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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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 백창욱
  • 승인 2020.08.1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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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열한 번째 주일설교문(20. 8. 16)

주일설교문(20. 8. 16) 성령강림 후 열한 번째 주일
마태 15:21-28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어제 김원웅 광복회장의 연설문 보았나요? 여러 가지 몰랐던 역사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화폐 속 인물에 독립운동가가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하니까 인도 화폐가 생각납니다. 인도는 모든 지폐에 오직 간디초상화만 있습니다. 독일정부가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자료를 보냈다는 이야기도 뜻밖입니다. 자료 중에는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만주국 건국 십년 축하연주회를 지휘하는 영상이 있다고 합니다. 국립묘지 서울현충원에 독립군 토벌에 앞장서고 국방부장관까지 한 자(신태영 전 국방부장관)가 가장 명당자리에 있고, 친일반민족인사 69명이 묻혀 있다고 했습니다. 김원웅회장은 ‘대한민국을 광복하라’ 로 연설을 마쳤습니다. 아직 광복이 안 됐다는 뜻입니다. 광복회장으로서 당연한 말을 했는데 통합당, 특히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연설내용에 큰 불만을 표했습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친일청산에 대해서는 별로 이견이 없습니다. 문제는 미국종속입니다. 815 민족자주대회 결의문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주권은 미국에 저당잡혀 있습니다. 한미워킹그룹이 남북정상들의 합의이행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한국군대는 미국군대와 합작해서 동족을 향한 전쟁연습을 합니다. 미국군대는 한국 땅에 사드도 넣고 세균실험도 하고 온갖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작권권 환수능력까지도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검증받아야 합니다. 이런 실정에서는 자주독립도 민주주의 완성도 불가능합니다. 조헌정목사님은 페북에 올린 8.15 소감에서 차라리 솔직하게 광복절이라고 하지 말고 분단일이라고 하자고 말했습니다. 사태를 정확히 인식해야 올바른 해결책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논쟁적인 본문입니다. 까닭은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를 대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여인은 귀신에 들려 괴로워하는 딸을 고침받고자 예수께 와서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과 태도는 쌀쌀맞고 배타적입니다. 예수는 민중을 제 몸처럼 사랑하시며 불쌍한 사람을 내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모습은 원래의 예수 모습과 다릅니다. 어떻게 봐야 하나요? 오늘 말씀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요? 

우선 예수님의 뜻을 파악하기 위한 전단계로 두 가지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의 이동동선이고 두 번째는 두로가 어떤 지역인지에 대해서입니다. 이동동선을 보는 이유는 예수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마태 14장, 세례요한의 죽음사건부터 보겠습니다. 예수는 요한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리 동네(갈릴리바다 서쪽이다)에서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물러갔습니다.(14:13) 피신 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아보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는 이곳에서도 병자들을 고치고, 급식이적을 행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인가요? 외딴 곳이 어디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갈릴리바다 건너편은 확실합니다. 건너편은 데가볼리 지역입니다. 데가볼리는 열 개의 그리스식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이 정통 유대인들의 집단주거지라면, 데가볼리는 주로 이방인이 사는 동네입니다. 즉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주변 이곳저곳에서 이스라엘 사람, 이방사람 가리지 않고 병을 고치고 급식이적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난 주 본문에 나오듯이 제자들을 독촉해서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 때 예수가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바다를 건너서 갈릴리 바다 서쪽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습니다.(14:34) 그곳에서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논쟁한 후, 오늘 본문장소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정리하면, 갈릴리바다 서쪽에서 건너편 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돌아와서 위쪽 지역인 두로시돈으로 간 것입니다. 
제 주장은 예수께서 다니신 곳 중, 갈릴리 바다 건너편은 이스라엘 사람보다는 이방사람이 더 많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는 그곳에서도 이스라엘, 이방 가리지 않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예수의 관심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민족이 아니라 어느 계급이냐는 민중에게 있습니다. 

두 번째로 두로, 시돈이 어떤 지역인지 보겠습니다. 김용옥의 『마가복음 강해』에 두로 지역에 대한 자세한 현장답사가 나옵니다.(마가 7:24-30에 있다) 저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두로는 아주 변방인 줄 알았습니다. 산골짝 동네이고 가나안 여인은 그 동네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시골아낙 쯤으로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근거는? 없습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성서를 볼 때, 늘 이스라엘 중심으로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다른 지역을 차별한 것 같습니다. (나는 이스라엘과 완전 무관한대,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한심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로는 엄청난 국제도시입니다. 김용옥이 현장에서 찍은 고대 유적지 사진은 이 도시의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을 웅변합니다. 돌기둥이 늘어선 주량형도로가 길게 있고, 거대목욕탕, 거대한 규모의 공동묘지,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차경기장이 있었습니다. 전차경기장은 길이가 480미터, 폭이 120미터, 4만 명의 관객을 수용했습니다. 전차경기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로마의 작은 트랙보다는 여기 큰 트랙에서 한번 뛰어본 사람이라야 프로경력을 인정받는다고 했습니다. 4년 마다 열리는 올림픽 전차경기에는 로마세계에서 쟁쟁한 인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처럼 두로는 시골 벽촌이 아니라 로마그리스문명이 대거 유입돼서 북적거리는 대도시였습니다. 되레 예루살렘이 기득권만 설치는 폐쇄적인 도시였고, 두로는 정반대로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사람들도 세련된 도시인입니다. 가나안 여인도 국제도시 두로의 품격에 맞게 교양 있는 귀부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예수가 이 가나안 여인을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예수가 가나안 여인의 계급에 거부감이 들었다고 봅니다. 가나안 여인이 민중이었으면 두말하지 않고 청을 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련되고 고급지게 보이는 여인의 풍모를 보고 마음이 별로 움직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 여인의 풍모는 제자들의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여인의 청에 아무 반응이 없자, 제자들이 대신 간청합니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23절)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민중을 구하는데 별로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급식이적 때 제자들은 핑계만 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일면식도 없는 여인을 위해 간청하나요? 품위있는 여인이 하도 간청하니까 자기들도 모르게 편을 들어준 것입니다. 이런 심리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추레한 사람에게는 거부감이 들고 좀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쓸데없이 우호적인 심리입니다. 노숙자에게 친절한가, 잘 차려입은 사람에게 친절한가. 

민중친화적인 예수는 그래서 더 원칙적으로 대했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아쉬울 게 없어 보이는 이방사람한테까지 내 공력을 쓸 마음은 없다는 속내입니다. 내키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 예수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는 매몰찹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인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인의 진가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본문에서 여인은 예수를 세 번이나 주님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간청하는 태도가 더욱 겸손하고 절실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22절)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25절)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7절) 처음에는 외치고 두 번째는 무릎 꿇고 간청하고, 세 번째는 모욕적인 말을 잘 받아들입니다. 세련되고 교양 넘치는 여성으로서, 외치고 무릎 꿇고 모욕적인 말을 소화하는 게, 하기 어려운 행동이지만 여인은 했습니다. 자신의 외모를 완전히 벗어버렸습니다. 오직 딸의 치유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받아넘기는 논리학, 대화법 등 자신이 쌓은 교양은 오로지 딸의 치유를 위해서만 사용했습니다. 민족도 계급도 아닌 오직 모성애로만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그제서야. 이 말은 예수의 태도전환을 말해줍니다. 여인의 간절함은 예수의 태도를 바꿨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여인의 태도를 기억하십시오. 자신의 자존심, 사회적 체면, 교양을 다 비우고 딸을 고침받고자 하는 일념으로 예수께 나아가는 태도입니다. 예수를 향한 나의 태도는 어떤가요? 간절함, 자기 비움, 일념으로 나가십시오. 그 겸손한 일념이 나를 구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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