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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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백창욱
  • 승인 2020.08.24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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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열두 번째 주일설교문(20.08.23)

주일설교문(20. 8. 23) 성령강림 후 열두 번째 주일
마태 16:13-20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지난주에 우리는 사랑하는 한 성도님을 하나님 품으로 보냈습니다. 교회 이름으로 처음 하는 장례였는데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번 장례를 통해 ‘목사는 설교자’라는 인식을 특별히 했습니다.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는 죽음 앞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남편과 어린 자녀들을 생각하면 말문이 막힙니다. 
그러나 전례를 인도하는 사람은 말을 해야 합니다. 절차에 따라 예배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예배와 기도라면 편안히 할 텐데,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엄숙한 상황이어서 매번 각별한 마음상태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임종예식과 입관예식, 발인예식 기도를 해 주신 아내와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기독교 전례서에 여러 예문이 있지만 그것은 순전히 참고용일 뿐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고인만의 고유한 말씀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임종 때, 입관 때, 발인 때 주님이 그 때에 맞는 감동을 주셔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자리를 지켜주신 여러분 덕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의문점을 살펴보려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가 말씀한 ‘교회’에 대해서, 두 번째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맥락’입니다. 오늘 본문의 발단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뭐라 하든 그건 관심사가 아닙니다. 예수가 진짜 알고 싶었던 것은 제자들의 인식입니다. 제자들이 인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연이어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에 대해 베드로가 멋진 고백을 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예언자 중 한 분으로 말하는데 반해 베드로는 특별한 유일한 사람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는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칭찬하시며, 교회에 하늘 권세를 부여합니다. 하늘권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선언과 둘은 교회에 하늘 나라 열쇠를 준다는 내용입니다. 즉 땅에서 하늘에를 들어가려면 교회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엄청난 약속입니다. 

첫 번째 쟁점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는 말씀 중 ‘내 교회’라는 대목입니다. 
고백 후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너는 베드로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바위(베드로)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교회에 대해 말씀한 곳은 두 군데입니다. 오늘 본문 16:18과 18:17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입니다. 18장 교회 언급은 죄를 짓고 뉘우치지 않는 형제에 대한 치리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공동체가 예수의 입을 빌어 말했다는 게 선명히 보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미 교회가 있다는 것은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역사예수는 이방인, 세리를 품었지, 여기서처럼 배제하는 말씀을 한 적이 없습니다. 즉 예수의 직접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서말씀은 누구의 말인가요? 예수의 직접 말씀인가요? 아니면 이 말씀 역시 공동체가 예수의 입을 빌은 것인가요? 

우리가 아는 한, 역사 예수는 교회에 대해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역사예수에게 교회 개념이 있었을까 의문입니다. 역사 예수는 오직 하나님나라를 말했습니다. 역사예수가 교회를 말했는가에 대해 알려주는 근거는 다른 복음서들입니다.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는 교회라는 언급 자체가 없습니다. 역사예수가 교회를 말씀했다면, 다른 복음저자들이 교회를 빼뜨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만 ‘교회’를 언급한 것은 마태공동체만의 특별한 서술로 보는 게 맞습니다. 
알다시피 교회는 예수님 사후에 재림 약속도 희미해져 갈 때에, 따라서 종말관이 바뀌는 즈음에(재림 곧 종말만을 강렬히 소망하므로 다른 게 필요없었다.) 믿는 자들이 땅에서 예수믿음을 지속하기 위해 만든 대안체입니다. 교회는 제도화의 결실입니다. 고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교회는 마태공동체가 교회로 발전하면서 예수님의 입을 빌어 교회에 권위를 덧입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맥락’입니다. 고백의 원전은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막 8:29)입니다. 전에도 한 번 말씀했는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로 그리스도, 히브리어로 메시아입니다. 
히브리 문화에서는 메시아 하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알아듣습니다. 하나님이 ‘기름부어 택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희랍문화에서 그리스도를 말하면, 모두 갸우뚱합니다. ‘머리에 기름을 뒤집어쓰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하는 반응입니다. 즉 마가복음에서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십니다.” 하는 고백은 그리스어 맥락에서는 어떤 뜻인지 불분명한 고백입니다. 이런 맥락을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저자는 자기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윤색했습니다. 독자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살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십니다.” 그 사이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삽입어를 넣었습니다. 이렇게 윤색함으로 마가의 이상한 고백을 매우 온전한 신앙고백으로 고쳤습니다. 마가복음의 고백이 마태복음에서 더 나은 고백으로 바뀌는 과정을 말한 까닭은 각각의 저자들이 복음서를 쓰는 목적이 자기들의 상황을 감안하여 거기에 맞게 최선의 작업을 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럼 마태는 왜 베드로의 고백을 윤색했나요? 마태는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딛는 교회의 생존과 지속가능성이 최대 관심사입니다. 유대율법 질서라는 막강한 기득권 문화에서 예수 이름으로 생존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이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감당하나요? 교회에 하늘권세를 부여하는 길이 최선입니다. 어떤 문명이든 권력은 하늘을 등에 업고 권력을 신성화하여 신민들을 복속시켰습니다. 교회 역시 하늘 도식을 응용하되 새로운 내용으로 출발했습니다. 그 출발의 기원은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는 이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백의 이름을 바위라고 지었습니다. 왜 바위라고 했을까요? 바위만큼 요지부동인 물체는 없습니다. 천년 만년이 가도 흔들리지 않는 물체가 바위입니다. 고백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영원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도 박해를 견디고 굳건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어떤가요? 합당한 고백 위에 서 있나요? 그전부터 품은 의문이 있습니다. 예수를 향한 고백을 한국의 유사(기성, 관습)교회에 연결짓는 게 맞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코로나와 관련하여, 처음에는 신천지라는 집단이 재앙의 기원이 됐고 지금은 사랑제일이라는 극우 교회가 공공의 적이 됐습니다. 신천지나 사랑제일이나 모두 예수 이름으로 행세합니다. 신천지 정식이름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입니다. 사랑제일도 대한예수교장로회입니다. 주류교단은 신천지 때는 신천지가 사이비라서 그렇다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한국 유사교회들의 신학노선도 제 맛을 잃은지 오래 됐습니다. 이런 교회들 위에 오늘 성서말씀처럼 하늘의 권세를 부여하는 게 맞는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오늘 성서말씀 그대로 이런 교회들에게 하늘권세를 행사하라고 하면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이 절단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교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는데, 실제 이 유사교회들이 땅에서 매는 게 얼마나 많은가요. 이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모두 땅에서 매이면 하늘을 소망하는 일은 물 건너가는 것이고, 세상은 또 얼마나 혼란스럽고 비극이 되겠습니까. 예를 들면, 이들이 선전하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배타, 폐쇄적입니다. 반공, 성소수자, 이슬람, 차별금지법 반대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땅에서 매려고 광분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신앙과 순교로 포장합니다. 한국사회를 퇴행시키는 주장으로 먹고 삽니다. 땅에서조차 존재를 의심받는 집단에게 하늘권세를 말하는 자체가 얼마나 부적절한가요. 

마태의 고백이 마태시대의 산물이듯이, 오늘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맞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 고백은 지금 유사교회들의 막무가내 고백과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이념을 극복하고 이웃을 품고 사람을 사랑하는 선하고 평등한 세상을 돕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마가에 나오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마태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로 윤색했듯이, 오늘 우리 역시 이웃과 함께 사는 공감공명의 시대를 위해 새로운 고백을 해야 합니다. 고백은 삶으로 증거합니다. 고백에 맞는 진실한 바위로 굳게 서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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