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이든 죄이든 인간관계 안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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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이든 죄이든 인간관계 안에서 발생한다
  • 김기원
  • 승인 2020.09.15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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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열다섯번째 주일
창세기 50:15-21, 로마서 14:1-12, 마태오복음 18:21-35 (시편 103:8-14)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23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21-35)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화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고(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암 1:3;2:1).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차원을 넘어선 자신의 통 큼을 자랑하듯이 완전수 내지는 거룩한 수에 해당하는 '일곱' 번의 용서를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이든 일곱 번이든 제한적인 용서는 무한수로서의 일흔 번씩 일곱 번(혹은 일곱 번씩 일흔 번, 혹은 일흔일곱 번씩)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용서에는 제한을 둘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빙하가 녹아 없어지고 바다 밑은 플라스틱 가루로 백화되었다. 기후재앙은 인간이 하늘에 진 빚이 얼마나 큰지를 웅변한다. 그럼에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동료인 사람들을 착취하려 혈안이니 이를 어쩔까...
빙하가 녹아 없어지고 바다 밑은 플라스틱 가루로 백화되었다. 기후재앙은 인간이 하늘에 진 빚이 얼마나 큰지를 웅변한다. 그럼에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동료인 사람들을 착취하려 혈안이니 이를 어쩔까...

오늘 비유에도 숫자가 등장합니다.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유대 전역에서 갹출(醵出)된 한 해 세금 전체가 800달란트였다는 역사기록을 감안하면,
만 달란트는 머리로 계산하기 어려운 수입니다. 무한수로 보아야 합니다. 거기 대비해서 백 데나리온이 등장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6천분의 1 달란트이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백일 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로 치자면 적게 잡아 오백만 원, 많이 잡아 천만 원입니다.

그러니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은 비교가 되지 않는 숫자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조족지혈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상처나 죄값은 사람이 하느님께 끼친 상처나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아프시게 하는 일이 얼마나 심하고 다양한 지는 차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지만어버이 하느님은 언제나 그것을 참아 받아주시고 다시금 다시금 기회를 주십니다.
그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숨 쉬며 살고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이나 공기 귀한 줄 모르듯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에 무감각합니다. 그러니 살가워야 할 인간관계에서 도무지 관대함을 모르고 용서를 모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용어 '빚(헬. 오페이레마)'은 주기도문에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죄'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빚이든 죄이든 인간관계 안에서 발생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인연이 닿는 이들과 살면서 부대끼는 일들은 사실상 서로에게 빚이 되고 죄가 되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 하느님과 인간은 주인과 종으로, 인간들은 서로 ‘동료’로 표현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늘이 세워놓은 창조질서를 훼손합니다. 인간들끼리 착취하고 폭행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연에 대한 갈취는 이미 도를 넘어섰습니다.

기후위기라는 재앙을 맞아 지구별은 인종 멸절이라는 마지막 방법을 강구해야 할 지경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어김없이 밤과 낮을 주시고 바람과 비를 내리십니다. 인간은 햇빛과 달빛을 누리며 바다와 초원의 낭만을 만끽합니다. 빚진 사실 까맣게 잊은 채...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큰 자비하심을 입고 새로운 하루를 맞습니다. 만 달란트가 넘는 무거운 빚을 홀가분하게 탕감받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정녕 기쁜 일입니다.

그 감동으로 모든 것을 받아 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 깨달음의 감격으로 삶을 바라본다면 내가 받은 소소한 상처들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백 데나리온 - 그거 만 달란트에 비하면 껌값도 안 되는 것이니까요. 그 감동으로 지구별을 바라본다면 자연의 아우성이 곧 나의 아우성임을 뼈저리게 절감하겠지요.

총총히 탄소배출 줄이는 일상을 걷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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