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고통 받는 인간, 그리고 생태계
코로나19의 확산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미세먼지와 미세플라스틱이 우리 신체에 가하는 위협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시민들은 페트병의 재활용을 어렵게 만드는 스티커와 색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우리에게 친숙했던 어떤 탄산음료의 초록색 페트병은 재활용에 용이하도록 투명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페트병을 사용한 뒤에는 스티커를 제거하고 버리는 일이 소소하지만 지구를 지키는 작은 실천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카페에는 텀블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었고, 장을 볼 때 에코백을 사용하는 인구도 많아지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4대강사업이 무리하게 추진될 때만 해도 환경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비해 과소평가 되는 분위기가 강했다. 우리나라가 발전하고 국민들이 잘 살기 위해서 벌어지는 생태계 파괴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것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연일 높아지는 미세먼지 농도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등장한 방사능으로 인한 불안감은 시민들의 환경의식을 변화시키는 크고 작은 계기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코로나19의 등장은 이 모든 흐름을 일순간에 뒤집어 버렸다. 음식배달과 택배가 증가하면서 포장용 플라스틱과 종이박스의 소비량이 크게 늘었다. 음식배달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용기는 오염으로 인해 재활용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택배에 사용된 박스는 쉽게 제거되지 않는 스티커와 접착용 테이프로 인해 재활용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로 배출되는 양이 적지 않다. 카페에서는 바이러스 전염을 막기 위해 일회용 컵을 다시 규제 없이 사용하게 되었고, 서서히 자리 잡아 가던 소비자들의 친환경적인 행동들도 코로나의 확산으로 인해 위축되기 시작했다.
상상력과 소망을 제공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이렇게 사회 질서가 혼란에 빠지고 개인들은 불투명해진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빠져 있을 때, 종교는 정치와 과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영역을 채워주며 시민들이 더욱 연대하며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상상력과 소망을 심어줄 수 있다. 교회가 제대로 역할 한다면 세상이 상상하지 못하는 소망을 발견하고 세상 속에 전파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독교 공동체는 시대를 앞서가는 윤리의식과 소망을 지녀야 한다. 사회 일반보다 한 발자국 더 앞서가며 조금 더 깊이 통찰하면서 다른 이들이 보고 듣지 못하는 영역까지 포괄하고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이들은 악이 득세하는 듯이 보이는 세상의 흐름과 현실을 마주하며 살면서도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인 양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붙들고 살아간다. 이러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사건과 의미들을 자신의 삶과 연결할 줄 안다. 예언자들이 기록한 글을 읽으며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하나님의 정의 실현을 소망하면서 이에 대한 상상력으로 시대의 악한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극우 기독교의 반정부적인 행동으로 인해 코로나 방역에 큰 위기가 닥치고 있는 현 시점에 교회는 이러한 역할을 거의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의 잦은 유행과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해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수준의 재난과 재해가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것이고, 국제사회는 지금과 같은 혼란을 더욱 자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정부가 K방역이라 불릴 만큼 세계적으로 앞서 가는 수준의 방역을 보였지만, 이런 수준의 대응이 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한국교회가 보이는 시대착오적이고 비상식적인 사고와 대응방식은 이러한 위기가 나타날 때마다 반복적으로 드러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종교지도자들의 지도력과 지적수준이 사회 일반에도 미치지 못함이 연일 드러나고 있으며, 이들의 영적인 수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만으로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공감이 자라나기 어렵다. 세계 그 어느 나라의 교회보다 더 자주 모이고, 더 많이 모이는 한국교회이지만 인권이나 생태적 감수성에 대한 의식 수준은 사회 일반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공공성에 대한 의식도 매우 낮다는 것이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드러나고 있다.
보여주기식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던 무능한 정치인들은 코로나19와 같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칠 때마다 그들의 무능함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이 각 지자체 별로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정치권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환경과 시대적 요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교회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선교마저도 어려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코로나19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교회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제 교회 밖으로 나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정체성을 보여줄 때가 된 것이다. 전에는 드러나지 않던 좋은 목회자들과 작고 건강한 교회들이 사회활동에 앞장서며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헌금을 지역사회를 위해 내놓으며, 마스크를 만들어 지역주민에게 제공하고, 사회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돕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부터 많은 사람이 밀집하는 대형교회보다는 지역사회에 오래 뿌리내리고 있던 교회들이 오히려 주목 받고 있다. 새로운 윤리의식과 신앙적 상상력을 지닌 사람들이 위기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교회가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을수록 교회는 사회적 영향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여길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성도들은 신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며 교회의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신앙으로의 전환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의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해온 것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생태적 언어를 통해 말하자면 탄소에 중독되고 석유에 중독된 현대인의 삶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대하는 식탁에 놓이는 과일, 곡류, 고기 등은 사실 석유가 없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농산물, 수산물, 육류는 그것이 생산되고 유통되어 우리에게까지 오는 과정에서 생산자를 이롭게 하고, 땅과 물을 지속가능하게 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방식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땅을 황폐하게 하고, 바다를 오염시키며, 동물에게 참혹한 고통을 가하면서 생산되고 유통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에 눈을 감아버리고 이 모든 것을 생략해 버린 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식사 기도로 우리의 죄를 감춰버린다. 단지 싸게 구입할 수 있고, 편하게 소비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다니엘은 왕이 내리는 좋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다 깨끗하고 좋은 것이지만 다니엘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음식의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을 이유로 그 음식들을 ‘자신을 더럽히는 음식’이라고 규정하고 거부했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제공되는 음식을 그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신앙의 눈으로 해석하고 그가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여기에서 다니엘에게 먹는 행위는 단순히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 이상이었다. 이처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활동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이 음식들이 우리 식탁에 오기까지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과정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동의를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식사기도와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마친 뒤 잔반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식탁이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이 식탁이 과연 나를 더럽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은 당장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먹는 채소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재배되는지, 그것을 심고 키우고 추수하는 과정에서 땅과 농민들의 행복이 희생되고 있는 것은 않은지, 그리고 그것이 유통되고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적당한 가격이 형성되고 있는지(탄소배출까지 고려하면 더 좋다)를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먹거리를 우리의 신앙적 관심사로 가져올 수 있으며, 신학적 주제로 삼을 수 있다. 우리가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죽음의 문화’를 밥상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식탁 앞에서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감사기도를 하면서도 이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농민을 죽이는 과정을 거쳐 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부인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창조신앙에 무감각한 생태적 문맹이 아니겠는가?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돌보시는 생명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와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는 시스템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또한 하늘과 땅과 물을 오염시키고, 농민의 삶을 파괴하며, 가격으로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는 그런 시스템도 인정할 수 없다.
코로나19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과 자세도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신앙과 직결된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최재천 교수는 산업화와 무분별한 남획으로 인해 인간과 자연의 거리가 좁아졌고 이로 인해 야생동물로 인한 전염병이 증가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 했다.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감소, 열대우림의 파괴 등으로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로 인간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예견되어온 것이었다는 말이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두고 이를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단순화 하는 것은 인간의 잘못과 책임을 무시하게 만들며, 철저한 반성과 새로운 가치관의 등장을 어렵게 한다.
그동안 생태적 무관심은 자연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물질적 대상으로만 보게 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상생할 수 있는 관계 방식을 망각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에 대한 배려와 돌봄 없이 경제성장, 풍요, 편리함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며 너무 빠른 속도로 너무 깊숙하게 자연에 접근했다. 그리고 인간은 생태적 교란의 수준을 넘어 지구시스템의 균열을 야기하는 수준에 다다르게 되었고 결국에는 인류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조차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물질적 대상으로 파악하고, 화폐 가치에 따라 생명의 가치를 평가한다면 과연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새로운 신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윤리와 가치관을 부여한다. 이로써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다른 비인간 존재들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뿐 아니라,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음’과 ‘존재하지 않음’을 특성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자연까지도 이제는 나와 뗄 수 없는 관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의 발견도 포함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때 이전까지 보이지 않던 그들이 보이고 느껴지고 들리고 만져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기후비상사태와 코로나19로 인한 위기에 처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인식과 존재의 새로운 방식이다.
글쓴이 김신영 박사는 기독교환경교육센터 교육연구소살림 부소장, 2020 김신영박사와 함께하는 '생명살림 온라인그리스쿨'을 마치며, '개혁신앙 2020년 10월호 원고로 작성한 글입니다.


김신영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환경운동에 대해 연구했다. 현재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에서 강의와 글쓰기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생태적 전환을 돕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