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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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道)
  • 김기원
  • 승인 2020.08.3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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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 열세번째 주일

예레미야 15:15-21, 로마서 12:9-21, 마태오복음 16:21-28 (시편 26:1-8)

21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주셨다. 22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리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24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25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 28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마태 16:21-28)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24절)

​사람의 일에 함몰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하늘의 일을 상상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 가르침의 정수를 드러내십니다. 십자가의 도(道)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길을 요약해서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해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얻고, 목숨에 연연하다 예수의 길을 잃어버리는 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 우리는 예배 때마다 그 십자가의 도를 상기하며 새롭게 결단하곤 합니다만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대체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너무 추상화되어 우리 피부에는 와 닿지 않는 무엇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 길을 걷자면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짊어져야 할 것이 있다. 그것 분명히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道)이다
십자가 길을 걷자면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짊어져야 할 것이 있다. 그것 분명히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道)이다

​십자가의 도에서 분명하게 부각되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버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는 결코 지고 가지 말아야 할 것, 곧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또 당연히 짊어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매튜 폭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십자가의 도는 부정의 길_via negativa이 있고 긍정의 길_via positiva이 있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의 신성을 회복하는 창조의 길_via creativa, 나아가 거룩하게 변모하는 길_via transformativa이 있습니다. 비울 것을 비우고 채울 것을 채워 창조적 질서를 회복하고 마침내 하느님의 마음으로 변모되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의 길을 따라나서며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스승께서는 단도직입(單刀直入) ‘자기’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리라 – 거짓 자아, 곧 자기중심적인 온갖 망상들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결국 허망할 뿐입니다. 전도서의 표현처럼 헛되고 헛되고 정녕 헛된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나는 무질서한 탐욕 덩어리 허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참 나는 참 생명인 하느님의 형상입니다.

새처럼 비우고 비우되 뼛속까지 비우는 버림이 있어야 하늘을 안아 누립니다. 무질서한 욕망들, 어리석은 기대들, 허황된 두려움과 화들, 잘못된 습(習)들 - 깨끗이 비워내야 비로소 비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목적을 자기중심적으로 설정합니다. 내가 이러저러해야 하겠다, 내가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등등. 하지만 그런 생각을 품고서는 예수 못 따른다는 가르침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 틀을 깨지 않으면 타자 중심의 예수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길은 하느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마치 모세가 소명을 받기 위해 하느님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서는 모세가 하느님 만날 때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표현합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려거든 네 신발을 벗어라!(출애 3:5)”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보호막을 벗는 것과 같습니다. 옹졸한 자신을 가리는 너울을 과감히 버릴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십자가의 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내 개인적인 영역의 생각 곧 나 중심적인 생각과 가족 혹은 집단 이기주의적인 생각, 뭔가 합리적인 것 같지만 결국은 지엽적인 생각 짧은 생각 조급한 생각인 것들, 그런 것 다 내려놓고 훨씬 멀리 내다보고 훨씬 큰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신발을 벗는 일입니다.

​반대로 예수 따르는 이들이 반드시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자기 십자가’라고 칭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십자가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나 아닌 타자를 위한 십자가입니다. 곧, 대의를 위한 희생의 짐, 나 아닌 너를 위한 내 수고의 짐, 나 아닌 우리, 나 아닌 우주 삼라만상의 회복과 상생을 위한 짐입니다.

그것은 내 몫의 짐입니다. 지금 내 눈에 밟히는 일상의 구멍들이 어쩌면 오늘 내가 지어야 할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에는 실패인 듯한 길이라도 그것이 사랑의 길이라면, 그것이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아프고 답답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여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오늘 읽은 사도 바울의 편지도 십자가의 도를 설명합니다.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주십시오.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 서로 한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13-17)

​차별금지법을 결사반대하는 교회, 의사 숫자 늘리려면 내 배 째라며 버티는 의사들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내동이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상기할 때면 이렇게 내가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짊어져야 할 것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수고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에 빠져있으면 그 십자가가 보이질 않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철저한 투쟁의 과정 없으면 두 눈 뻔히 뜨고도 보지 못합니다. 자기만 잘 되는 요술단지 같은 가짜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로 보일 뿐입니다. 그런 가짜 십자가는 지고 가기도 쉽습니다. 아니 질 필요도 없이 목걸이처럼 가볍게 뽐내며 매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천박했던 믿음은 십자가의 도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권세를 업고 자기 뜻을 관철하고 싶은데, 오히려 수난을 자처한다니 그런 신앙은 가짜라 여깁니다. 오늘날 다수의 목사들이 커밍아웃하고 있거니와, 득세하여 떵떵거리며 살기를 소망하고, 심지어 하느님과 맞짱 뜨겠다는 전광훈 류의 생각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 입을 통해 최악의 저주를 듣게 되지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내게 장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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