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의미
상태바
용서의 의미
  • 양재성
  • 승인 2020.09.14 11: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일설교문(20. 9. 13) 성령강림 후 열다섯 번째 주일(마태복음 18장 21~35절)

▪ 용서와 용서 받음.
  오늘은 창조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영을 부어 주시어 창조계가 새롭게 힘을 얻게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창조질서보전 운동에 더욱 힘을 내야겠습니다. 지난 태풍으로 고리, 월성 원전이 8기나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없다고는 하지만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기후 비상행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어 다행이긴 합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마태 공동체가 전하는 18장의 말씀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께 묻습니다.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일곱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합니까? 그 때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씩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주인에게 용서를 받은 큰 빚(1만 달란트)을 지은 사람이 자신에게 아주 작은 빚(300데라리온)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주인은 큰 빚을 지은 자에게 책임을 묻고 그를 다시 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네가 용서하면 하늘도 너를 용서한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환대의 법칙이 적용되었습니다. 네가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 서(恕) 
  오늘 우리는 용서에 대해 생가해보고자 합니다. 
  용서(容恕)라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용(容)자는 여기서는 "담다"라는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곧, 용서는 서(恕)를 용(容)하는 것입니다. 서(恕)는 "용서하다"라는 뜻입니다. 

공자의 제자 여러 명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 자공(子貢)이라는 제자가 공자님께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평생을 두고 마음에 담아 실천할 만한 좌우명 하나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님이 "있고 말고" 하며 천천히 일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恕)니라" 라고.

  이 서(恕)가 바로 용서(容恕)입니다. 서(恕)자는 같을 여(如)자 밑에 마음 심(心)자가 붙었습니다. 자기를 용서함같이 다른 사람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서(恕)입니다. 

▪ 벌레 이야기
  용서를 생각하면 이청준의 <벌레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소설인데 이 소설이 토대가 되어 영화 <밀양>이 나왔습니다. 벌레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던 알암은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로 여타의 취미생활을 갖지 못하다가, 최근에 학원까지 다닐 정도로 주산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알암은 유괴를 당합니다. 그 와중에 알암의 엄마는 온갖 노력을 다하며 자식의 무사귀가를 염원하고, 이웃인 김 집사의 권유로 기독교 신자가 되어 하나님이 자식을 무사히 되돌려주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유괴 80여일 만에 알암은 재개발 건물의 지하에서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주산 학원의 원장으로 밝혀졌고, 그 또한 자신의 범행 일체를 자백하며, 사형수가 됩니다. 아들이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면서 깊은 슬픔에 잠긴 그녀는 신앙심을 버리고 범인에 대한 원한과 저주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아이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김 집사의 설득에 다시 하나님을 믿고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릅니다.
  그녀는 심사숙고 끝에 자식의 살해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면회를 갑니다. 그러나 그녀가 어렵게 살해범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면회를 간 것과는 달리 유괴 살해범인 주산학원 원장은 수감 생활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았다며 평온한 자세로 그녀를 마주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녀는 또 다른 고통과 함께 아주 깊은 절망감을 느낍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를 했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고통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중, 살해범이 사형집행을 앞두고 남긴 유언, 즉 자신은 너무도 평온하며, 다만 유족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라는 말을 라디오를 통해 들은 후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맙니다.

▪ 하나님의 소환
  벌레 이야기는 용서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하나님을 소환합니다. 하나님은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가 아이의 생존을 요청하는 기도에 소환됩니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어머니는 결국 실망하여 하나님을 부정하지만 다시 어머니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평정을 찾고 살인자를 용서하러 감옥을 찾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살인범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며 기쁨에 차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절규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한단 말인가? 하나님이 뭔데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를 용서해”라며 하나님을 거부하고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용서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피해 당사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한단 말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환하여 너무나 쉽게 용서를 거래하는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에서는 너무나 쉽게 용서가 판매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용서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영화 <미션>
  1750년, 남미의 오지로 선교활동을 떠난 ‘가브리엘 신부’ 일행. 그들은 신비로운 폭포 절벽 꼭대기에 사는 원주민 과라니족의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이들과 함께 교감하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악랄한 노예상 ‘멘도자’는 우발적으로 자신의 동생을 살해하게 되고, 죄책감과 절망에 빠져 죽으려하는 그에게 ‘가브리엘’ 신부는 함께 원주민 마을로 선교활동을 떠날 것을 권합니다. ‘멘도자’는 자신이 사고팔던 과라니족의 순수한 모습에 진심으로 참회하며 헌신적으로 신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낙원에서의 평화도 잠시, 과라니족의 마을이 포르투갈 영토로 편입됨에 따라 원주민들은 위기에 처하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무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멘도자’와 비폭력의 원칙을 지키려는 ‘가브리엘’신부는 각자의 방식을 선택하기에 이릅니다. 

  이 영화에서 감동적인 장면 두 개가 생각납니다. 하나는 멘도사가 동생을 살해하고 죄책감에 죽으려할 때 가브리엘 신부의 권유로 과라니족 선교에 참여하게 되고 그는 과라니족을 노예로 팔아넘긴 것을 회개하며 자신의 몸에 동아밧줄로 큰 짐을 지고 큰 폭포를 오르는 장면입니다. 짐이 무거워 몇 번이고 넘어지고 떨어져도 그 짐을 지고 과라니족에게 가고 그들이 직접 그 짐의 밧줄을 끊어줌으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용서가 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멘도사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들고 나설 때 장면입니다. 
로드리고 멘도사 신부 : 신부님! 축복을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가브리엘 신부 : 아니오. 만약 그대가 옳다면 신의 축복은 필요없을 것이오. 그리고 만약 틀렸다면 나의 축복은 소용이 없소. 만약 무력이 옳은 것이라면 이 세상에 사랑이 설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난 이 세상에서 살아갈 기력을 얻지 못할 것이오. 로드리고, 나는 당신에게 축복을 해줄 수 없소.
그리고선 자신의 목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벗어 멘도사 신부의 목에 걸어줍니다. 

  결국 가브리엘 신부도 멘도사 신부도 죽습니다. 그 들의 방법은 달랐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과라니족을 사랑한 것은 분명합니다. 멘도사는 자신이 잡아 노예로 팔았던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 과라니족의 영혼 속에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용서받는 다는 것이 무엇진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 손양원 목사
  6.25 때 지리산 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곧바로 이 공비들이 잡혔지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용서해 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입니다. 용서만 해 준 것이 아니라 이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입적하여 자기 자식과 똑같이 사랑한 거룩한 이야기가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절대로 가식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비우고, 사랑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용서란 그런 것입니다. 

너무 쉽게 용서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용서가 때로는 상대방을 새롭게 하고 자신을 자유케 합니다. 그럴 땐 지체하지 말고 용서하십시오. 

▪ 용서의 계절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 시간을 알뜰하고 / 성실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쓸데없이 허비한 /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함께 사는 이들에게 바쁜 것을 핑계 삼아 /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못하고
듣는 일에 소홀하며 건성으로 지나친 /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내가 어쩌다 도움을 청했을 때 / 냉정하게 거절한 /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남의 흉을 보고 때로는 / 부풀려서 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전달하고
그것도 부족해 계속 못마땅한 눈길을 보낸 /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감사보다는 불평을 더 많이 하고 / 나의 탓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말을
교묘하게 되풀이한 /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사소한 일로 한 숨 쉬며 실망하며 / 밝음 웃음보다는 우울을 전염시킨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
가을은 용서(容恕)의 계절입니다. 
유대교의 세 번 용서를 베드로는 일곱 번 예수는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랍니다.

하지만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도 있습니다. 성령을 훼방한 죄입니다.
생명파괴로 창조주를 모독한 죄, 진리를 훔쳐 조소거리로 만든 죄,
참 사람으로 사는 길을 가로 막은 죄, 가짜뉴스로 진실을 호도한 죄,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위장한 죄. 하나님 행세를 하는 가증한 죄입니다.

이제 용서할 사람은 용서하고 용서 못할 사람은 용서하지 않으렵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가 아닐까요. 

우리 이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평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