기 일을 어느 누가 알겠습니까? 게다가 비주류인 하비루들의 이야기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비루가 존재가치를 드러낸 것은 구약성서에서 하비루가 이스라엘 조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비루 기록의 목적은 그 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역사서술이 아니라, 야웨가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셨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므리바 사건의 경우, 이 전승을 기억하는 각기 다른 집단이 므리바 사건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들을 구원하시었나를 고백하는 이야기입니다. 창 1장과 2장이 같은 창조기사이지만 사람들의 삶의 자리가 다르므로 창조기사 내용이 다른 것처럼, 므리바 사건도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출 17장의 므리바 사건은 무엇을 말씀하는 건가요? 우선 시작하기 전에 반성할 게 있습니다. 설교할 때면 늘 성서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지적하는 습성입니다. 그러나 수천 년 전 고대인들의 실상을 고발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러느라 정작 오늘 우리의 삶을 직시하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는 것은 고대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지식습득이 아닙니다. 지금 나를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본성대로 행합니다. 백성은 모세에게 대들고 주님을 원망합니다. ‘마실 물이 없다, 마실 물을 달라, 목이 몹시 마르다’는 말과 그래서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들었다는 말이 1-3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급기야 백성들의 원성은 모세를 돌로 쳐서 죽이려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지경입니다.
저는 그동안 이 대목을 보면서, 참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인내심이 없구나, 그리고 왜 걸핏하면 모세를 원망하지? 모세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해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겠습니다.

성서가 말한 대로 이해하자면, 출애굽한 사람 수가 딸린 아이들 외에 장정만 육십만 가량입니다.(출 12:37) 이 서술 자체만 봐도 출애굽 사건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까지 백만 명쯤 되는 사람이 제대로 물을 마실 수 있는 환경은 고대시대 웬만한 도시도 감당이 안 됩니다. ‘육십만’ 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 사건을 문자 그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읽는 사람이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과장법을 썼는데 문자주의자들은 육십만을 사실로 믿습니다. (제 생각에 출애굽 숫자는 만 배 쯤 부풀린 것 같습니다. <유일신 야훼> 같은 책과 그간 신학설을 따르면 출애굽한 일단의 무리는 한 육십 명 정도로 생각합니다.) 므리바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때 백성들이 이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 증언이 아니라,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원형으로 봐야 합니다.

마실 물이 없는 것은 그저 생활상의 불편이 아닙니다. 마실 물이 없는 건 생존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금식은 해도 물은 안 마시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백성들의 행동은 어찌 보면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게다가 광야에서 물이 없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이처럼 백성이 광야에서 물 없음으로 고통 겪는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우리도 광야를 삽니다. 광야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입니다. 송전탑 반대 투쟁할 때, 밀양 평밭마을에서 연대자들과 함께 주일예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광야는 국가폭력에 신음하는 현장이라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에서 생존하는 것 자체가 광야생활입니다. 우리도 늘상 고백하기를, 광야같은 세상을 산다고 하듯이.  

그리고 물이 없다는 건 그들이 부딪힌 근본적인 생존의 위기를 암시합니다. 이런 위기에 봉착했을 때, 가장 신앙적 해법은 무엇인가요? 이런 물음에서 광야 백성의 모습은 반면교사입니다. 대들고 원망하고 희생양을 찾아서 책임을 덮어씌울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각박할수록 배타적인 극우정치가의 지지율이 오르는 데는 이런 심리가 작용합니다. 나도 먹고 살기 힘든데 난민들 거둘 여가가 어디 있나? 라고 누가 선동하면,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문제해결은커녕 사정만 더 어렵게 꼬일 뿐입니다.

도저히 해결책이 없는, 다 막힌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님은 말씀하기를 나를 믿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서 가거라.” 이 말씀은 앞선 홍해사건을 떠 올립니다. 거기서도 똑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라.”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팔을 내밀어서 바다가 갈라지게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야웨가 주신 감동과 용기로 순종하여 바로군대를 따돌렸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마실 물이 없는 생존의 위기에서 주님은 모세와 장로들을 우선 인도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낙심하고 원망하는 백성들 속에서 끌어냅니다. 그리고 위기돌파의 수단은 바위를 치는 일입니다. 바위를 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바위에서 무슨 물이 나온다는 말인가요. 그러나 인간적인 수단이 막힌 상태에서 언제까지 인간적인 판단에 묻혀 있을 것인가요. 돌파하는 길은 나에게서 비롯되지 않는데 있습니다. 야웨가 명합니다. “이제 내가 저기 호렙 산 바위 위에서 너의 앞에 서겠으니, 너는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이 백성이 마실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위기를 당합니다. 때로는 살기 싫을 만큼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오만가지 생각이 심사를 어지럽힙니다. 원망하고 대들고 시험합니다. 광야 백성들의 행위는 반면교사가 돼서, 바위를 친 장소 이름이 ‘므리바’ 또는 ‘맛사’가 됐습니다. 오죽하면 이름이 ‘다툼’, 또는 ‘시험함’일까요. 너희는 그러지 말라는 암시입니다.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주님이 살아갈 길을 열어주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은총이 내려와 우리 숨통을 트이게 해 줍니다. 모세가 한 일은 야웨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위를 친 것입니다. 바위라도 치겠다는 순종으로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