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질문, 누가 높은가? 눈을 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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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질문, 누가 높은가? 눈을 떴는가?
  •   이정배
  • 승인 2020.09.0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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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 위해 감리교 다시 태어날 것 기도 할 것 

 역사를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는 코로나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 9월을 맞았다. 조석으로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가을로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아낌없이 주었던 자연도 올해는 상처투성이다. 홍수와 태풍, 자연 탓이라 하지만 인재(人災)아닌 것이 없으니 사람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된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매를 거두며 하나님 구원을 노래했다던데 우리는 이 가을을 어찌 맞을지 모르겠다. 

   이정배 교수(현장아카데미)

  내가 속한 감리교회, 영락교회 중등부 회장직을 마치고 친구를 따라 감신대 앞 평동교회를 다닌 이래로 나는 줄곧 그와 인연을 맺고 50년 넘게 살아왔다. 내 평생을 바친 곳, 하나님의 발길이 나를 왜 이곳으로 차 몰았는지 모를 일이다. 배우면서 가르치면서 나는 감리교가 참 좋았다. 협성이란 이름으로 시작하여 쌓여진 감신의 전통, 그의 족적에 자부심을 느낀 것이다. 불과 100년 남짓한 지난날의 역사를 떠올려 본다. 같은 기독교를 전수 받았으나 초창기부터 일제를 거쳐 60-7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배들은 여타 교파와 많이 달랐다. 서구 기독교를 민족(종교) 주체성 속에서 수용했던 목사들이 있었다. 특수계시를 인정한다 해서 일반계시를 부장할 이유가 없다고 가르친 이가 우리들 스승이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사회주의자들과 손잡고 그 뜻을 펼치려 했던 민족의 어른들이 우리들 선배였다. 상해 임정(臨政)의 기초를 놓았던 분도 있었다. 3.1 선언은 물론 좌우를 품은 신민회의 독립운동도 감리교 목사들이 주도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 역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땅의 개신교가 수십 류(類)의 교파로 나뉘어 전도할 때 교파적 기독교의 한계를 적시하고 그리스도 환원운동을 이끌었던 이들도 우리 전통에서 비롯했다. 목회 직을 거부하고 교육에 헌신한 평신도 운동도 감리교의 몫이었다. 

  이런 감리교였다. 우리가 돌아 갈 곳이 있다면 성서의 예수가 우선이겠고 백 여 년 전의 이런 전통일 것이다. 돌아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분명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행복하게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도처에 있으니 걱정이다. 자신들 이기적 셈법에 너무도 익숙한 탓이다. 이들은 누가 높고 큰가에 관심한다. 목사의 크기를 오로지 교회 크기로 가늠하는 속물들이다. 현실만 보이니 갈 곳을 잃었고 가려는 마음조차 없다. 이를 일컬어 성서는 소경되었다고 말한다. 고작 하는 일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마음 없는 표어만 예배당에 걸어 놓을 뿐이다. 하지만 앞선 선배들은 자신과 민족을 위해 눈을 뜨고자 애썼다. 자신이 먼저 보아야 민족을 옳게 이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여전히 크고 높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눈을 뜨고 싶은가를. 이 질문은 죽고자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예수가 제자들을 향해 던졌던 마지막 물음이기도 했다. 3년간 같이 살았던 제자였건만 자신 마음 몰라주는 것에 아픔을 느끼면서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예수 십자가 행보를 보지 못하고 누가 높은 가를 두고 논쟁한 제자들, 성서는 이들을 소경이라 했다. 9월을 맞은 선거철에서도 이런 소경들의 싸움이 지속될 것인지 묻고 싶다. 지난 4년을 생각해 보라. 율사(律師)들에게 엄청난 비용 들여 송사했던 과거를 말이다. 돈의 힘이 손바닥 뒤집듯 수장(首長)직을 뒤바꾸는 우스운 꼴을 수차례 목도했다. 이런 현실을 보며 필자는 감리교의 소경된 모습을 다음 3가지로 정리하고 싶다. 첫째는 자신의 근본과 출처를 잊은 영적 치매, 둘째는 세상과 소통 않고 끼리끼리 의식에 젖은 영적 자폐 그리고 맘몬(돈)을 거룩으로 포장하는 영적 방종이 그것이다. 육체적 질병으로서의 치매와 자폐도 무섭거늘 하물며 영적인 그것이라니 참으로 두려워해야 옳다. 말했듯이 역사를 전후로 나눈다는 코로나 현실에서 과거의 모습을 답습한다면 하나님은 감리교를 역사에서 내치실 것이다. 누가 누구를 도왔으니 직(職)하나 던져주고 감독되게 했으니 감독 만들어 주고 우리 계파에서 감독을 잇겠다는 이런 발상을 세상이 알까 무섭다. 그러면서 영적 존재임을 과시하니 이를 일컬어 영적 방종이라 말한 것이다. 

  코로나 시대가 되었다. 지난 시절로 되돌라 갈 수 없을 만큼 시대는 ‘뉴 노멀’을 요구하고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란 말씀이 이번처럼 절실하게 느껴진 적이 없을 만큼 그렇게 말이다. 구태의연한 의식, 몸에 밴 정치 감각, 인습적 판단을 갖고 코로나 이후 시대를 이끌 수 없다. 왕이 되고 싶은 가시나무처럼 세상을 위해 줄 것 하나 없으면서 내 품에 와 거하라고 거짓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내 품을 거절하면 불사를 것이라 위협할 것인지 묻고 싶다. 많은 목회자들이 밤 새 알바하다 돌아와 새벽 예배드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2-3 중직을 수행하며 목회현장을 지키는 이들도 부지기수이다. 이런 현실을 알고도 이중직을 허용치 않는다는 행정지침을 내리는 것이 교단이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현실을 보고도 금권 선거를 하고 싶은 것인가? 그래서 묻는다. 감리교단을 위해 나선 9월의 사람들, 그대들에게 감리교 미래를 위한 ‘뉴 노멀’을 묻고 싶다. 아니 당신들에게 ‘눈을 떴냐’고 묻고 싶다. 영적 중병에서 치유받기를 원하는 가를 질문하고 싶은 것이다. 감리교 장로들도 예외가 아니다. 목사들 탓이겠으나 장로들에게서도 희망을 볼 수 없으니 어디에 우리들 미래가 있을 것인가? 

  높고자 말고 뜨고자 한다면 영적 치매가 치유된다. 우리들 돌아 갈 곳이 보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그곳은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했으며 독점하지 않고 나눴으며 세상(로마)과 다른 삶을 살고자 기를 썼던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모였으나 제대로 흩어지기 위해 그리했을 뿐이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그 능력을 일상에서 행했던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이 시대의 교회는 과거처럼 폐쇄된 방주가 아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에 말씀하나 세상을 통해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분이다. 알기 위해 믿어야 하나 믿기 위해서라도 먼저 알아야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하나님, 그의 영(靈)을 온전히 모실 때 교회는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자유의 보고(寶庫)가 될 것이다. 영적자폐는 불고 싶은 대로 부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만 치유될 수 있다. 온갖 차별을 횡단하며 하나로 이끄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을 지어다. 우리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이 하나님 몸인 세상도 온갖 형태의 약자들인 것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개신교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오직 믿음’의 교리가 중세기 면죄부보다 더 타락했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회자된다. 자본주의가 빚을 강요하듯 개신교가 죄를 너무 강조한 탓이다. 죄가 있어야 돈(헌금)도 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다. 영적 방종이란 말이 이에 합당치 않은가?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길이다. 더더욱 코로나 이후 시대에서 말이다. 대형교회 목사, 교단 지도자들의 영적 방종, 그 막이 내릴 때가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거듭 묻는다. 코로나 시대에 오직 높고자 하는 당신들의 ‘뉴 노말’이 무엇인지를!!!
과연 이 시대를 이끌 자신이 있는가? 가시나무의 자만과 위선, 거짓과 위협으로 이 직을 얻고자 하는가? 우리를 있게 했던 신앙 선배들을 욕보이면서 수장이 되려고 하는 것인가? 또 다시 율사에게 조롱당하며 치욕스런 4년을 보내고 싶은 것인가? 코로나 시대는 위기이자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이다. 신앙의 ‘처음처럼’을 회복하라는 명령이다. 인류 문명을 교정함과 동시에 창조한 세상을 ‘참 좋다’ 하신 하나님 환호를 되살리라는 것이다. 하나님 무덤과도 같은 교회를 되살릴 자신이 있는가? 기피하고 싶은 종교인으로 낙인찍힌 개신교인, 이 상처를 치유할 힘이 있는가를 묻고 싶다.

  십자가를 바라보자. 눈을 떠야 보이는 것이 십자가이다. 높고자 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사치품일 뿐이다. 붉은 색 감독 옷에 매달린 십자가 그것을 자랑치 말고 일상을 십자가 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라. 그것이 진짜 십자가이다. 그 때 세상은 십자가를 사랑할 것이고 ‘뉴 노멀’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다. ‘뉴 노멀’이 별것이던가? 우리들 본래성이 회복되면 되는 것을....  웨슬리는 자기가 시작한 감리교회가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않고 본래 뜻이 사라 질(지는) 것을 걱정했다. 나도 그렇다. 내가 50년 몸담은 감리교가 이렇게 빠르게 무너지는 꼴을 보기 싫다. 내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감리교가 다시 태어날 것을, 사람들이 눈뜨게 되기를 기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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